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중심인 한강
우리나라의 지형은 동고서저(東高西低)이고 강 대부분은 동북에서 서해로 흘러듭니다. 따라서 한반도 중심에 자리한 한강은 그 물줄기를 따라 넓고 비옥한 농경지가 형성되었으며 이어지는 서해는 북쪽으로 대륙을 거치지 않고도 중국과 바닷길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 지정학적 가치는 매우 크다고 하겠습니다. 삼국시대 한강을 확보한 국가가 그 시대 가장 강력한 국가로 되었음은 이와 같은 토대가 마련되었기 때문입니다. 백제는 온조가 한강유역인 위래성(지금의 서울)에 도읍을 함으로써 이 지역에 최초로 진출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삼국의 각축전
먼저 이 지역을 확보하고자 고구려와 백제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4세기 중반 백제의 근초고왕(346~ 375)은 한강을 확보하고 전라남도 해안 일대의 마한 잔여세력까지 완전히 복속시키고 북쪽으로 대방고지(帶方故地: 황해도 지역)를 놓고 고구려와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둘러싸고 두 나라는 치열한 패권 다툼을 벌였습니다. 초기의 전쟁양상은 백제 쪽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371년(근초고왕 26)에는 백제군이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331~ 371)을 전사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소수림왕(371~ 384)과 고국양왕(384~ 391) 대를 거치면서 체제를 재정비하고 광개토대왕(391~413) 때에 이르러 백제에 대한 설욕전이 성공하자 상황은 역전되었습니다. 백제는 아신왕(392~405) 때에 한수(漢水) 이북의 58성(城) 700여 촌(村)을 빼앗기는 치명적 손실을 보기도 했습니다. 이에 백제 아신왕은 세력 만회를 위해 바다 건너 왜국과의 연결을 도모하기도 했습니다.
더욱이나 고구려는 장수왕(413~491)대에 이르러 요서지역으로의 진출이 현실적으로 차단당하면서 본격적인 남진정책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427년(장수왕 15) 평양천도는 남방경영의 의지를 분명히 밝힌 것으로, 이는 기존의 국제관계를 전환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강유역을 확보한 고구려는 한때 아산만과 영덕을 잇는 선까지 밀고 내려갔으며, 신라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나제동맹(羅濟同盟)
백제는 새로운 상황의 효과적 대처를 위해 왜국뿐만 아니라 신라도 동맹자로 삼을 필요가 있었고, 광개토대왕 이후 고구려에 군사적으로 종속되어 있던 신라 역시 눌지마립간 대에 이르러 고구려 세력권에서 벗어나려고 하여, 양자의 이해가 합쳐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433년 백제의 비유왕(427~455)과 신라의 눌지왕(417~458) 사이에 공수동맹(共守同盟)이 맺어졌습니다. 475년을 전후해 고구려의 공격이 확대·강화되자 백제와 신라는 상호 원군의 파견을 통해 이에 효과적으로 대처했습니다. 493년 백제의 동성왕(479~501)이 신라의 왕녀를 맞아 혼인하는 등 양국 간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졌습니다. 551년 백제 성왕(523~554)의 주도로 백제·신라·가야의 3국 연합군이 고구려로부터 한강유역을 탈환할 때까지 유지되어왔던 양국의 동맹관계는 553년 신라가 백제의 점령지인 한강 하류지역을 공격, 빼앗음으로써 깨졌습니다.
나제동맹의 파기와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신라 진흥왕(540~576)은 한강유역에서 백제군을 몰아내고 이 지역을 점령하였습니다.
격분한 백제는 신라를 공격했지만, 554년 성왕이 관산성전투(管山城戰鬪)에서 전사함으로써 백제의 패배로 끝나고, 신라와 백제는 다시 적대관계로 돌아섰습니다. 신라의 한강유역 확보는 인적·물적 자원의 확보와 해상을 통한 대중국 직교역로가 열리게 됨으로써 이는 신라의 삼국통일 발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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