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동김씨의 세거지가 셋 있습니다. 경북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와 한양의 장의동(현재 종로구 청운동), 그리고 양주의 석실(현재 남양주시 수석동)입니다. 안동은 육신의 고향이고 장의동은 권력의 중심일 때의 장소입니다. 석실은 권력에서 잠시 물러나 새로운 힘을 기르고 그들의 정신을 이어가는 장소입니다.
석실은 청음 김상헌(1570~1652)과 관련있는 장소입니다. 광해군 시대에 은거해 있던 안동김씨들은 인조반정(1623) 이후 권력에 진입합니다. 그리고 안동김문의 철학과 신념을 보여준 것이 병자란(1636)입니다. 청음 김상헌의 9살 많은 큰 형인 선원 김상용(1561~1637)은 강화를 지키다 성이 함락되자 다른 이들은 도망가도 폭약 위에 앉아 불을 당겼습니다. 어쩌면 봉림대군(나중에 효종 임금, 1619~1659, 재위 1649~1659)은 직접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청음 김상헌은 인조를 뒤따라 남한산성으로 갔습니다(1636년 12월). 끝까지 항복이 아닌 항전을 주장했습니다. 최명길이 쓴 항복문서를 찢기도 하고 자살을 시도했지만 죽지않았습니다. 임금은 삼전도에서 청의 태종에게 항복했습니다(1637년 1월)
청은 명을 치기 위한 조선군대의 파병을 요구했습니다.(1639년) 끝까지 반대하던 김상헌은 당시 청의 서울이었던 선양으로 잡혀갑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6년간의 인질생활을 마치고 돌아 온 김상헌은 한양이 아닌 석실에서 살았습니다.(1645~1652) 스스로의 호를 석실산인이라 붙였습니다. 석실에 자리잡은 이유는 한양과 가까우며 수운을 통해 물자를 조달할 수 있었고, 경치가 좋다는 점 등 입니다.
김상헌이 죽은 후 큰형인 김상용까지 함께 제사하는 석실사(石室祠)를 세웁니다. 2년 후(1656, 효종 7년), 사당은 석실서원이 됩니다. 조선 후기의 권력은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져 갑니다. 그 중심에 안동김씨가 있습니다. 그러니 석실서원도 현종임금의 사액서원이 됩니다.(1663)
석실서원은 숙종시대(재위 1674~1720)에 전성기를 맞습니다. 김상헌의 손자인 김수항(金壽恒, 1629~1689)에겐 가운데 이름이 昌자를 쓰는 여섯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육창(六昌)이라 합니다. 그의 아들 둘은 권력의 길로 나갔지만 둘은 학문과 교육의 길로 나갔습니다. 三洲 金昌協(1651~1708)과 三淵 金昌翕(1653~1722)이 석실서원을 이끌었습니다. 김창흡의 영향을 받은 眞景山水의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은 <경교명승첩>에서 '석실서원'과 '삼주삼산각'을 통해 옛 모습을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삼주삼산각(겸재 정선)
경종 때 위축되었던 석실서원이 영조 때(재위 1725~1776) 다시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그 중심 인물은 김창협의 손자인 金元行(1702~1772)입니다. 김원행의 제자 가운데 담헌 홍대용(1731~1781)이 있습니다. 12살에 김원행의 문하에 들어 온 홍대용은 10년 간 공부한 후 그의 문하를 떠납니다. 홍대용의 학문 목표인 실심실학(實心實學)은 북학(北學)으로, 나아가 실학으로 이어집니다.
김창집의 후손인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의 딸이 순조의 왕비가 되면서, 안동김씨의 60년 세도정치를 엽니다. 김좌근은 세번의 영의정을 역임하면서 권력의 절정에 이릅니다. 석실서원도 김상용, 김상헌, 김수항, 김창집, 김창협, 김창흡, 김원행, 김이안, 김조순이 배향됩니다. 안동김문의 가묘(家廟)가 되어버립니다.
(안동김씨의 이름들 : 金尙 0 -->金光 0 -->金壽 0 -->金昌 0 -->金 0 謙 -->金 0 行-->金履 0 -->
金 0 淳 -->金 0 根-->金炳 0 -->金 0 鎭-->金 0 漢-->金 0 東)
석실서원 터에서 한강의 상류쪽을 바라봅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두물에서 만나 하나의 강이되어 흐릅니다. 곧게 흐르던 한강은 오른쪽으로 휘어집니다. 석실이 있는 곳은 하천 공격사면의 침식에도 남은 가파른 산지입니다. 건너편 미사리는 하천 물의 흐름이 느려지면서 모래와 자갈이 퇴적된 평탄한 지형입니다. 미사리의 퇴적이 상류의 물흐름을 막아 유속이 느리고 하폭은 넓어집니다. 사람들은 이 지역의 한강을 미호(渼湖)라고 불렀습니다. 물이 돌아가는 호수같이 넓은 곳이라는 뜻이겠죠.
김원행이 호를 미호라 했습니다. 1747년 봄 김원행은 석실에서 여주까지 배를 타고 여행했나 봅니다. 당연히 한 수 남겨야겠죠?
朝發石室祠 아침에 석실사(石室祠)를 출발하여
登舟自玆始 미호에서 배에 올랐네
江山旣淸曠 강산은 맑고 시원하며
雲日况晴美 구름 낀 날씨지만 청명하고 아름다워라
桃花依絶岸 복숭아꽃은 가파른 언덕에 있고
老屋多臨水 오래된 집들은 물가에 닿았네
中流散雲帆 강물 속 안개를 헤치며 저어가자
風濤浩未已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 그치지 않네
三峰出天畔 산봉우리는 하늘로 솟았고
秀色每相値 빼어난 경치를 매번 만나네
持杯屢相屬 술잔 잡고 서로 몇 차례씩 권하자
歌詠亦互起 노랫소리가 함께 일어나네
樂哉滄洲趣 즐겁구나 강호의 정취여
吾道信在此. 나의 길은 참으로 여기에 있네.1)
1) 김원행, 『渼湖集』권1 詩, 「自渼湖發船 向驪州」.
1863년 고종이 임금으로 즉위하면서 안동김씨의 권력은 서리를 맞습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서원철폐령을 내립니다.(1869) 안동김씨에게 많은 모멸을 받았던 흥선대원군이 석실서원을 살려둘 리 없었습니다. 서원은 허물어지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습니다.
1900년. 고종임금은 금곡의 양주조씨일가의 무덤을 자기가 죽은 후 묻힐 곳으로 정합니다. 현재 고종과 명성황후가 묻혀있는 홍릉(洪陵)입니다. 양주조씨일가의 무덤 이장 지역을 석실서원 자리로 내 줍니다. 석실서원의 흔적조차 없앰일겁니다.
이장해 온 조말생(趙末生, 1370~1447)의 묘. 려말선초 사람입니다. 병조판서까지 했네요.
양주조씨 집안의 사당인 영모재.
한강변에 서 있는 두 그루의 고목만이 석실서원의 전성기를 지켜보았을 겁니다.
빈 터를 돌아보고 그 시대의 흔적을 느껴보는 것은 답사의 감동을 오랫토록 진하게 합니다. 봄비에 몇 번씩 요술을 부린 봄날씨였지만 석실서원이 변하여 양주조씨의 무덤이 된 언덕에서 한강을 바라보는 눈맛은 일품이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 화려했던 날들이 가고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면 흔적조차 없어질 겁니다. 자연의 질서에 순종할 수 밖에 없다는 걸 깨달아야겠죠. 안동김씨 세력도, 왕권수호세력도...... 모두 땅 위에서 사라졌습니다. 어느 누구도 역사 앞에서 승자는 없었습니다. 역사는 우리 것의 자랑보다 아픔과 잘못을 곱씹으며 우리 후손들이 이를 배워 되풀이하지 않게 하려함일 겁니다.
긴내 선생님은 담헌 홍대용을 연구하셨습니다. 10년간 담헌을 가르친 스승의 2중적 행동에 스승을 반박하고 그의 문하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실심실학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곡학아세만을 일삼는 오늘의 학자들에게 따끔한 일침이 되는 스승이 있건만 오늘날의 학자들은 담헌을 멀찍이 피해 다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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