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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라의 비약적인 발전

추읍산 2009. 10. 22. 19:54

신라의 발전

500년에 즉위한 신라의 지증왕, 그에 관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성기가 1자 5촌이나 되어 배필을 구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랬을까?

지증왕은 순장을 금하고 소를 농사에 적극 이용하도록 한 왕이다. 그래서 그는 신라 농민들에게는 풍요로운 생산력을 상징하는 인물이었고, 더욱 풍요롭고 안정된 생활을 기대하는 신라 농민들의 절실한 마음이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때 중국식 ‘왕’이라는 호칭이 처음 사용되었으며, 국호가 ‘신라’로 확정되었다. 새로워진 신라의 모습을 안팎에 널리 알리고자 함이었다.

지증왕을 이은 법흥왕은 새로운 정치 제도를 만들어 국력을 더욱 강화해 갔다. 병부를 두고 군사력을 길렀으며, 귀족 회의를 제도화해 나라의 힘을 하나로 모았다. 그리고 불교를 공인하여 국민들의 정신적인 통일을 도모하였다.

정비된 국력은 밖으로도 뻗어 나갔다. 지증왕 때는 경상도 북부와 낙동강 유역으로 영토를 넓혀 나갔다. 장군 이사부가 꾀를 내어 나무로 만든 사자로 우산국(울릉도)을 정복하였던 것도 이때이다.

법흥왕은 가야를 지속적으로 압박하여 금관가야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김해 지역으로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차돈 순교비


신라의 국력은 이처럼 지증왕, 법흥왕 때에 차곡차곡 정비되어 진흥왕의 빛나는 시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신라 토우


 
*한강을 얻은 자 누구인가?
6세기 경제력을 바탕으로 국력을 크게 정비한 백제와 신라.

*단양 적성비 - 신라의 한강 상류 진출


남녘의 너른 들판에는 농민들이 애써 농토를 일구는 가운데 평화의 기운이 넘치는 듯 하였으나, 군사적 요지에는 다투어 견고한 성곽이 지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성왕은 한강 유역을 회복한다는 야심에 찬 계획을 세우고 동맹군인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쳐서 그리던 옛 땅을 되찾았다. 그러나 벅찬 감격도 잠시, 진흥왕의 기습 공격을 받아 한강 유역을 다시 잃고 말았다.(553)

성왕은 국가의 명운을 걸고 재탈환을 위해 싸웠으나 수많은 병사들과 함께 관산성(충북 옥천)에서 전사하였다. 백제 중흥의 꿈이 좌절되고, 신라의 눈부신 발전이 보장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신라가 한강 유역의 새 주인이 되었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진흥왕, 내가 간다.
진흥왕, 그는 고구려와 백제를 밀어 제치고 한강 유역을 쟁취함으로써 신라가 다른 두 나라를 통합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들어 냈다. 이제 신라는 더 이상 한반도 동남부 변두리의 작은 후진국이 아니었다.

신라의 위상은 높아졌고, 황해로 뚫린 길을 통해 중국과의 외교 및 교역을 활발히 펼칠 수도 있게 되었다.
 

*신라의 발전

실로 진흥왕 때 신라의 영토는 북으로는 원산만 일대, 즉 옛 동예 지역까지 올라갔으며, 남으로는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함으로써 가야의 모든 세력을 평정하였다.(562년) 그는 개척한 영토 곳곳에 순수비를 세워 이를 기념하였는데, 스스로를 ‘진흥태왕’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신라 국력에 대한 자신감을 나타내었다.
 

*마운령비


*창녕 진흥왕 순수비


*황초령비


 
진흥왕 대에 신라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이로써 고구려, 백제, 신라의 다툼은 막바지를 향해 치닫게 되었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전국역사교사모임, hummanist
출처 : 山寺愛人
글쓴이 : 山寺愛人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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