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화의 사상과 주제와 화풍 등 전반에 걸쳐 영향을 받은 조선 말기의 이런 회화경향은 사대부 문인인 추사 김정희에 의해 선도되었으나 그 실행세력은 18세기의 조선 후기를 통해 크게 성장한 여항문인들이었다. 여항문인이란 역관, 의원 등 기술직 중인과 중인 출신 중심으로 형성된 비양반 계층의 시인들을 말한다.
이들은 조선 후·말기를 통해 문필과 관련된 왕정실무를 담당하면서 배양된 한문학 실력을 토대로 사대부들에 버금가는 새로운 문화 담당층으로 성장·활약했다.
특히 19세기에 이르러 사대부 문화권 진입을 위한 문학운동의 성공과 이를 통해 획득된 자신감의 기반 위에서 그동안 사대부 문인들에 의해 독점되어 오던 중세 문인문화 전개의 중추적 구실을 하게 되었다. 여항문인들은 문화적 측면에서 사대부 문인들과 동렬에 오르게 되면서 문인문화의 묵수와 강화에 앞장섰으며 이에 수반하여 갖추어야 할 사대부 문화 중 하나인 감상물 회화의 창작과 향유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김정희는 만 권 서적을 읽거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흉중일기胸中一氣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를 그림에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소양과 사의를 중시했으며 기교를 익히기 위해서는 고단한 수련이 필요하지만 단순히 형상을 비슷하게 그리는 것은 창작이 될 수 없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선대 대가의 화풍을 답습하거나 판에 박은 자연주의를 그는 비판했다. 그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회화란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이 제기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추구한 세계를 신기神氣 혹은 유가에서 말하는 사물의 이치로부터 얻은 깨달음, 선가의 ‘선지禪旨의 오묘한 것’으로 표현했다. 그것을 그는 ‘그 나머지 일분一分’이라고 했다. 그는 『제석파난권 題石坡蘭卷』에서 적었다.
“비록 구천구백구십구 분에까지 이를 수 있다 하여도 그 나머지 일 분은 가장 원만하게 이루기 힘드니, 구천구백구십구 분은 거의 모두 가능하나 이 일 분은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며, 역시 사람의 힘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앞서 강세황은 진경산수화가 실재 경관을 닮아야 한다고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선의 진경화풍이 획일화·상투화되었다고 비판했는데, 김정희의 말로 하면 ‘그 나머지 일분一分’이 빠진 것으로 작가의 소양이 표현되어야 한다는 데서 김정희는 강세황의 회화론에 동조한다. 김정희의 회화론은 강세황의 제자로서 문인화가 신위의 것을 따랐음을 알 수 있는데 신위는 사대부 문인 황산 김유근의 <소송단학도 疎松短壑圖>를 보고 말했다.
“… 황산의 영특한 그 재주는
시와 그림이 한 가지 이치로 통했구나.
먹칠하여 늘어놓으면 그림이 되고
글자로 모아놓으면 시가 된다.
참 정신은 감추고 보여주지 않으니
그 묘한 법은 당신만이 알고 있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