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위와 같은 제목(이덕일의 역사 왜곡)으로 글을 올려서 저에 대하여 궁금하시죠. 저는 역사학자도 아니고 글 쓰는 문장가는 더욱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일 뿐입니다. 저는 2006년 양평군에서 건설하는 양평 친환경농업박물관 역사관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물을 기증한 바 있습니다.
양평군에서는 2009년 말경 안동김씨 문정공파 기증유물이라는 제목으로 도록을 발간한 바 있습니다. 그 무렵부터 저는 조상님 행적에 관하여 관심이 높아졌고 본 블로그를 개설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각인된 안동김씨는 숱한 명현과 충신을 배출하였음에도 조선조말 부정적인 의미의 세도정치(勢道政治)라는 틀 속에 갇혀버려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이게 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저는 이에 대하여 도록 인사말의 저희 문중 소갯글인 2차 안동김씨 세도정치 편에서 직계후손으로서 깊은 사죄를 드리고 나아갈 바를 밝힌 바 있습니다. 이는 아래와 같습니다.
이 부끄러운 가문의 역사에 대하여 후손으로서 머리 숙여 깊은 사죄를 드립니다. 그리고 저부터 정직한 삶 속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또 그렇게 다짐함으로써 국가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도록을 기초로 글을 쓰면서 오늘에 이르렀고 이는 짧은 지식 속에서도 진실을 담으려고 온 힘을 다했다고 말씀드립니다. 얼마 전 저는 조선왕 독살사건 2를 읽게 되었습니다. 저는, 장문의 글을 읽는 취향이 아니지만, 그러나 효명세자 편은 직계조상님을 언급하고 있어 우선 그 부분부터 주의 깊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작자이신 이덕일 선생님께 저의 생각을 적어 아랫글(이덕일 선생님께)과 같은 내용을 본 글을 올리기 직전(11.08.11 02:00 )에 이메일로 발송한 바 있습니다.
이덕일 씨에게 보낸 글은 충분한 시간으로 검토하지 않아 매끄럽지 않습니다. 「아뢰기를(직언)」이라고 쓸 부분을 상소로 하였고, 김교근의 탄핵 받음을 적었음은 순조실록에 나오는 것으로 부정한 사실이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은 사항입니다. 이는 이덕일 씨가 무슨 전리품이라도 발견한 양 길게 쓰고 있었고 김조순의 순조 대왕 보필 시기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어 저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후손에게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이덕일 씨에게 제가 보낸 글에 대하여 공개된 답변을 요구하였고 그때에는 저에게도 알려 달라고 추가하였습니다. 아랫글의 정독을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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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선생님께
안녕하십니까. 저는 선생님께서 쓰신 조선왕 독살사건 2의 효명세자 편을 읽고 내용이 황당하여 진실에 먹칠하는 것으로 단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 먼저 저는 김유근(金逌根 1785~1840)의 5대손 임을 밝힙니다. 본 글을 선생님의 홈페이지(http://www.hangaramhistory.org/)에 올리려 하였으나 자유게시판은 물론 최소한의 글 쓸 공간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보니 아래 이메일 주소가 있었고 글씨가 작아 알아보기 어려워 돋보기로 겨우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왜 홈페이지에 글 달을 공간을 왜 막아 놓으셨는지요?
저는 선생님께서 쓰신 효명세자 편을 보고 저의 생각을 피력하고자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실제로 김조순은 정조나 정약용 등이 고민했던 조선이 나아가야 할 미래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기 집안의 영달에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었고 그것이 안김 일문의 조정 주요 관직의 장악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하였습니다. 거론되는 인물로는 김조순을 필두로 김이익, 김이재, 김이도, 김이교, 김문순, 김명순, 김희순, 김유근, 김교근을 들고 있습니다. 정경급 인물들로 이에 대하여 제가 조사한 바로는, 아래 표와 같습니다.
김조순의 순조대왕 보필 시(1804년~1832년) 정경(정 2품 이상)급의 안동김씨 문중 출사표
급제하고 처음 출사한 때
|
1804년(순조 4)~1832년 순조 32)
|
출사한 분 | |
영조 |
김문순 |
정조 |
김이익, 김이교, 김이재, 김이양, 김이도, 김조순, 김희순, 김달순 |
정순왕후 수렴청정 때 |
김명순, 김시근 |
김조순의 순조대왕 보필 시 |
김학순, 김교근, 김유근 |
표 안의 분들이 김조순이 순조 대왕을 보필하신 28년 동안의 정경(정2품 이상)을 하신 안동김씨 인사들입니다. 특히 김명순(김조순의 4촌)은 아경(참판급)으로 1810년 함경도 관찰사로 근무 중 운명하였고 어떤 부정적인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왜 명단에 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윗분들이 계속해서 상당기간 정 2품 이상으로 있었던 것은 아니고 1804년 이후 2년 단위로 정리하니 작게는 한 분, 많을 때는 다섯 분으로 평균 2.4명입니다. 이는 20여 명에 이르는 정경급의 인사 중 일부로 이 숫자가 많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함께하는 타 문중 분들이 있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시대가 총체적인 부정부패에 빠져들었나 이고 김조순이 조장했느냐 이겠지요.
조정의 핵심은 정경(정일품, 종일품, 정이품)으로 아래 정리하였습니다.
[정일품: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영중추 부사, 영돈령 부사(國舅), 師傅(3 政丞의 겸직)] [종일품: 좌찬성, 우찬성, 판의금 부사, 판돈령 부사, 판중추 부사, 규장각 제학,] [정이품: 좌참찬, 우참찬, (6조)판서, 대제학, 한성부 판윤, 지돈령 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돈령부 외의 知事와 그리고 提調, 좌빈객, 우빈객은 같은 품계의 타관이 겸직] |
위 표에 열거된 여러분의 행적을 추적한바 효명세자 대리청정 때 탄핵받은 김교근 이외에는 부정과 연루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현대의 모든 정직한 기록(인명사전 등)은 위 열거된 분들이 한결같이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충직 된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세도정치를 열었다는 김조순은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에서 소개하기를
-생략. 어릴 때부터 기량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성격이 곧고 밝아서 정조의 사랑을 받았다. 왕세자의 보도(輔導 : 보필하여 인도함)를 맡았고, 국구(國舅 : 왕의 장인)가 된 뒤로는 왕을 보필해 군덕(君德)을 함양시키는 일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요직이 제수될 때마다 사양하는 것으로 보아 권세를 누리기 위해 노력한 인물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시벽의 당파나 세도의 풍을 형성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둘러싼 척족 세력들이 후일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하생략 -. 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평가를 생존 한때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김유근을 장황하게 끌어들인 의도가 무엇입니까? 정약용의 글까지 예로 들면서 "청렴한 선비가 지방관으로 나갈 때 가족(가루)을 데리고 가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훌륭한 분의 모습이겠지만, 저는 이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지방관도 사람인데 가족과 함께하는 낙마저 없다면 이는 오히려 행정에 부작용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6월 28일 수원에 있는 화성행궁을 답사한 바 있습니다. 행궁은 화성 유수의 근무처로 겸용(일부?)되기도 하였는데 여기에서 복내당(福內堂)이라는 건물을 보았습니다. 소개하기를 화성 유수의 가족들이 거처하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1827년 4월 김유근이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하기 위해 행차 도중 서흥에서 있었던 불행을 가슴 아파합니다. 이를 조경진의 상소까지 예로 들면서 공격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상소를 들으신 효명세자는 선생님 글 같이 “다시 생각하여 앞으로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습니다. 그때는 영의정 남공철이 입대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같은 날 기록을 보면, 효명세자께서 하령하기를, “아까 연석(筵席)에서 대각의 신하가 전 평안 감사의 일에 관해 의견을 진달하였는데, 그가 한 말이 전혀 말이 되지 않았다. 천첩을 데리고 간 것은 부임하는 사람들에게 흔이 있는 일에 불과하고 보면, 신중하고 조심하는 여부가 어찌 이것에 관련되겠는가? 이는 사람의 불행을 틈타 감히 한번 시험해 보고자 계책을 쓴 것이니, 그의 심보를 따져 보면 너무나도 교활하고 악랄하다. 아까는 대간의 체통 때문에 비록 되돌려 보내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 간사함을 막고 참소를 꺾는 도리에 있어서 그냥 둘 수 없다. 집의 조경진에게 우선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 하도록 하라.” 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첩을 대동한 것은 당시로써는 일반적인 현상 같았습니다. 물론 데리고 가지 않았다면, 본보기로 되었겠지만요. 이후 효명세자는 대간들의 국문상소를 물리치고 조경진을 흑산도로 귀양보냈습니다.
김유근은 같은 해(1827년) 5월 24일 상소문에서 - 생략. 대각의 신하가 용서받아 돌아오기 전에는 신이 어디로 가나 죽어야 할 때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대조께 품의하여 대각의 신하를 용서해 돌아오게 해 주소서. 그러면 신이 비록 죽어도 살아 있을 때와 같을 것입니다. 이하 생략. - 라고 하였습니다. 효명세자는 같은 해(1827년) 10월 17일 부처(付處)된 죄인 심상규(沈象奎), 섬에 유배된 죄인 조봉진(曹鳳振), 위리 안치된 죄인 조경진(趙璟鎭)을 모두 석방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냈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김유근이 서흥에서 변괴를 겪은 이후 순조실록을 읽으면 효명세자께서 김유근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묻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같은 순조실록을 인용하면서도 이러한 부분은 다 빼고 어떻게 하든지 밀어 떨어트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한쪽 시각으로만 바라보려는 의도가 역력합니다.
선생님은 서흥에서의 일을 상세하게 소개하면서 김유근을 꾸짖고 있습니다. 불행한 일이 있었음도 가슴 아픈 데 굳이 이를 들먹이고 있습니까? 첩의 있다는 것은 그때의 잣대로는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첩도 가족인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에서 선생님은 김유근의 상소문 중 다음 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신이 처음에 뜻한 것은 감영에 도착한 직후 곧바로 노모老母와 본생모本生母를 맞이해 한때 잘 모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두 노인을 모시려면 시중들 사람이필요하기에 신의 서제부와 천첩에게 따라 와서 정돈해 놓고 대기하도록 하였습니다. 라고 쓰셨는데 원문에서 보면 첩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궁색한 변명이라고 하면서 생모가 김조순이 살아 있는데 평양까지 따라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더구나 할머니가 아들이 있는 서울을 떠나 손자가 있는 평양으로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첩과 서제부를 데려간 데 대한 명분이 약한 것이었다. 상소문에는 분명히 노모(老母)와 본생모(本生母)라고 적고 있으며 선생님 또한, 인용하고 있습니다. 본생모(本生母)라는 뜻은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를 가리키고 양자를 갔을 때 쓰이는 말입니다. 노모(여기서는 계통상)는 말 그대로 늙으신 어머니이지요. 선생님께서 생모라는 뜻을 모를 리가 없는데 노모를 할머니로 적고 있음은 헐뜯으려는 의도를 더욱 강하게 하려 함이 아닙니까? 그때는 평양은 누구나 가 보고 싶은 곳 이었는가 봅니다. 양쪽 어머니를 한때나마 모시고자 함은 효의 대상으로 비판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첩과 서제부를 함께 데리고 갔음은 모셔오기 위한 준비로 그렇지 않고서야 서제부까지 데리고 갈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안김은 대간도 언급할 수 없는 성역이라고 했는데 그만큼 김조순의 세도(勢道)가 엄청나다는 뜻으로도 들립니다. 대간들이 얼마나 안동김씨를 감싸고 돌았는지 모르지만, 이는 김조순의 곧은 정신에도 어긋납니다.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에서 김조순을 소개하기를 성격이 곧고 밝아서 정조의 사랑을 받았다. 왕세자의 보도(輔導 : 보필하여 인도함)를 맡았고, 국구(國舅 : 왕의 장인)가 된 뒤로는 왕을 보필해 군덕(君德)을 함양시키는 일에 진력하였다. -- 시벽의 당파나 세도의 풍을 형성하지 않으려고 노력-- 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순조 대왕은 1832년 김조순의 부음을 듣고 아래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영돈녕부사 김조순이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애통하고 애통하다. 이것이 웬일인가? 기억하건대, 지난 경신년5732) 에 영고(寧考)께서 소자의 손을 잡고 말씀하시기를, ‘지금 내가 이 신하에게 너를 부탁하노니, 이 신하는 반드시 비도(非道)로 너를 보좌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그렇게 알라.’라고 하셨는데, 어제의 일과 같아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보위(寶位)에 오른 지 30여 년 동안 보필의 중요한 자리를 맡겼던 것은 왕실의 가까운 척친(戚親)이었던 까닭만은 아니었다. 오직 그는 부지런하고 충정(忠貞)하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왕실을 위하여, 안으로는 지극한 정성으로 힘을 다해 나를 올바르게 돕고 밖으로는 두루 다스리어 진정시켜 시국의 어려움을 크게 구제하였으니, 국가가 오늘날이 있도록 보존한 것이 누구의 힘이었겠는가? 참으로 선왕(先王)께서 부탁하여 맡기신 성의(聖意)를 저버리지 않은 소치(所致)인데, 이제는 끝났다. 내가 애통해 하는 것 이외에 나라의 일을 장차 어디에 의뢰하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니, 물을 건너는데 노[楫]를 잃은 듯하다. 이하생략. -
선생님은 조선왕 독살사건 2에서 효명세자 편을 쓰면서 마치 안동김씨 가문이 이와 연관된 양 오도하고 있습니다. 이를 출판한 다산북스는 인터넷 소개글 서평에서 있지도 않은 김유근의 귀양을 언급하고 있음을 방치시켰으며 책 소개에서 -생략. 효명세자 등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들의 독살 미스터리가 더한다. 이하 생략 -. 라고 하는 등 진실에 먹칠하게끔 유도한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명예와 관련된 글을 확증 없이 더구나 한쪽으로 치우친 시각으로 써도 됩니까?
조선왕조실록에서 효명세자 대리청정 기간 중 김유근이 관련된 내용을 보면, 김유근이 1827년 4월 서흥에서의 변괴를 겪은 이후 사직소를 계속 올리고 칩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효명세자는 병조판서 등 직책을 내리고 계속 출사를 종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때는 김유근이 마음의 병이 깊었을 적 이었는데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효명세자를 원망도 했을 것입니다. 효명세자는 6월 10일 김유근이 서연에도 참석하지 않자 돌연 수원 유수로 임명하였습니다. 이를 귀양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인데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수원 유수(화성 유수)는 정 2품(판서급)으로 근무하시던 분들도 임무를 명받았을 적이 많았는데 그곳은 정조대왕의 효성이 담긴 곳으로 신임을 받는 분만이 내려간 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를 시간을 갖고 서흥에서의 불행으로 말미암은 마음의 병을 고치라는 효명세자의 배려로 생각합니다.
또한, 1830년 윤4월 22일 효명세자께서 병석에 누워 있음을 전하면서 27일 순조께서 김조순과 조만영을 입직시킨 것에 대하여 대리청정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는 김조순이라고 단정하면서 순조께서 사태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의도가 무엇입니까? 김조순이 세자에게 위해라도 끼칠 인물이란 뜻입니까?
효명세자 편에서는 이외에도 많은 글을 올렸고 모두가 한쪽 시각으로 바라보려 한 흔적은 아닌가? 깊은 의구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는 시간을 갖고 탐구하겠습니다. 제 글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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