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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북한산 순수비 첫 구명자는 유본학(柳本學)

추읍산 2011. 3. 3. 11:58

북한산 순수비 첫 구명자는 유본학(柳本學)

최영성 교수 "추사 아니다" 학술대회서 발표

 

북한산 비봉 진흥왕순수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이룩한 조선 금석학 성과를 논할 때 언제나 최대 업적으로 꼽히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첫 구명이라는 타이틀이 박탈될 위기에 몰렸다.

북한산 비봉 꼭대기에 선 고비(古碑)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먼저 밝혀낸 주인공이 추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는 주장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한국전통문화학교 최영성 교수는 최근 추사연구회가 주최한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추사 금석학의 재조명 : 사적(史的) 고증(考證) 문제를 주안목(主眼目)으로'라는 글을 통해 무학대사비로 알려졌던 북한산 비봉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낸 인물은 추사가 아니라 유본학(柳本學.1770-?)이라고 주장했다.

유본학은 조선 금석학의 초석을 놓았다고 최근 평가되기 시작한 유득공(柳得恭.1749-1807)의 맏아들로 자(字)를 경교(景敎)라 했으며, 시에 뛰어나 자하(紫霞), 신위(申緯)와 교류가 많았으며, 금석학과 서화에도 정통했다. 그의 문집으로는 현재 문암문고(問菴文藁)와 문암집(問菴集)이 전한다.

최 교수는 추사에 앞서 이미 유본학이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냈다는 증거로 서유구(1764-1845)의 증언을 들었다.

서유구는 방대한 저술인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중 권 제5 이운지(怡雲志)에서 '예완감상'(藝翫鑑賞)이란 표제 아래 문암록(問菴錄)을 인용하면서 "비봉(碑峯)은 도성 창의문(彰義門) 바깥에 있으니 그곳에 신라진흥왕 북순비(新羅眞興王北巡碑)가 있다. 글자는 모두 마멸되고 겨우 10여 글자만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다"고 했다.

여기서 북한산 순수비를 먼저 구명한 주인공이 유본학인지 추사인지가 문제가 된다.

추사 자신이 남긴 글에 의하면 추사는 순조 16년(1816) 7월에 비봉을 "여러 차례 탁본을 해서…마침내 이를 진흥왕의 고비(古碑)로 단정하고 보니 1천200년이 지난 고적(古蹟)이 하루아침에 크게 밝혀져서 무학비라고 하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 밝혀져 격파)되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최 교수는 다른 연구자의 유득공에 대한 연구성과를 인용하면서 추사는 유본학과 매우 가깝게 교유하면서 1812-13년에 그의 시문집을 3차례나 열독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나아가 유본학을 통해 추사가 유득공의 금석학 연구성과를 계승했다는 사실 또한 최근의 다른 연구에서 밝혀졌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북한산비는 추사가 처음 '발견'한 것이 아니고 이미 알려진 비의 내용을 '심정'(審定.확정)한 것"이었으며 "추사가 비봉을 유력(遊歷)한 것은 사전에 습득한 예비적 지식을 확인하고자 한 차원으로서 다분히 '의도적'이었던 것"이라고 최 교수는 말했다.

최 교수는 "추사가 우리나라 금석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실로 부동의 것"이라면서 다만 그가 금석학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선배학자들이 이루어 놓은 성과가 일정하게 기반이 되었음에도 그들에게 물려받은 성과라든지 영향은 거의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홍양호나 유득공, 유본학을 비롯해 추사 이전 학자들이 이룩한 연구성과가 무시되게끔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2007.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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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본학(柳本學)

 

조선 후기의 문인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백교(伯敎), 호는 문암(問菴).

유득공의 맏아들로 아우 본예(本藝)와 더불어 당시 예원(藝苑)에서 이름이 높았다. 18세기 후반에 태어나 정조·순조 때 활약한 것으로 추정된다.

 

저서로 1812(순조 12)~13년의 시작품 157편을 모아 엮은 1책의 〈문암집〉이 있고, 〈문암문고〉가 고본(藁本)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문암문고〉에는 〈오원전〉·〈김풍헌전〉·〈김광택전〉·〈이정해전〉·〈김시적전〉·〈박열부전〉 등 6편의 전이 실려 있다.

 

이중에서 〈오원전〉은 고양이를 의인화한 가전(假傳)이다. 도적을 잘 살핀다는 것 때문에 등용되어 임금의 총애를 받던 오원이 점차 교만·포악해지면서 급기야 버림받고 도적으로 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전(史傳)의 형식을 갖춘 논찬 부분에서 작가는 사람에게는 시종(始終)이 있기 어려운 법이라고 전제한 뒤, 하찮은 과실이 큰 공을 덮지 못한 점을 진지하게 지적했다.

나머지 전은 기인(奇人)이나 일사(逸士)의 행적을 기록한 탁전(托傳)이다.

 

〈김풍헌전〉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의원 김풍헌이 불치의 병을 고치고 신선이 되어 종적을 감춘 이야기를 적고 있으며,

〈김광택전〉은 신검술을 익혀 나라에 기여하려 했으나 인정받지 못하고 묻혀 지내야 했던 김체건·김광택 부자의 불우한 삶을 그리고 있다.

 

기이한 재주나 신통한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사회적 통념과 신분적 제약 때문에 좌절해야 했던 중인 이하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사회적 모순을 비판하고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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