안동 김씨/庶尹公의 후예

[스크랩] 석실서원묘정비(石室書院廟庭碑)

추읍산 2009. 10. 4. 09:02

석실서원 묘정비(石室書院廟庭碑)
碑文
石室書院廟庭之碑

石室書院廟庭碑
聖人作春秋垂空文而孟子當之於一治之數夫萬物之散聚皆在春秋而若論其大經大法則莫過於尊周而攘夷矣天下未嘗不亂而亂之旣極則天必生己亂之人而其人也無有土地之基本人民之勢力則亦只因聖人之空文以明夫大經大法而於是乎人類異於禽獸中國免於夷狄則是亦一治而己矣盖當我崇禎皇帝丙丁之間天下之亂可謂極矣我石室先生身任禮義之大宗以樹綱常於旣壤至於衆人不憚爲 鬼之議則又有以明言其不然於是其言愈屈而其氣愈伸其身愈困而其道愈亨以故其亂愈甚而其治愈定退之曰向無孟氏則皆服左 而言侏離其信然矣夫盖先生旣沒而中外章甫建祠於先生舊居之傍大江之濱而以 先生伯氏 仙源先生臨亂立 用扶世敎竝奉神牌而右享之盖經始於甲午五月妥侑於丙申十二月十四日噫若 石室先生所謂千百年乃一人者而又得 仙源先生於一家之天倫噫其盛矣嗚呼治亂者陰陽之理也聖人旣贊大易以見陽不可終無亂可以復治而又作春秋以垂治亂之具是道苟明則斯可謂治矣豈可以積陰蔽於九野而不謂陽德之昭明於下也故春秋雖曰因亂而作而天下之治未嘗無也雖然春秋旣曰文成數萬其指數千則聖人之薇辭奧義雖不可得以知而惟尊尙京師之義則炳如日星雖 者亦見之矣今與後之人凡入斯院升堂而鼓 者欲知 先生之道則只將聖人筆削之義毋强通其所難通而只於天理王法民 物則之不可易者講而明之則雖使聖人家奴復出於地中亦可也然後乃知先生之功之大而天之所以生先生者眞不偶然矣嗚呼是豈易與俗人言哉後十七年橫艾困敦三月日後學恩津宋時列記孫男壽增書幷篆

譯文
석실서원묘정비(石室書院廟庭之碑)

석실서원묘정비(石室書院廟庭碑)
성인이 {춘추(春秋)}를 지어 당시에 실행할 수 없었던 법규와 가르침을 후세에 드리웠고, 맹자(孟子)가 일치(一治:一治一亂說)의 운수를 만났으니, 무릇 만물의 흩어지고 모임이 모두 {춘추}에 있음이라. 만일 공명정대한 원리와 법칙을 논한다면 주왕실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보다 더한 것은 없다. 천하란 일찍이 어지럽지 않을 수 없으나 어지러움이 극에 달하면 하늘이 반드시 난을 그치게 할 사람을 낳았으며 그 사람은 토지를 기본으로 가지지 않고 백성의 세력에 근본을 두며, 또한 다만 성인의 가르침으로써 무릇 공명정대한 원리와 법칙을 밝힘이라. 이에 인류가 금수와 다르며 중국이 오랑캐로 화하는 것을 면하였나니, 또한 일치일 따름이다. 대개 우리 숭정황제(崇禎皇帝) 병자(丙子)·정묘년(丁卯年)간에 천하의 어지러움이 극에 달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우리 석실 선생이 몸소 예의의 대종(大宗)을 맡아 이미 무너진 곳에 강상을 세우시고, 모든 사람들이 귀신을 슬퍼하는 논의를 꺼리지 아니하였으나 그렇지 아니함을 또한 명확히 밝히셨다. 이에 그 말이 점점 왜곡되었으나 그 기개는 더욱 펴지고, 그 자신이 점점 곤경에 빠졌으나 그 도는 더욱 공고하였으며, 그 어지러움이 더욱 심해졌으나 그 다스림은 더욱 안정을 찾아갔다. 한퇴지(韓退之)가 말하기를, "옛날에 맹자가 없었다면 모두 오랑캐 옷을 입고, 오랑캐 말을 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러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무릇 대개 선생께서 돌아가시자 도성과 지방의 선비들이 선생의 옛 집 가까운 곳 큰 강가에 사당을 짓고, 선생의 맏형인 선원 선생이 병란을 당하여 슬펴하고 근심하며 절개를 지키고 목숨을 버리고, 세상의 교화를 바로 세웠다고 하여 함께 신패를 받들어 배향하였다. 살피건대 사당의 건립하는 일은 갑오년(甲午年) 5월에 시작하여 병신년(丙申年) 12월 14일에 마쳤다.
아! 석실 선생과 같은 이는 이른바 천백 년에 한 분이 나올 수 있는데, 또한 선원 선생을 한 집안에서 천륜으로 맺어 얻었으니, 참으로 창성하도다.
오호라! 다스리고 어지러움이란 음양(陰陽)의 이치로다. 성인께서 이미 주역을 협찬하시어, 양만이 끝까지 갈 수 없으며, 어지러움이 없어지고 나면 다스림을 회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셨다. 또한 {춘추}를 지어 어지러움과 다스림의 도구로서 내려주셨는데, 이 도가 진실로 밝아지면 다스려졌다고 이를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음을 쌓아 깊은 들에 가리워 놓고 양덕(陽德)이 아래에까지 비추어 밝아진다고 이르지 않는가. 그러므로 {춘추}가 비록 어지러움으로 인하여 만들어졌다고 말하지만, 천하를 다스리는 도가 일찍이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춘추}에서 이르기를, "조문이 비록 수만이고 그 조목이 수천이어서 성인의 미묘한 말과 깊은 뜻을 비록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오직 중국을 높이 받드는 뜻은 해와 별처럼 빛나니 비록 눈먼 장님이라 하더라도 또한 이를 볼 것이다."라고 일렀으니, 후대의 사람과 무릇 이 원(院)에 들어와 당(堂)에 올라와 예를 올리는 자들이 선생의 도를 알고자 한다면, 다만 성인이 {춘추}를 지으면서 사실을 직필(直筆)하여 쓰고 산삭(刪削)한 뜻을 가지고 이해하기 어려운 뜻을 억지로 알려고 하지 말라. 다만 하늘의 이치와 왕법(王法), 백성의 떳떳한 도리 및 사물의 법칙이 쉽게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강구하여 밝히면, 성인의 가노(家奴)가 세상에 다시 나타난다 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그런 후에 선생의 공이 크며, 천지가 선생을 내신 것이 진실로 우연이 아님을 알 것이다. 오호라. 이 어찌 쉽게 속인과 더불어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 뒤 17년 횡예인돈(橫艾因敦:임자년 舊甲子) 3월 일에 후학 은진 송시열(宋時烈)은 글을 짓고, 손자 수증(壽增)은 글과 전액을 쓰다.

 

출처 : 無俗軒
글쓴이 : 八玉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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