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렸을 적 아버지로부터 병자호란(1636~1637년)의 국란에서 청에 인질로 잡혀가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께서 오랜 인질 끝에 1645년 귀국하여 부왕인 인조대왕을 접견하는 자리에서의 전해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습니다.
옮기면 인조는 두 왕자를 접견하는 자리에서 그동안의 경과를 들었습니다.
두 왕자는 귀국하기 전, 청 황제에게 인사를 드렸는데 그때 소원 하나씩 말하라는 권유를 받았답니다. 이에 소현세자는 황실의 벼루를 원했고 봉림대군은 끌려온 우리 백성과 함께 돌아가기를 청했다고 했답니다. 위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 인조는 세자가 가지고 온 벼루로 세자를 향해 내려치니 ~~ 이 야사를 들은 지도 50년이 지났습니다. 물론 부친께서 말씀하신 것은 구전되어온 이야기를 전달한 것일 뿐으로 저는 소현세자는 다음 대의 국왕 모습으로 적합지 않은 분이다. 막연히 그렇게만 생각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제가 컴퓨터를 배우고 글을 쓰면서 이는 소현세자를 바로 바라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터무니없는 야사는 보태지고 변질한 것으로 어떻게 이런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일까? 정사가 이긴 자의 기록이라고 하면서 야사를 옹호하는 분들이 늘어나는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역사 속의 진실은 무엇일까?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소현세자가 붕어하신지도 366년이 흘렀습니다. 병자호란의 국란에서 멀리 청나라에 세자와 세자빈 강씨, 봉림대군 부부, 주전파 대신들, 수많은 우리 백성은 청나라 수도 심양 등으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고단함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입니다. 전쟁은 비참함을 부릅니다. 더구나 패배로 이어졌을 때 그 모습은 오죽하겠습니까? 청에 끌려가신 소현세자와 강빈은 우리 백성 보호에 온 힘을 다했고 세자는 명나라가 청에 접수되는 서역원정(西域遠征)에 출전하기도 했습니다.
북경을 점령한 청은 이후 중국의 대표가 됩니다. 일개 여진족에 불과한 청이 중국을 통치하게 된 것입니다. 세자는 1644년 베이징에 70여 일을 머물면서, 예수회 선교사를 만났고 그리스도교(가톨릭)와 서양이라는 더 큰 세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필자는 2006년 중국 북경에서 소현세자가 그곳에 머무를 적 이전부터 있었던 왕푸징 거리의 동당(東堂, 성당)의 야경(夜景)을 본 적이 있습니다.
청 지도부와 함께한 소현세자는 일찍부터 있었던 그곳 네 곳의 성당 중 한 곳인 남당(南堂)에서 독일인 신부 아담 샬(Adam Schall) 을 자주 만났고 깊은 우정을 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견문을 넓힌 세자는 어떻게 하는 것이 국리민복인가를 깊이 생각하시고 웅대한 꿈을 안고 1645년 2월에 귀국하지만 두 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습니다. 넓게 바라보고 세계를 향해 웅비하려는 조선의 날개도 함께 접힌 것입니다
소현세자의 불행은 이에서 끝나지 않고 이어 가족으로 이어집니다. 강빈은 사약을 받았고 어린 세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큰아들 석철과 둘째 석린은 풍토병으로 죽습니다. 그리고 대통은 봉림대군(17대 효종)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세자 유고시에는 장세손(長世孫)에게 이어져야 하는 법도에도 어긋납니다.
이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인조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소현세자! 아 당신이 대통을 이어받으셨다면 지금의 우리나라는 분단의 아픔도 없고 세계 앞에 우뚝 서지 않았을까? 생각하여 몹시 아쉽습니다. 이 모두가 흘러가는 역사 속에 뭍 쳐버렸습니다. 소현세자와 그 가족의 슬픔은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추적함은 두고두고 교훈으로 삼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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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글은 소현세자를 소개한 위키백과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소현세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소현세자(昭顯世子) | |
배우자 |
민회빈 강씨 |
자녀 |
경숙군주, 경녕군주, 경선군(석철), 경순군주, 경완군(석린), 경안군(석견) |
부모 |
인조 / 인렬왕후 |
친척 |
장인 강석기 |
출생 |
1612년 음력 1월 4일한양 |
사망 |
1645년 4월 26일 (33세)한양 창경궁 환경전불명 또는 독살 |
능묘 |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의 소경원 |
국적 |
조선 |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년 음력 1월 4일 ~ 1645년 4월 26일)는 인조와 인렬왕후 한씨의 적장자이다. 이름은 왕(������)이고, 효종(봉림대군)의 동모형이다. 빈은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이다.
목차
• 1 생애
• 2 유적지
• 3 야사
• 4 가족관계
생애
1623년 인조반정으로 아버지 인조가 왕이 되자 1625년(인조 3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전주로 피신하였으며, 그해 말에는 강석기의 딸과 혼인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해 들어갔으나 이듬해 정월 동생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비롯한 비빈종실(妃嬪宗室)들이 피난가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자 인조가 삼전도(지금의 송파)에 설치한 수항단(受降壇)에서 청 태종에게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항례(降禮)를 드리며 항복하자, 자진해서 부인 강씨와 봉림대군 부부, 그리고 주전파 대신들과 함께 볼모로 청나라 수도 선양(盛京)으로 가서 심양관에 억류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청나라와 조선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청나라가 조선에게 많이 핍박하지 못하도록 노력하였다. 함께 끌려와 재판을 받은 반청파 김상헌 등과 조선 백성 보호에 많은 힘을 썼다. 몽골어를 배우고 서역원정(西域遠征)에 출전하기도 했다.
1644년 음력 9월 명나라 정벌을 위해 나선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을 따라 베이징에 70여 일을 머물면서, 독일인 신부 아담 샬(Adam Schall) 등의 예수회 선교사와 친하게 지냈으며, 그들을 통해 로마 가톨릭과 서양 문물을 접하였다.
삼전도에서 치욕을 당한 인조와 조정 대신들(주전파)은 세자의 친청(親淸) 행위에 크게 비난하였고, 1645년 음력 2월에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아버지 인조는 가톨릭과 서양 과학을 들여와 조선을 발전시키고자 한 세자를 감시하고 박대했다.
1645년 음력 2월 귀국한 소현세자는 음력 4월 26일 갑자기 숨을 거두는데, 일부 역사학자들은 세자가 죽고 난 뒤, 곳곳에 검은 반점이 나고, 시신이 빨리 부패했다는 점에 인조와 인조의 총애를 받던 소용 조씨(昭容趙氏 : 조귀인)가 의원 이형익을 시켜 그를 독살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1645년 음력 6월 27일 《인조실록》에는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다가 사람들에게 말한 내용이 실려 있다.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했다. (인조실록 인조 46권, 23년, 소현세자의 졸곡제를 행하다)
1645년 음력 6월 그의 동생 봉림대군이 귀환하자 본인의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세자에 책봉시켰다. 그해 음력 8월 강빈의 동생 강문성이 장사 날짜가 불길하다고 지관인 최남을 찾아가 항의하였는데, 인조가 이 말을 듣고 노해서 강문성과 문명, 문두, 문벽 4형제를 먼 고을에 유배시켰다.[1]
1646년 세자빈 강씨의 궁녀 계향과 계환이 인조의 수라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로 옥에서 죽게 된다.[2] 이 혐의로 강씨는 별궁에 유치된다. 독살하려고 했다는 김자점의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세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 당시에 첫째 석철은 12살이었고, 둘째 석린은 8살이었으며, 셋째 석견은 4살이었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는 석철을 아깝게 여겨 데려다가 기르겠다고 했지만, 석철은 결국 1648년 음력 9월 18일 제주도에서 장독으로 죽었고,[3] 둘째 석린은 같은해 음력 12월 23일 병으로 사망했다.[4] 셋째 경안군은 효종의 즉위 후 복위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강빈의 친정 노모와 4형제 또한 죽음을 피하지 못하였다.
유적지
그러나 세자의 죽음 이후, 인조는 세자의 장례를 크게 간소화했고, 무덤 역시 ‘원’(園)으로 부르지 않고 묘로 명명하였으며, 인조는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소현세자의 무덤에 방문한 적이 없다. 능원은 원래 소현묘라 불렸으나 고종때 소경원(昭慶園)으로 격상되었으며,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야사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서 돌아오기 전 청의 황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나씩 주었는데, 소현세자는 황제의 벼루인 용연(龍硯)을 청했고, 봉림대군은 볼모로 잡혀온 백성들과 함께 갈 수 있기를 원했다. 돌아와서 인조를 만난 두 아들은 자신들이 받은 선물에 대해 답하자, 인조가 노하여 소현세자가 받아온 벼루를 그에게 집어던지며 용연석이라 외쳤는데, 이 말이 ‘요년석’ 또는 ‘요녀석’이라는 단어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5] 하지만 이는 근거가 전혀 없는 야사이며, 이 내용이 와전되어 소현세자가 인조가 던진 벼루에 맞아 즉사 했다는 내용을 사실로 믿고 학생들에게 가르친 교사들도 많았다. 이런 야사는 살해당한 소현세자를 낮추고 왕이 된 봉림대군의 인품을 과대하게 부풀리기 위해서 꾸며낸 얘기일 가능성이 지대하다. 실제로 인조실록에 야사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으며 후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내용들 중 그럴듯한 내용들이 야사가 된다.
가족관계
• 부 : 인조(仁祖)
• 모 : 인열왕후(仁烈王后) -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한준겸(韓浚謙)의 딸
• 빈 : 민회빈(愍懷嬪) - 우의정(右議政) 강석기(姜碩期)의 딸
• 자녀 :
• 경선군 백(慶善君 栢)
• 경완군 석린(慶完君 石磷)
• 경안군 회(慶安君 檜)
• 경숙군주(慶淑郡主) - 증 능창부위(贈綾昌副尉) 구봉장(具鳳章)
• 경녕군주(慶寧郡主) - 행금창부위(行錦昌副尉) 박태정(朴泰定)
• 경순군주(慶順郡主) - 황창부위(黃昌副尉) 변광보(邊光輔)
• 장인 : 강석기
• 처남 : 강문성(신흠의 사위), 강문두(신흠의 손녀사위, 신흠의 아들인 신익성과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의 사위이다)
출처: :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73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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