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황산과 그 문우들

황산 김유근(黃山 金逌根 1785~1840)의 大作

추읍산 2011. 2. 7. 23:00

 

황산 김유근(黃山 金逌根 1785~1840)의 大作

 

필자는 작년 6월, 천호동에 계시는 김영한 아저씨로부터 반가운 전화를 받았다. 대전에 거주하시고 많은 유묵을 소지하고 계시는 같은 이름의 문중 어른이신 김영한 씨 댁을 방문하시고 보관하고 있는, 황산 김유근의 대작(大作)을 실물 크기로 복사하여 오셨는데 필자에게도 1부 주셨다. 크기는 42 × 370으로 창호지 3장 분량이다. 인쇄소에 부탁하여 복사하셨다는데, 필자는 한문 실력이 미천하여 한문학의 대가이신 청계 조면희(淸溪 趙冕熙) 선생님께 부탁하였고 원문과 해제(사진 아래의 글)를 받아보았다. 윗분들께 거듭 감사드리며 원본은 1장으로 복사가 안 되어 3장으로 엮은 것이다.

 

첫 번째의 글

 

두 번째의 글

 

세 번째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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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과 해제

 

穰侯老/擅關中/事常恐/山東客/子來余/亦暮年/專一壑/每逢車/馬便驚/猜此乃/王荊公/詩也雖/似一時/戱語其/平日不/容馬呂/諸公輩/則已根/於天性/亦可見/也./謀國謀/家無二/致開門/客許四/方來千/金一字/眞癡骨/勤功惟/君莫漫/猜/  黃山


*해설 : ‘秦나라 양후는 늙어서 관중을 손아귀에 넣고 다스면서도 늘 산동지방에서 오는 유세객을 두려워하였는데 나(王安石)도 늙을 무렵에 한 지방을 차지하여 다스리면서도 늘 거마들이 찾아오는 것을 보면 문득 놀라고 의심한다.’ 라고 하였는데 이는 왕형공(宋나라때 왕안석)의 시이다. 비록 한 때 희롱삼아 한 말 같으나 그가 평일에 정적인 司馬光과 呂東萊 같은 여러 정적들을 용납하지 못한 성격이 천성으로 굳어 있었음을 역시 알만하다.  나라를 다스리거나 집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그 이치는 두 가지가 아니니 문을 열어놓고 사방에서 오는 손님을 받아들이되 조그마한 문장도 천금으로 여기게 되니 참 어리석은 태도인 듯하나 그대는 애써 공부하여 소홀하고 시샘하지 말지어다.   황산


  --자고로 권력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인재들을 시기하고 질투했지만 문을 열어놓고 많은 손님을 받아들이며 돈을 아끼지 말고 부지런히 공부하라는 가훈인 듯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