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석실서원도>를 강성남 화백이 모사한 그림이다
[남양주역사기행49] 석실서원 (石室書院) 민경조 (퇴계원산대놀이보존회 회장 )
1864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하여 서원의 건물들은 자취 없이 사라 졌으나 그 이전에는 원주(院主) 20명, 재직(齋直) 10명, 모군(募軍) 40명의 규모였다고 『양주읍지(楊州邑誌)』 석실서원조(石室書院條)는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수석동(水石洞)으로 부르고 있으나 옛적에는 “세원말” 또는 “서원말”로서 서원(書院)이 있던 마을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수석리 석실마을(세원마을),미음마을(내미음.외미음 마을)
원래의 석실은 지금의 서원말에서 북동쪽으로 약 20여리 떨어진 곳으로서 안동 김씨(安東金氏) 세장지지(世葬之地)이며, 특히 석실선인(石室仙人) 김상헌(金尙憲) 선생의 묘가 있어 석실(石室) 마을로 불리워졌다. 1636년 병자국치(丙子國恥)를 당하여 청(淸)나라에 압송, 6년 여에 걸친 온갖 회유와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조선 성리학의 이념 구현을 위해 목숨을 걸고 불굴의 기개를 보여 주었다. 청음(淸陰)이 76세의 노인이 되어 심양에서 풀려나 석실(石室)마을에 있는 연식소(燕息所; 휴식소)인 송백당(松柏堂)으로 돌아와 1652년 81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1663년 ‘석실서원(石室書院)’이란 사액을 받고 병란 초기 강화에서 순절한 청음의 백씨(伯氏)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1561-1637)과 두 형제 분을 합사 배향하였다. 그리고 연이어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등이 추향(追享)되었으니 문곡(文谷)은 청음(淸陰)의 친손자로 송시열(宋時烈)과 북벌론을 주장하다가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사사되었고 노봉(老峰)은 우암(尤庵)의 제자로서 만동묘(萬東廟)를 세우는데 앞장서며 청(淸)의 존재를 불인정하였고, 정관재는 어린나이(10세)로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포로로 청나라로 끌려가다가 내종사촌형인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을 길에서 우연히 만나 구사일생으로 구출되니 평생을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으로 채워진 절의파였다. 농암(農巖)은 문곡(文谷)의 차남으로 1695년 경부터 석실서원에 머물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니 그 대표적 제자는 이미 “삼주삼산각(三洲三山閣)”편에 소개한바 있다.
계속하여 김창집(金昌集), 창흡(昌翕) 형제, 김원행(金元行), 김이안(金履安), 김조순(金祖淳)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추배향(追配享)되었다.
석실서원은 남양주시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복원을 더 이상 늦추어서는 안되며, 문중은 물론 유림(儒林).민(民).관(官)이 하나가 되어 서둘러야 한다.
그리고 남양주문화원을 중심으로 석실서원 복원운동을 짜임새 있게 전개하여야 한다. 이보다 더 급한 문화사업이 있을까? [http://남양주타임즈 2008-11-30] function copy_clip(strData) { clipboardData.setData("Text", strData); alert("복사되었습니다. 붙여넣기(Ctrl+V)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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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실서원 터
신안동김씨의 세거지가 셋 있습니다.
경북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와 한양의 장의동(현재 종로구 청운동),
그리고 양주의 석실(현재 남양주시 수석동)입니다.
안동은 육신의 고향이고 장의동은 권력의 중심일 때의 장소입니다.
석실은 권력에서 잠시 물러나 새로운 힘을 기르고 그들의 정신을 이어가는 장소입니다.
석실은 청음 김상헌(1570~1652)과 관련있는 장소입니다.
광해군 시대에 은거해 있던 안동김씨들은 인조반정(1623) 이후 권력에 진입합니다.
그리고 안동김문의 철학과 신념을 보여준 것이 병자란(1636)입니다.
청음 김상헌의 9살 많은 큰 형인 선원 김상용(1561~1637)은
강화를 지키다 성이 함락되자 다른 이들은 도망가도 폭약 위에 앉아 불을 당겼습니다.
어쩌면 봉림대군(나중에 효종 임금, 1619~1659, 재위 1649~1659)은 직접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청음 김상헌은 인조를 뒤따라 남한산성으로 갔습니다(1636년 12월).
끝까지 항복이 아닌 항전을 주장했습니다.
최명길이 쓴 항복문서를 찢기도 하고 자살을 시도했지만 죽지않았습니다.
임금은 삼전도에서 청의 태종에게 항복했습니다(1637년 1월)
청은 명을 치기 위한 조선군대의 파병을 요구했습니다.(1639년)
끝까지 반대하던 김상헌은 당시 청의 서울이었던 선양으로 잡혀갑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6년간의 인질생활을 마치고 돌아 온 김상헌은 한양이 아닌 석실에서 살았습니다.(1645~1652)
스스로의 호를 석실산인이라 붙였습니다.
석실에 자리잡은 이유는
한양과 가까우며 수운을 통해 물자를 조달할 수 있었고, 경치가 좋다는 점 등 입니다.
김상헌이 죽은 후 큰형인 김상용까지 함께 제사하는 석실사(石室祠)를 세웁니다.
2년 후(1656, 효종 7년), 사당은 석실서원이 됩니다.
조선 후기의 권력은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져 갑니다.
그 중심에 안동김씨가 있습니다.
그러니 석실서원도 현종임금의 사액서원이 됩니다.(1663)
석실서원은 숙종시대(재위 1674~1720)에 전성기를 맞습니다.
김상헌의 손자인 김수항(金壽恒, 1629~1689)에겐 가운데 이름이 昌자를 쓰는 여섯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육창(六昌)이라 합니다.
그의 아들 둘은 권력의 길로 나갔지만 둘은 학문과 교육의 길로 나갔습니다.
三洲 金昌協(1651~1708)과 三淵 金昌翕(1653~1722)이 석실서원을 이끌었습니다.
김창흡의 영향을 받은 眞景山水의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은
<경교명승첩>에서 '석실서원'과 '삼주삼산각'을 통해 옛 모습을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삼주삼산각(겸재 정선)
경종 때 위축되었던 석실서원이 영조 때(재위 1725~1776) 다시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그 중심 인물은 김창협의 손자인 金元行(1702~1772)입니다.
김원행의 제자 가운데 담헌 홍대용(1731~1781)이 있습니다.
12살에 김원행의 문하에 들어 온 홍대용은 10년 간 공부한 후 그의 문하를 떠납니다.
홍대용의 학문 목표인 실심실학(實心實學)은 북학(北學)으로, 나아가 실학으로 이어집니다.
김창집의 후손인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의 딸이 순조의 왕비가 되면서,
안동김씨의 60년 세도정치를 엽니다.
김좌근은 세번의 영의정을 역임하면서 권력의 절정에 이릅니다.
석실서원도 김상용, 김상헌, 김수항, 김창집, 김창협, 김창흡, 김원행, 김이안, 김조순이 배향됩니다.
안동김문의 가묘(家廟)가 되어버립니다.
(안동김씨의 이름들 : 金尙 0 -->金光 0 -->金壽 0 -->金昌 0 -->金 0 謙 -->金 0 行-->金履 0 -->
金 0 淳 -->金 0 根-->金炳 0 -->金 0 鎭-->金 0 漢-->金 0 東)
석실서원 터에서 한강의 상류쪽을 바라봅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두물에서 만나 하나의 강이되어 흐릅니다.
곧게 흐르던 한강은 오른쪽으로 휘어집니다.
석실이 있는 곳은 하천 공격사면의 침식에도 남은 가파른 산지입니다.
건너편 미사리는 하천 물의 흐름이 느려지면서 모래와 자갈이 퇴적된 평탄한 지형입니다.
미사리의 퇴적이 상류의 물흐름을 막아 유속이 느리고 하폭은 넓어집니다.
사람들은 이 지역의 한강을 미호(渼湖)라고 불렀습니다.
물이 돌아가는 호수같이 넓은 곳이라는 뜻이겠죠.
김원행이 호를 미호라 했습니다.
1747년 봄 김원행은 석실에서 여주까지 배를 타고 여행했나 봅니다.
당연 한 수 남겨야겠죠?
朝發石室祠 아침에 석실사(石室祠)를 출발하여
登舟自玆始 미호에서 배에 올랐네
江山旣淸曠 강산은 맑고 시원하며
雲日况晴美 구름 낀 날씨지만 청명하고 아름다워라
桃花依絶岸 복숭아꽃은 가파른 언덕에 있고
老屋多臨水 오래된 집들은 물가에 닿았네
中流散雲帆 강물 속 안개를 헤치며 저어가자
風濤浩未已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 그치지 않네
三峰出天畔 산봉우리는 하늘로 솟았고
秀色每相値 빼어난 경치를 매번 만나네
持杯屢相屬 술잔 잡고 서로 몇 차례씩 권하자
歌詠亦互起 노랫소리가 함께 일어나네
樂哉滄洲趣 즐겁구나 강호의 정취여
吾道信在此. 나의 길은 참으로 여기에 있네.1)
1) 김원행, 『渼湖集』권1 詩, 「自渼湖發船 向驪州」.
1863년 고종이 임금으로 즉위하면서 안동김씨의 권력은 서리를 맞습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서원철폐령을 내립니다.(1869)
안동김씨에게 많은 모멸을 받았던 흥선대원군이 석실서원을 살려둘 리 없었습니다.
서원은 허물어지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습니다.
1900년. 고종임금은 금곡의 양주조씨일가의 무덤을 자기가 죽은 후 묻힐 곳으로 정합니다.
현재 고종과 명성황후가 묻혀있는 홍릉(洪陵)입니다.
양주조씨일가의 무덤 이장 지역을 석실서원 자리로 내 줍니다.
석실서원의 흔적조차 없앰일겁니다.
이장해 온 조말생(趙末生, 1370~1447)의 묘. 려말선초 사람입니다. 병조판서까지 했네요.
양주조씨 집안의 사당인 영모재.
한강변에 서 있는 두 그루의 고목만이 석실서원의 전성기를 지켜보았을 겁니다.
빈 터를 돌아보고 그 시대의 흔적을 느껴보는 것은 답사의 감동을 오랫토록 진하게 합니다.
봄비에 몇 번씩 요술을 부린 봄날씨였지만
석실서원이 변하여 양주조씨의 무덤이 된 언덕에서
한강을 바라보는 눈맛은 일품이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 화려했던 날들이 가고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면 흔적조차 없어질 겁니다.
자연의 질서에 순종할 수 밖에 없다는 걸 깨달아야겠죠.
안동김씨 세력도, 왕권수호세력도......
모두 땅 위에서 사라졌습니다.
어느 누구도 역사 앞에서 승자는 없었습니다.
역사는 우리 것의 자랑보다
아픔과 잘못을 곱씹으며
우리 후손들이 이를 배워 되풀이하지 않게 하려함일 겁니다.
긴내 선생님은 담헌 홍대용을 연구하셨습니다.
10년간 담헌을 가르친 스승의 2중적 행동에 스승을 반박하고 그의 문하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실심실학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곡학아세만을 일삼는 오늘의 학자들에게 따끔한 일침이 되는 스승이 있건만
오늘날의 학자들은 담헌을 멀찍이 피해 다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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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실서원의 역사는 1654년(효종 5)에 건립된 석실사(石室祠)에서 기원한다.
석실사는 김상헌, 김상용 형제를 모신 사당이었는데,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지키다 성이 함락되자 자결했고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하기를 거부한 척화파 인물이었다.
이후 김상헌은 청나라의 파병 요구를 반대하다가 심양으로 잡혀가 6년 동안 볼모생활을 했고
고국으로 돌아온 후 석실에 거처를 마련했다. 이 때 김상헌은 자신의 별호를 '석실(石室)'이라 지었다.
김상헌이 사망한 직후에 세워진 석실사는 2년 후 석실서원으로 확대되었고,
1663년(현종 4)에는 국가에서 공인하는 사액서원이 되었다.
당시 조선의 정국은 서인이 정권을 장악한 가운데 기회가 엿보아 청을 공격하여 중원을 회복시키자는
북벌론이 우세했는데, 석실서원은 이러한 시대 이념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장소로 부각되었다.
1672년에 송시열이 석실서원의 묘정비문(廟庭碑文)을 지으면서
김상헌 형제의 의리를 부각시킨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석실서원의 숙종 대에 들어와 전성기를 맞았다.
이 때 석실서원의 교육은 김상헌의 증손인 김창협, 김창흡 형제가 담당했는데,
그들의 문하에서는 이재, 어유봉, 이병연과 같은 학자들이 교육을 받았다.
진경산수의 대가인 정선은 김창흡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석실서원 출신인 이병연과 친분이 깊었는데,
그가 한강에서 바라본 석실서원의 전경을 그린 것도 이런 인연이 있어서였다.
이 무렵 석실서원에는 김수항, 민정중, 이단상, 김창협이 추가로 배향되었는데,
이는 서인 노론계가 당시의 정국을 장악한 것과 관계가 있었다.
경종 대에 세력이 위축되었던 석실서원이 다시 전성기를 맞은 것은 영조 대였다.
이때의 교육은 김창협의 손자인 김원행이 주도했는데, 그는 서원의 학습 규정을 새롭게 마련하고
학생들이 숙식할 건물을 추가로 지었으며, 학생들에게 경세학에도 관심을 가질 것을 강조했다.
김원행의 문하에서는 박윤원, 홍대용, 황윤석 같은 학자들이 교육을 받았는데,
홍대용과 황윤석은 청의 발달된 문물을 도입하자는 북학론을 주장하는 학자가 되었다.
김원행의 아호인 '미호(渼湖)'는 석실서원 앞을 흐르는 한강의 별칭이었다.
석실서원은 18세기 진경문화와 북학사상의 산실로 기능하였다.
석실서원이 발전한 데에는 노론계 학자의 중심지라는 정치적 이유가 있었지만,
한강 수로를 따라 서울에 쉽게 갈 수 있다는 접근성과
주변의 산수가 아름답다는 환경적 요인이 작용한 측면이 있었다.
1747년 봄에 김원행은 미호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따라 여주까지 여행했는데,
주변의 경치를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아침에 석실사(石室祠)를 출발하여 이곳(미호)에서 배에 올랐네. 강산은 맑고 시원하며 구름 낀 날씨지만 청명하고 아름다워라. 복숭아꽃은 가파른 언덕에 있고 오래된 집들은 물가에 닿았네. 강물 속 안개를 헤치며 저어가자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 그치지 않네. 산봉우리는 하늘로 솟았고 빼어난 경치를 매번 만나네. 술잔 잡고 서로 몇 차례씩 권하자 노랫소리가 함께 일어나네. 즐겁구나 강호의 정취여, 나의 길은 참으로 여기에 있도다.
석실서원은 철종대에 김창흡, 김원행, 김이안, 김창집, 김조순 등이 추가로 배향되면서
안동김씨의 가묘(家廟)로 성격이 변화했다.
1868년에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리면서 석실서원을 폐쇄한 것도 이런 상황과 관련이 있었다.
이후 1900년에 금곡에 홍릉이 조성되면서 그곳에 있던 조말생의 묘소가 이곳으로 옮겨왔다.
석실서원 터에 있는 양주 조씨 사당, 영모재
석실서원 터는 현재 남양주시 와부면 수석동에 있는데,
토평 인터체인지에서 소 방향으로 가다가 조말생 묘소 표석이 있는 쪽으로 우회전해서 들어가면 된다.
필자는 지난 연말에 이곳을 방문했는데 주변의 풍광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러나 석실서원과 관련된 자취는 전혀 보이지 않고
모장산 끝자락에 1987년 9월 17일 경기도에서 세운 '석실서원지' 표석 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이 표석의 앞쪽에는 양주 조씨의 사당인 영모재(永慕齋)가 세워졌고
뒤쪽으로는 조말생을 비롯한 조씨 일가들의 산소가 자리 잡았다.
한강변에는 음식점과 카페가 들어서고 있는데 10년 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보다 숫자가 늘어났다.
석실서원은 조선후기의 이름난 학자들을 배출한 산실이었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이제는 이를 기억하는 사람조차 드문 것이 못내 아쉬웠다.
- 김문식(단국대 사학과 교수)
- 경기문화재단, 茶와 함께하는 경기도이야기 제8호, 2001. 1. 17
석실서원 묘정비(石室書院廟庭碑)
石室書院廟庭之碑 聖人作春秋垂空文而孟子當之於一治之數夫萬物之散聚皆在春秋而若論其大經大法則莫過於尊周而攘夷矣天下未嘗不亂而亂之旣極則天必生己亂之人而其人也無有土地之基本人民之勢力則亦只因聖人之空文以明夫大經大法而於是乎人類異於禽獸中國免於夷狄則是亦一治而己矣盖當我崇禎皇帝丙丁之間天下之亂可謂極矣我石室先生身任禮義之大宗以樹綱常於旣壤至於衆人不憚爲 鬼之議則又有以明言其不然於是其言愈屈而其氣愈伸其身愈困而其道愈亨以故其亂愈甚而其治愈定退之曰向無孟氏則皆服左 而言侏離其信然矣夫盖先生旣沒而中外章甫建祠於先生舊居之傍大江之濱而以 先生伯氏 仙源先生臨亂立 用扶世敎竝奉神牌而右享之盖經始於甲午五月妥侑於丙申十二月十四日噫若 石室先生所謂千百年乃一人者而又得 仙源先生於一家之天倫噫其盛矣嗚呼治亂者陰陽之理也聖人旣贊大易以見陽不可終無亂可以復治而又作春秋以垂治亂之具是道苟明則斯可謂治矣豈可以積陰蔽於九野而不謂陽德之昭明於下也故春秋雖曰因亂而作而天下之治未嘗無也雖然春秋旣曰文成數萬其指數千則聖人之薇辭奧義雖不可得以知而惟尊尙京師之義則炳如日星雖 者亦見之矣今與後之人凡入斯院升堂而鼓 者欲知 先生之道則只將聖人筆削之義毋强通其所難通而只於天理王法民 物則之不可易者講而明之則雖使聖人家奴復出於地中亦可也然後乃知先生之功之大而天之所以生先生者眞不偶然矣嗚呼是豈易與俗人言哉後十七年橫艾困敦三月日後學恩津宋時列記孫男壽增書幷篆
석실서원묘정비(石室書院廟庭之碑)
원래 수석동 석실서원 터에 있었으나, 해방과 더불어 이곳 와부읍 석실마을로 옮겼다.
원래는 안동김씨 김상용(우의정), 김상헌(좌의정) 형제를 배향하였으나,
김수항(영의정), 민정중(좌의정), 이단상(집의), 김창집(영의정), 김창협(이조판서),
김창흡(집의), 김행원(찬선), 이안(좨주), 조순(영돈녕부사) 등을 추향하였다.
성인이 <춘추(春秋)> 지어 당시에 실행할 수 없었던 법규와 가르침을 후세에 드리웠고,
맹자(孟子)가 일치(一治:一治一亂說)의 운수를 만났으니,
무릇 만물의 흩어지고 모임이 모두 <춘추>에 있음이라.
만일 공명정대한 원리와 법칙을 논한다면 주왕실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보다 더한 것은 없다.
천하란 일찍이 어지럽지 않을 수 없으나 어지러움이 극에 달하면
하늘이 반드시 난을 그치게 할 사람을 낳았으며
그 사람은 토지를 기본으로 가지지 않고 백성의 세력에 근본을 두며,
또한 다만 성인의 가르침으로써 무릇 공명정대한 원리와 법칙을 밝힘이라.
이에 인류가 금수와 다르며 중국이 오랑캐로 화하는 것을 면하였나니, 또한 일치일 따름이다.
대개 우리 숭정황제(崇禎皇帝) 병자(丙子) 정묘년(丁卯年)간에
천하의 어지러움이 극에 달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우리 석실 선생이 몸소 예의의 대종(大宗)을 맡아 이미 무너진 곳에 강상을 세우시고,
모든 사람들이 귀신을 슬퍼하는 논의를 꺼리지 아니하였으나 그렇지 아니함을 또한 명확히 밝히셨다.
이에 그 말이 점점 왜곡되었으나 그 기개는 더욱 펴지고,
그 자신이 점점 곤경에 빠졌으나 그 도는 더욱 공고하였으며,
그 어지러움이 더욱 심해졌으나 그 다스림은 더욱 안정을 찾아갔다.
한퇴지(韓退之)가 말하기를,
"옛날에 맹자가 없었다면 모두 오랑캐 옷을 입고, 오랑캐 말을 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러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무릇 대개 선생께서 돌아가시자
도성과 지방의 선비들이 선생의 옛 집 가까운 곳 큰 강가에 사당을 짓고,
선생의 맏형인 선원 선생이 병란을 당하여 슬퍼하고 근심하며 절개를 지켜 목숨을 버리고,
세상의 교화를 바로 세웠다고 하여 함께 신패를 받들어 배향하였다.
살피건대 사당의 건립하는 일은
갑오년(甲午年) 5월에 시작하여 병신년(丙申年) 12월 14일에 마쳤다. 아! 석실 선생과 같은 이는 이른바 천백 년에 한 분이 나올 수 있는데,
또한 선원 선생을 한 집안에서 천륜으로 맺어 얻었으니, 참으로 창성하도다.
오호라! 다스리고 어지러움이란 음양(陰陽)의 이치로다.
성인께서 이미 주역을 협찬하시어, 양만이 끝까지 갈 수 없으며,
어지러움이 없어지고 나면 다스림을 회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셨다.
또한 <춘추>를 지어 어지러움과 다스림의 도구로서 내려주셨는데,
이 도가 진실로 밝아지면 다스려졌다고 이를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음을 쌓아 깊은 들에 가리워 놓고 양덕(陽德)이 아래에까지 비추어 밝아진다고 이르지 않는가.
그러므로 <춘추>가 비록 어지러움으로 인하여 만들어졌다고 말하지만,
천하를 다스리는 도가 일찍이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춘추>에서 이르기를,
"조문이 비록 수만이고 그 조목이 수천이어서 성인의 미묘한 말과 깊은 뜻을
비록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오직 중국을 높이 받드는 뜻은 해와 별처럼 빛나니,
비록 눈먼 장님이라 하더라도 또한 이를 볼 것이다."라고 일렀으니,
후대의 사람과 무릇 이 원(院)에 들어와 당(堂)에 올라와 예를 올리는 자들이
선생의 도를 알고자 한다면, 다만 성인이 <춘추>를 지으면서 사실을 직필(直筆)하여 쓰고
산삭(刪削)한 뜻을 가지고 이해하기 어려운 뜻을 억지로 알려고 하지 말라.
다만 하늘의 이치와 왕법(王法), 백성의 떳떳한 도리 및 사물의 법칙이
쉽게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강구하여 밝히면,
성인의 가노(家奴)가 세상에 다시 나타난다 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그런 후에 선생의 공이 크며, 천지가 선생을 내신 것이 진실로 우연이 아님을 알 것이다.
오호라. 이 어찌 쉽게 속인과 더불어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 뒤 17년 횡예인돈(橫艾因敦:임자년 舊甲子) 3월 일에
후학 은진 송시열(宋時烈)은 글을 짓고, 손자 수증(壽增)은 글과 전액을 쓰다.
석실서원(石室書院)
석실서원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도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서원으로,
이후 김상용(金尙容), 김수항(金壽恒), 민정중(閔鼎重), 이단상(李端相), 김창집(金昌集),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김원행(金元行), 김이안(金履安), 김조순(金祖淳)이 배향되었다.
이경석(李暻奭)을 위시한 당대 조정의 명사들과 사림(士林)의 발의로
1656년(효종 7) 창건된 석실서원은
사림의 강학(講學)과 장수(藏修)라는 서원 본래의 기능만이 아니라 사림정치 이래
붕당정국이 변전하는 속에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서원으로 발전하였다.
처음에는 서인계 서원으로,
이어 노, 소론 분당 후에는 노론계,
노론 내에서 인물성(人物性) 논쟁으로 호론(湖論), 낙론(洛論)이 갈릴 때는 낙론의 진원지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 후기 사대부문화의 큰 특색인 진경문화(眞景文化)의 산실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영정조 연간의 탕평정국에서는 한때 조제(調劑) 탕평에 반대하는 의리론(義理論)의 본거지였으며,
국구(國舅) 김한구(金漢?)와 결탁한 호론게의 정치세력에 대항하는
척신 홍봉한의 정치적 지지세력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김상헌의 직계 후손이 주축이 된 안동김씨 세도정권하에서는
집권명분을 정당화하는 정치도구가 되기도 하였다.
즉, 석실서원은 조선 후기 많은 서원 가운데서도
정치적, 사상적, 학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던 서원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실서원은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된 후
유적, 유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정확한 위치나 건물규모 및 배치 등에 관한
기본적인 것마저 없어지고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진 상태로 방치되고 있다.
석실서원지 표석 ⓒ 김준호
이 방치된 석실서원을 고증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자료중의 하나가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중의 「석실서원도」이다.
「석실서원도」는 강 위에서 바라본 경치를 부감법(俯瞰法)으로 그린 것으로 석실서원 주변의 풍광이 묘사되어 있다.
겸재는 진경산수(眞景山水)의 대가로 사실적 기법을 사용하였으므로 이 그림을 정확히 분석하면 석실서원의 위치, 건물양식, 규모를 밝히는 데 크게 참고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경교명승첩>은
정선이 64세 때인 1740년 겨울부터 1741년 초여름까지 그린 그림들을 하나의 화첩에 묶은 것이다.
상하 두 책으로 전해왔으며 현재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정선이 한강을 따라 그 주변의 풍경을 그린 것으로
경기 지역을 대상으로 그린 것은 「녹운탄(綠雲灘)」, 「독백탄(獨栢灘)」, 「우천(牛川)」,
「석실서원(石室書院)」, 「삼주삼산각(三洲三山閣)」이 있다.
정선이 석실서원과 삼주삼산각을 그리게 된 것은 안동 김씨 일문과의 깊은 교분에서 연유한다.
그는 김창집의 도움으로 관로(官路)에 진출하였으며,
김수항의 여섯 아들인 ‘육창(六昌)’ 그 중에서도
특히 김창흡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창흡은 그 형인 김창협과 함께 진경문화의 배양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진경시문학의 이병연(李秉淵), 진경산수화의 정선(鄭敾), 인물풍속화의 조영석(趙榮?) 같은
대가들이 모두 김창흡 형제들에게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자신들의 기예(技藝)를 성숙시켜 나갔던 것이다.
석실서원은 이들의 근거지의 하나이자 진경문화의 산실이었던 셈이다.
「석실서원도」는 석실서원을 추정 복원할 경우 가장 구체적인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그림 왼쪽의 미호(渼湖)는 화제이다.
미호는 석실서원 및 삼주삼산각과 미사리 사이의 호수처럼 보이는 한강을 지칭하는 것으로
동호(東湖)와 서호(西湖)와 함께 도성 부근의 경승으로 유명하다.
석실서원에 추배된 김원행의 아호인 ‘미호’도 추측컨대 여기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한다.
「석실서원도」에 나타난 좌측의 건물들이 석실서원이다.
이를 분석해 볼 때 석실서원은 전형적인 서원 형식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쪽에는 사우(祠宇)가 보이고 서재(西齋) 건물과 누정(樓亭)의 모습이 확연하다.
「석실서원도」를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석실서원(겸재 정선)
중앙의 동산은 모장끝산으로 생각되며, 우측면에는 북두천이 흐르고 있다.
이 북두천은 원래 바위가 7개가 있어 칠성바위라고 호칭된 데서 붙여진 이름인데
현재는 홍유천이라고 불린다.
모장끝산의 능선 상단에 누정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 주변은 숲으로 둘러쌓여 있고 한강을 주망하기 좋은 장소이다.
전망이 대단히 아름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건물 규모는 정면이 2칸이고 측면은 불확실하지만 1칸 또는 1칸 반으로 추정된다.
건물 형태는 팔작지붕에 방 1칸과 누마루가 달린 복합누정이다.
서원의 별채로서 휴식공간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원의 중심건물들은 좌측면 토미재 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3채의 건물이 보이는데 숲으로 가려져서 정확한 건물 수는 알 수 없다.
가장 위쪽의 건물은 사우(祠宇)이다.
규모는 짐작하기 어려우나 지붕의 형태는 맞배 양식을 취하였음이 확인된다.
이 건물의 장축은 동서선상으로 되어 있다.
사우로 추정되는 건물과 직각에 놓여 있는 건물은 장축이 남북선상으로 되어 있으며 재실로 생각된다.
그림상으로는 서재(西齎)만이 확인 가능하나
숲에 가려진 부분에 동재(東齋)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재실은 팔작지붕 양식을 취하고 있다.
맨 아래 건물은 3칸으로 되어 있으며 벽이 없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어 누정으로 추측된다.
누정은 출입처로 사용되기도 하고 강당으로도 활용되나 이 경우 성격을 명확하게 규정할 수는 없다.
서원의 아래로는 10여호의 초가들이 그러져 있다.
이 건물들은 독립된 가호(家戶)라기 보다는 서원에 부속된 민가(民家)로 파악된다.
그것은 모든 가옥이 서원을 중심으로 설치된 장리(長籬) 속에 위치하고 있는 것에서도
추정이 가능하다. 서원 소속의 노비 또는 전호들의 거주지일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석실서원도」와 함께 서원의 규모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김원행의 문인 황윤석(黃胤錫)이 남긴 일기 『이재난고(?齋亂藁)』와 주민의 증언이다.
각종의 문헌 사료에서
사우(祠宇), 재실(齋室), 강당(講堂), 누정(樓亭) 건물과 연못, 영당(影堂)이 확인된다.
석실서원묘정비 ⓒ 김준호
위 자료 및 주민 제보와 석실서원도의 분석을 종합하여 보면
석실서원 경내와 주변에는 다수의 건물과 시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원은 사우(祠宇)와 재실(齋室), 강당(講堂). 누정(樓亭),
고직사(庫直舍)를 온전히 갖춘 전형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었으며,
전정(前庭)에는 연당(淵塘)이 배치되고 있다.
서원 부근에는 영당이 있어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
문강공(文康公) 김창흡(金昌翕)의 영정(影幀)을 모셨으며,
모장끝산에는 별도의 누정이 있어
별채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양주읍지』석실서원조의 기록를 보면
서원 소속의 원생(院生)이 20인이고 재직(齋直) 10인,
모군(募軍) 40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서원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주는 사료로 평가된다.
『양주읍지』의 간행시기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린 1868년(고종 5년) 이후인
1871년 이어서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였는지 의문이 있지만
인원에 비례하여 다수의 건물군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상정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자료분석에 의거한 석실서원의 배치구조, 건물양식,
건물구조의 추정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서원유지가 완전히 교란된 현 상활에서는 간접적인 자료들이
서원의 형태와 규모를 근사하게나마 추정할 수 있는 유력한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새롭게 평가되어야 한다고 사료된다.
석실서원은 현재 터만 남아 방치된 상태이다.
당시 사용되었던 주춧돌은 사방에 흩어져 있거나 정원석으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이 지역은 경관이 좋아 카페가 들어서는 등 석실서원의 원형을 찾을 수 없어 아쉬움이 있다.
빠른 시일 내에 석실서원을 복원하여 지역의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면 하는 바램이다.
- 윤종일 교수(서일대 민족문화과)
- '남양주 역사기행‘, 2006년 12월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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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누의 한강을 걷다] 석실서원
오늘 새벽은 온통 안개에 뒤덮여 산과 강의 경계조차 사라져 버렸다.
두물머리로 달려 가 흠씬 안개에 젖었다가 돌아온 두호(斗湖),
멀리 족자도가 아련한 정취를 뿜으며 강 속에 우뚝하고 겨우내 치색(淄色) 옷을 입고 있던
팔당댐 아래 검단산은 산 벚꽃으로 수놓은 새 옷을 갈아입는 중이다.
산 아래로 고요히 흐르는 강, 옛 사람들은 이곳을 두고 두미협(斗尾峽)이라고 했다.
강 양쪽으로 산이 우뚝하고 두물머리 일대의 넓은 물에 비해 갑자기 좁아진 탓에
협(峽)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안개가 걷히며 드러나는 봄 산과 봄 강의 정취를 만끽하며 팔당대교 언저리에 다다랐지만
걸음은 자꾸 주춤거렸다. 이제부터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강 곁으로 난 길은 모두 자동차를 위해 만든 것일 뿐
강을 따라 한갓지게 걷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강과 잇대어 만든 고수부지로 내려 설 수는 있지만 한번 내려서면 다시 올라오기도 힘들뿐더러
그 길에서 사람의 흔적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차라리 자동차를 타기로 했다. 평구역이 있던 삼패동을 지나 훌쩍 다다른 곳은 석실서원 터(址)였다.
석실서원은 선원(仙源) 김상용(1561~1637)과 청음(淸陰) 김상헌(1570~1652)을 배향한 서원이었다.
그들 형제와 가까웠던 상촌(象村) 신흠(1566~1628)이 그랬다.
“오동나무는 천년을 늙어도 가락을 머금고 있고, 매화는 평생 춥고 배고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고
말이다. 비록 이 글이 김상헌을 두고 한 말은 아니지만 그에게 꼭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강철 같았던 김상헌은 대쪽과도 같았던 신흠을 본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김상헌은 신흠의 문집인 ‘상촌집’의 서문에 마포 아래쪽의 서호(西湖)를 지나는 배 안에서
상촌을 처음 만난 것은 자기가 열다섯 살 되던 해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때 이미 상촌은 청음의 맏형인 선원과 두터운 친분을 쌓고 있었다고 하니
서로 다섯 살 터울인 그들의 우정은 각별한 것이었다. 신흠이 계축옥사로 강화도에 내려 가 감지와(坎止窩)를 짓고 은거할 때 지은 ‘야언’에
아름다운 글 한 줄이 있다.
“너무 화려한 꽃은 향기가 부족하고 향기가 진한 꽃은 색깔이 화려하지가 않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귀의 자태를 한껏 뽐내는 자들은 맑게 우러나오는 향기가 부족하고,
그윽한 향기를 마음껏 내뿜는 자들은 낙막(落莫)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군자는 차라리 백세에 향기를 전할지언정
한 시대의 아리따운 모습으로 남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라고 했으니
그의 됨됨이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그런 신흠처럼 김상용 또한 곧고 강직하기로는 아우인 김상헌에 결코 뒤질 것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 반듯함은 선비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정의와 정도를 걷는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불의를 용납하지 않고 사악한 구실을 마다하는 강한 비판정신의 결과이며
선비라면 마땅히 지녀야 할 도덕적 실천의 기본덕목이다.
당연히 김상용은 의리와 지조를 으뜸으로 삼았으며
청나라를 섬기는 것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택한 것 또한
그의 강직한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난 결과일 것이다.
그의 말과 행동은 언제나 서로 다르지 않았으니 비록 화려하게 돋보이는 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의 기품이 고고하기 짝이 없는 꽃이었지 싶다.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에 있는 청음 김상헌의 묘.
그가 삶에 대해 반드시 믿으며 지키고 섬겨야 할 것을
그의 문집인 ‘선원유고(仙源遺稿)’에 ‘좌우명’이라는 제목으로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달도 차면 기울고, 그릇도 가득 차면 엎어지고,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른 용은 후회가 있으며,
만족함을 알면 욕심이 없고, 권세는 믿을 것이 없으며, 욕심은 다할 수 없으니
하루 종일 경계하고 두려워하기를 깊은 연못에 임한 듯, 엷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하라.”
후에 영조는 그의 죽음을 두고 청나라로 붙잡혀 간 삼학사(三學士)는 그렇다 하지만
반드시 죽지 않아도 될 대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 의리는 장엄하고 크다고 했다.
또 “진정 어려운 것은 반드시 죽을 일이 아닌데도 스스로 죽는 것”이라고 말하며
그에게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지금 내가 한강의 미호(渼湖)를 내다보며 애석해 하는 석실서원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이곳은 김상용, 상헌 형제들의 대나무와도 같이 곧고 쇠꼬챙이와도 같이 강직한 성품이 빚어낸
숲이며 꽃밭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비록 쓸쓸한 모습으로 터만 남았을 뿐이지만
석실을 거쳐 간 많은 사람들의 흔적을 어찌 지울 수 있겠는가.
그 숲에서 갖가지 나무들이 자라고 또 얼마나 많은 꽃들이 피었던가. 석실의 숲이 그토록 울창할 수 있었던 것은 선원과 청음이 거름이 되었던 까닭이다.
그 거름으로 낙학(洛學)의 종장인 농암(農巖) 김창협, 삼연(三淵) 김창흡이 우뚝한 나무가 되었으며
또 그들의 문인이었던 기원(杞園) 어유봉, 성재(誠齋) 민이승, 지촌(芝村) 이희조, 송암(松巖) 이재형,
여호(黎湖) 박필주, 겸재(謙齋) 정선, 사천(사川) 이병연, 도암(陶庵) 이재와 같은 인물들은
석실서원의 울타리가 되었다.
그 밀밀(密密)한 숲에서 미호(渼湖) 김원행(1702~1772)이 꽃으로 피었던 셈이다.
그는 임인삼수옥으로 생부인 죽취(竹醉) 김제겸, 조부인 몽와(夢窩) 김창집
그리고 친형인 김성행(金省行)을 잃자 도성을 떠난 후로는
단 한발자국도 도성에 발을 들여 놓지 않은 인물이다.
그 일을 계기로 그는 석실서원에서 강학을 하며 후학들을 길렀으니 대곡(大谷) 김석문이나
‘이재난고(이齋亂稿)’를 쓴 이재(이齋) 황윤석, 북학(北學)을 빛낸 인물이었던 담헌(湛軒) 홍대용(1731~1783)과 같은 정통 주자학 계열에서 벗어난 인물들도 있었다.
그러니 석실서원은 처음에는 서인(西人) 계열의 서원으로,
노론과 소론이 갈릴 때는 노론계 서원으로, 그리고 노론 내에서 인물성(人物性) 논쟁으로
호론(湖論)과 낙론(洛論)이 갈릴 때에는 낙론의 중심축이었으며
조선 후기를 더욱 빛나게 만든 진경문화(眞景文化)의 꽃을 피우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앞서 말한 김석문이나 황윤석 그리고 홍대용에게로 이어지는 학문의 경향은
점점 정통 주자학과는 또 다른 것을 추구하고 있었으니
갖은 나무들과 꽃들이 어울려야 큰 숲이 되듯이 석실의 품은 아주 넉넉하고 자유분방하여
이윽고 아름드리나무들이 자라고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큰 숲이 되었던 것이리라. 그처럼 넓고 깊은 석실의 숲에서 홍대용은 별을 보기 시작했을 것이다.
비록 그가 만든 천문대였던 농수각(籠水閣)은 고향집 마당에 있었지만
그의 별은 석실을 드나들 때 이미 마음속에 총총하게 떠 있지 않았겠는가.
하염없이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던 그는
이윽고 땅은 둥글고 그 어마어마한 덩치가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지전설(地轉說)이다. 그의 친구인 연암(燕巖) 박지원 또한 그의 생각에 맞장구를 쳤다.
비록 그보다 훨씬 이전에 서포(西浦) 김만중이나 김석문이 먼저 그 이야기를 꺼냈으며
성호(星湖) 이익은 그럴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홍대용은 반드시 그렇다고 했던 것이다.
조선초의 문신 조말생(趙末生)의 묘비. 석실서원 터 앞에 있다.
그것은 그저 격물학(格物學)일 뿐인 것 같지만 주자학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때에 뜬금없는 이론(異論)이었을 수 있다.
격물학은 지금의 과학이다.
자연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학문의 관점이 달라졌다는 것은 사물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한번 달라진 생각은 그것을 조리 있게 설명해 낼 수 있는 철학을 요구하게 되고 그에 의해 만들어진 철학은 시대의 흐름을 주도하는 시대정신이 되었으리라. 홍대용이나 박지원 그리고 초정(楚亭) 박제가로 이어지는 북학은 조선성리학에 대한 긴밀한 반성을 바탕으로 자연관, 인간관, 세계관 등에 걸친 철학적 입장의 변화를 가지는 것과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대뜸 과거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뿌리 깊은 성리학적 입장과의 변별점을 명확하게 가지기 위해서 오히려 과거와의 더부살이는 필연적이었으니까 말이다.
홍대용은 그런 점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공부는 기존의 학문에 바탕을 두었지만 그로부터 비로소 격물학 즉 자연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지식적인 체계가 바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후 담옹(澹翁) 서명응은 선천도(先天圖)로 천체의 운행원리를 설명할 수 있었고, 혜강(惠剛) 최한기는 기륜설(氣輪說)로 중력을 이야기할 수 있었으니 홍대용에게서부터 자연과학의 물꼬가 트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만 일어섰다.
그토록 아름다웠다는 미호에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공사가 한창이고
조선후기의 사상을 주도했던 서원 터에는 보랏빛 제비꽃만이 한 가득일 뿐
그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으니 쓸쓸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덕소 시내를 지나 선원과 청음의 묘를 찾았다.
하얀 배꽃이 지천으로 피어난 길을 에돌아 다다른 묘소,
양지 바른 곳에 자리한 봉분 위에 피어난 할미꽃과 노란 양지꽃이
봄바람을 견디는 모습이 아름답기만 했다. 그러나 반드시 부드러운 것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리라.
오히려 강철 같은 단단함 또한 진한 향기를 품은 아름다운 꽃을 피웠으니
그들이 곧 선원과 청음이리라.
강물은 아름다운 미호에 고였다가 흐르면서
겨울이면 사방 벽에 서리가 한자가 넘도록 맺히는 심양의 감옥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던 청음과
청에 굴복하느니 차라리 자결을 택한 선원을 남겨 놓았으니
그들은 쇠꼬챙이 끝에 피어난 꽃이지 싶은 것이다.
- 이지누의 [한강을 걷다. 38] 석실서원.
- 경향, 2007년 04월 27일
현재의 석실서원 추정지
겸재 정선의 ‘삼주삼산각’
김창협(金昌協)의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농암(農岩) 또는 삼주(三洲)이며,
증조는 좌의정을 지낸 청풍 김상헌( 淸陰 金尙憲),
아버지는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형 역시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金昌集)이다 .선생이 청풍(淸風)부사로 있을 때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아버지(金壽恒)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영평(永平)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노론이 재집권하자 모든 이의 신원이 복관되고
선생도 대제학, 판서 등에 중용되었으나 사양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
선생은 본디 농암(農岩)에서 여생을 마치려 하였으나
당시 모친께서 서울에 계셨기 때문에 문안드리고 찾아뵙기에 편리하도록
47세 되던 1697년 8월 미음(渼陰) 석실서원(石室書院)에 거처를 정하여 머물렀다. 석실서원은 주변 경관이 깨끗하고 탁트인 경관이 아름답기 때문에
한가로이 사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늘 학문에 진력할 수 있어 마침내 이곳에 거처를 정하였다.
몇 칸짜리 사랑채를 지어 ‘삼산각(三山閣)’이라 편액하여 걸고 학문하는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삼산각 앞에 모래톱이 세 개가 있기 때문에 그곳을 삼주(三洲)라 이름한 것이다.
농암은 이조참판으로 있던 4월 석실서원에
부친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 장인 정관재 이단상(靜觀齋 李 端相), 노봉 민정중( 老峰 閔鼎重)을
추배향(追配享)해 놓고 석실서원을 명실상부한 진경문화의 중심지로 확고히 다져 놓았다.(최완수)
이때 석실서원에서 배출된 인물은
진경산수화의 대가(大家) 겸재 정선(鄭敾), 진경시(眞景詩)의 대가 사천 이병연(?川 李秉淵),
인물풍속화의 대가 관아재 조영석(觀我齋 趙榮?) 등이다.
특히 조영석은 농암의 처남인 지촌 이희조(芝村 李喜朝)의 제자이며 조카사위로서
자연스럽게 석실서원과 삼산각(三山閣)을 출입하면서
진경문화를 터득하였으리라 미루어 집작된다 .
그 결과물이 겸재 정선이 그린 ‘삼주삼산각’인데 <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에 실려있다 .
농암은 그의 죽음을 예견한 듯 1707년 가을부터
도봉서원(道峰書院), 수락산 옥류동 , 묘적사(妙寂寺) 등 석실서원 주변을 유람하였다.
다음해 무자년 윤3월에는 영의정에서 파직되어 남양주 금촌(金村; 지금의 삼패리)에 물러나 있는
형님인 몽와 김창집(夢窩 金昌集)을 모시고
아우 노가재 김창업(老稼齋 金昌業), 포음 김창즙(圃陰 金昌緝)이 모여
삼산각(三山閣) 앞 미호(渼湖)에서 관어회(觀魚會)를 가졌다.
여섯 창(昌) 가운데 네 창이 함께 자리하는 흔치않은 정경이다.
그리고 형님 몽와공(夢窩公)을 뫼시고 묘적사(妙寂寺)를 유람하니
이 여행이 살아서 마지막으로 윤 4월 11일 삼산각 정침(正寢)에서 5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우리 남양주 뿐만 아니라 나라의 큰 별이 진 것이다.
문화혁명을 주창하여 진경문화를 일으킨 농암 김창협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진경문화제'를 거행하는 것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몫이 아닐까? - 남양주 역사기행, 2008-03-18
- 임병규(한국탁본보존회장, 다산문화연구소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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