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光海君 1575~1641)은 선조(宣祖 1552~1608)의 둘째 아들입니다. 1608년 선조의 뒤를 이어 조선 제15대 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우리는 광해군을 가리켜 모후인 인목대비(仁穆大妃 1584~1632)를 폐위시키고 형인 임해군(臨海君 1574~1609)과 동생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을 죽인 악덕 군주로 배웠습니다. 그리하여 인조반정이 일어났고 이는 연산군(1476~1506)을 퇴출한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과 더불어 정의를 구현시킨 올바른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두 사건을 통하여 조선의 왕도는 바로 잡혔고 정도를 걸어가지 않을 때는 비록 국왕이라고 해도 준엄한 하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교훈을 주
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이는 광해군을 가리키며 그 총명하고 밝은 정사를 펼치려 했던 분이 어쩌다 패륜의 길로 접어들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초당파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려 하였으나 계략에 빠져 뜻을 이루지 못하였음은 두고두고 오점으로 남았습니다. 이것이 대의 민주주의가 없었던 왕조국가의 한계이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비극 일부분입니다.
이는 광해군의 뜻이 아니라 해도 그 책임은 피할 수 없습니다. 정도(正道)를 파괴한 분으로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람은 선악을 분별할 줄 알고 사리를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으로 불립니다. 광해군 또한,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의 국란에서 다음 대의 국왕이 될 신분으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름인가 많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총명한 혼(琿, 광해군의 이름)이 우여곡절 끝에 왕위를 이어받고 선정을 펼치려 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대외정책을 보겠습니다. 대륙국가인 명(明)과 만주 일대에서 새로 발호하는 후금(後金)과의 사이에서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국리민복인가를 깊이 생각했습니다. 이는 명과의 의리를 다지기 전 우리 민족의 흥망과도 관계됩니다.
무엇이 정의이고 정도입니까? 새로운 사태전개에 맞추는 것은 백성의 삶을 편케 하고 나라의 융성을 기약한다는 점에서 이는 캐 캐 묵은 논리에 앞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명이 대륙의 지배자로 후금을 토벌할지 또는 후금이 대륙의 지배자로 부상할지는 속단할 수 없는 그런 때였을 것입니다. 이런 때에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함으로써 누란의 위기를 사전에 막은 점은 광해군의 현명한 처사가 불러온 결과입니다.
또한, 1608년 선혜청(宣惠廳)을 두어 경기도에서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고, 1611년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경작지를 넓혀 재원(財源)을 확보하였으며, 선조말에 시역한 창덕궁을 그 원년에 준공하고 1619년에 경덕궁(慶德宮: 慶熙宮), 1621년에 인경궁(仁慶宮)을 중건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은 모두가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털어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다는 속담까지 생겨났습니다. 이제 광해군이 붕어하신지도 370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산59번지에서 쓸쓸히 잠들어 있는 광해군 묘를 보면서 씁쓸한 마음을 금 할 수 없습니다.
'남기고 싶은 글 > 선현들의 발자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순조의 삼녀 덕온공주 8세때 친필 (0) | 2011.08.03 |
---|---|
전쟁 기념관 (0) | 2011.07.07 |
민회빈 강씨 (0) | 2011.05.19 |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년 ~ 1645년)! 당신은 우리의 희망이었습니다. (0) | 2011.05.18 |
[스크랩] 신라의 비약적인 발전 (0) | 2009.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