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생각해 봅시다

김시태(金時泰) 시호에 대하여

추읍산 2011. 7. 18. 09:10

필자는 지난 3월 25일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토론마당에 아래와 같은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그 답이 진작 나왔는데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고 이 또한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옮기어 본 장에 담습니다. 답변을 주신 오재일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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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태(金時泰) 시호에 대하여

2011-03-25 김철동 99

김시태(金時泰) 시호는 충의(忠毅)인지? 충장(忠莊)인지? 헷갈리게 합니다.
 
1) 안동김씨(시조 김선평) 휴암공파 족보에는 忠毅로 
2) 조선왕조실록, 1783년(정조 7) 2월 20일에 충장(忠莊)이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하였으며 
3) 같은 조선왕조실록 1784년(정조 8) 9 月 1日에는 前縣監金觀行, 以忠毅公金時泰之子入侍 라고 기록되는 등 여러 곳에서 忠毅라고 쓰고 있기 때문 입니다. 

忠莊과 忠毅중 어느것이 맞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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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실록의 착오로 충의(忠毅)가 맞다

2011-04-19 오재일 63

忠毅가 맞다고 봅니다.  
결국에는 실록에서 착오를 빚은 것으로 보입니다.  

병사 김시태는 임신사화에 화를 입어 영조때에 신원되고 , 
이어 정조때에 시호를 받는 이들 중의 한 분으로  
1783년(정조 7) 2월 20일에 충장(忠莊)이라는 시호는  
여타의 문헌을 들여다 볼 때에 실록의 착오로 보입니다. 

실록보다 더 원본이 되는 그 날짜의 승정원일기에는 
 卒 奉朝賀 趙重晦  諡 忠憲,  
 卒 禮曹判書 金萬重 諡 文孝,  
 贈戶曹判書 李尙집 諡 忠穆, [집;香+集] 
 贈戶曹判書 金時泰 諡 忠毅,  
 贈戶曹判書 白時耇 諡 忠莊,  
 贈兵曹判書 尹慤 諡 忠愍,  
 贈吏曹判書 朴聖源 諡 文獻,  
 贈禮曹判書 李鎭衡 諡 忠簡,  
 贈禮曹判書 林德躋 諡 忠獻 
이상 아홉 분의 시호가 나열되었는데  

실록에는  
○贈諡 奉朝賀 趙重晦 忠憲,  
 禮曹判書 金萬重 文孝,  
 贈吏曹判書 朴聖源 文獻,  
 贈禮曹判書 李鎭衡 忠簡,  
 贈戶曹判書 李尙집 忠穆, [집;香+集] 
 贈戶曹判書 金時泰 忠莊,  
 贈禮曹判書 林德躋 忠獻,  
 贈兵曹判書 尹懿 忠愍 
인 여덟 분으로 한 분이 빠졌습니다. 

즉, 백시구란 분이 빠졌습니다. 
백시구(白時耉)의 시호가 충장(忠莊)임은 틀림이 없고 
같은 오절도사(五節度使) 중의 한 분으로 
같은 날에 일제히 시호가 내렸는데 
이 날짜의 실록에 백시구가 빠졌습니다.   
백시구(白時耉)의 시호 충장(忠莊)을  
김시태(金時泰)의 시호로 오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백시구가 빠지지 않았다면 
○贈諡 奉朝賀 趙重晦 忠憲,  
 禮曹判書 金萬重 文孝,  
 贈吏曹判書 朴聖源 文獻,  
 贈禮曹判書 李鎭衡 忠簡,  
 贈戶曹判書 李尙집 忠穆, [집;香+集] 
 贈戶曹判書 白時耇 忠莊 
 贈戶曹判書 金時泰 忠毅 
 贈禮曹判書 林德躋 忠獻,  
 贈兵曹判書 尹懿 忠愍 
이렇게 아홉 분이 나와있어야 사리에 맞는 말이지요. 

백시구(白時耇 )라는 글자가 잘못 빠지고  
충장(忠莊)이란 글자가 김시태에 잘못 쓰여서 
바로 이런 착오가 났다고 확실해 보입니다. 
일성록이나 다른 문집이며 홍재전서에도  
김시태의 시호가 충장(忠莊)이라는 기록은 없습니다. 

승정원일기의 같은 날 두번째 기사는 후손에게 내리는 
은전이 기록되어 있는데 실록에서는 뺏습니다.
뺀 것은 잘못이 아니지요. 

*원본의 잘못으로 보여 당혹스럽습니다.
 원래 사국에서 초서로 기록된 기사를 
 탈초하고 이어서 재편집하고 또 인출하는 과정에서 
 신이 아닌 이상 이미 착오는 나올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더구나 전산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오탈자는 
 하루 빨리 착오를 바루어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