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왕 광개토대왕
지금도 우리는 광개토대왕의 이름과 함께 고구려의 영광, 드넓은 만주 벌판을 달리던 민족의 기상을 이야기 한다.
18세의 청년 왕으로 즉위한 광개토대왕은 백성들의 사림을 챙기는 국왕이었을 뿐만 아니라 용맹함과 뛰어난 용병술을 갖춘 장수로서 이름을 떨쳤다. 직접 수만 명의 철갑 기병과 보병을 이끌고 전쟁터를 누빌 때면 적군은 그야말로 그 이름만 듣고도 사기가 떨어졌다.
서쪽으로부터 시계 방향으로 후연, 거란, 북부여, 동부여, 숙신, 신라, 가야, 백제에 이르기까지, 사방 모든 나라와의 크고 작은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광개토대왕은 고구려를 확고한 동북아시아 최강국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장군총
요동 지방을 포함한 만주의 대부분이 고구려 땅이 되었다. 특히 요동 지방은 중국과의 대결에서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유명한 철 산지를 포함하고 있다. 남으로는 백제를 쳐서 한강 이북을 확보하였다.
그런데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우리의 시선을 끄는 표현이 있다. 신라는 담담하게 신라라고 적으면서도 백제는 굳이 ‘백잔’으로 적어 멸시의 감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동북아시아의 강국 고구려가 백제를 이렇게 날카로운 대결 의식을 갖고 대하였던 것을 상기하면서 우리는 백제 또한 강성한 국가였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광개토대왕비
*400년 전후의 국제 관계
광개토대왕 시기 고구려의 팽창은 한반도에 새로운 전운을 몰고 왔다. 고구려의 세력이 뻗어 오자 가장 긴장한 나라는 백제였다. 백제는 고구려와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과의 외교를 더욱 강화함과 아울러, 가야 및 왜와 보다 긴밀한 관계를 맺어 나갔다.
당시 가야는 백제를 통해 중국과 교역하면서 선진 문물을 흡수할 필요가 있었으며, 왜는 가야가 변한의 소국이었을 때부터 가야로부터 철을 비롯한 선진문물을 수입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백제-가야-왜 세력과 고구려-신라 세력이 대치하게 되었다. 특히 신라는 가야와 국력을 다투고 있던 상황에서 가야와 백제, 왜가 연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신라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사절을 파견해 왜를 설득하고자 하였으나 왜는 오히려 그들을 볼모로 삼고 신라를 침략하였다. 이에 신라의 내물왕은 고구려에 원군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광개토대왕은 신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5만의 대군을 이끌고 신라 국경을 넘었다.(400년) 그리고는 신라를 침략한 왜군을 물리친 후 기세를 몰아 가야를 총공격하였다.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신라의 경쟁 상대인 가야에 큰 타격을 줌으로써 백제를 견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가야의 충격은 컸다. 특히 가야 연맹의 주도자로서 전쟁을 이끌었던 김해의 금관가야는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다. 연맹의 주도권은 고령의 대가야로 넘어갔으나, 그 뒤로도 예전의 국력을 회복하지는 못하였다. 이로써 가야는 강력한 고대 국가로 성장하여 삼국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기회를 잃고 말았다.
이후 신라에는 고구려의 군대가 주둔하게 됨으로써 외국 군대의 힘을 빌린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광개토대왕은 3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으나, 이제 5세기는 고구려의 것이었다. 당시 중국은 ‘위진 남북조’로 불리는 대분열의 시기였다. 광개토대왕을 이은 장수왕 시절 고구려의 국력은 더욱 강화되어 그 뒤로도 100년 동안 고구려의 대영광을 범할 자는 아무도 없는 듯 보였다.
*고구려는 세계의 중심
장수왕 때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의 새해 축하 연회에 고구려 사신이 파견되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남중국을 통일하였던 제 나라가 항의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왜 고구려와 자신들을 같은 서열로 취급하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북위 측의 답변은 고구려가 강성하여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북위는 백제로 보낸 사신이 고구려의 방해로 되돌아오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중원고구려비
5세기 고구려는 자타가 공인하는 동북아시아의 최강국으로서, 고구려인들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이라 자부했다.
장수왕은 중국이 남북조로 안정되자, 이들의 대립을 능숙하게 이용하는 수준 높은 외교를 펼치는 가운데, 도읍을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겨 남하 정책을 폈다. 백제의 도읍지인 한성을 차지하였으며, 남한강의 물줄기를 타고 중부 이남의 내륙 지방까지 깊숙이 침투함으로써 신라를 압박하였다.
강력한 고구려의 남하라는 공동의 위협에 대응하여 백제와 신라는 자연스럽게 손을 잡게 되었다. 이것이 나제동맹이다. 신라도 이제 고구려의 군사 지원에만 의존하던 어리숙한 옛 신라가 아니었다.

*연가7년명금동보살입상

*청룡

*백호

*주작

*현무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전국역사교사모임, hummanist
출처 : 山寺愛人
글쓴이 : 山寺愛人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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