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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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자(Confessor) | |
출생 |
1182(혹은 1181), 이탈리아 |
사망 |
1226년 10월 3일, 이탈리아, 아시시 |
교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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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복 |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 |
축일 | 10월 4일 |
상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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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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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
동물들을 위한 기도 하느님 우리 하늘 아버지시여, 당신은 인류의 필요를 채우시고 그들을 당신께로 인도하고자 세상을 창조하셨나이다. 우리의 잘못으로 우리는 당신의 모든 피조물과 가졌던 이전의 아름다운 관계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를 도우사 그것을 보게 하시고, 당신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키심으로, 우리가 또한 우리와 당신의 모든 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옵소서. 당신의 피조물을 존중하며 그들을 치유하고 당신이 주신 선물로서 모든 피조물을 보는 은총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우리는 우리의 태만한 행동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모든 동물을 위해 기도하나이다. 영광스런 처녀 마리아의 중제와 성 프랜시스의 기도와 당신과 함께 이제와 항상 영원히 살며 다스리시는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원래 성취된 당신의 명령이 다시 한번 이루어져 온 세상을 회복 시키기를 원하나이다. 아멘.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이탈리아어: San Francesco d'Assisi, 1182년~1226년 10월 3일)[2])는 로마 가톨릭의 수도사이다. 성 프란치스코, 성 프란치스꼬, 프란시스(영어: Fransis) 등으로도 음역된다. 13세기 초에 프란치스코회(프란치스코 수도회) 설립으로 세속화된 로마 가톨릭교회의 개혁 운동을 이끈 교회개혁가이기도 하다. 1209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구두로 수도규칙을 인준받고, 복음의 생활양식을 기초로 살아갔는데, 지금까지로 프란치스코의 뒤를 따르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가 있다. 1회(작은형제회, 꼰벤투왈 프란치스코회, 카푸친 작은형제회)와 2회(클라라 수녀회), 3회(수도3회, 율수회, 재속프란치스코회)와 재속회가 있다. 그 이외의 기독교 교파들에서도 존경을 받아서, 대한 성공회의 수도원 가운데에도 성 프란시스 수도회라는 성공회수도원이 있다. 성 프란치스코는 로마 가톨릭, 성공회의 성인이고, 세상을 떠난 10월 3일에는 추도식을, 축일인 10월 4일에는 가톨릭 교회에서 동물들을 축복하는 예식을 개최한다.[3] 흔히 갈색 수도복에 밧줄 허리띠를 매고 오상이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프란치스코가 입었던 수도복은 회색이었다. 상징물은 비둘기·5개의 성흔(오상)·프란치스코회 수도복·십자가·해골이다.
목차[숨기기] |
[편집] 행적
[편집] 유년기 및 청년기
(참고: 한국 로마 가톨릭에서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라고 표기한다. 한국의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에서도 이 표기를 쓴다.)
[편집] 유년시절
1182년(혹은 1181년) 이탈리아의 움브리아 지방의 작은 도시 아씨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였다. 피에트로가 사업상 프랑스로 갔을 때에 그의 아내 피카가 프란치스코를 낳았다. 피에트로가 아씨시로 돌아왔을 때 그 아기가 산 루피노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조반니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피에트로는 그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아들의 이름을 프랑스에서 유래한 프란치스코라고 다시 지어 주었다.
[편집] 전쟁
아씨시 내에서의 긴장은 1198년경부터 생겨났다. 그 해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선출되었다. 정치적이었던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세속에서조차도 교회의 지상권을 주장하였다. 그 해 봄,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이름으로 로카 성을 관리하던 콘라드 백작이 로마 교황청에게 스폴레토에 있는 공작령을 양도하기 위해 스폴레토로 떠났다. 이 때, 아씨시 시민들은 그가 없는 틈을 타 마죠레 성(로까 마죠레)을 점령하였다. 그러자 시민과 귀족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당시 프란치스코는 16살쯤 되었을 때였는데, 그도 이 일에 참여하였다.
1202년 페루자로 피난을 갔던 아씨시의 귀족들이 아씨시의 시민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Collestrada 전투에 참여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아씨시군은 포로가 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1년간을 감옥에서 지냈는데, 부자인 아버지가 낸 보속금으로 풀려나게 되었다. 감옥 생활을 통해 그의 건강은 매우 악화되었고, 1204년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지내게 되었다.
[편집] 회심
프란치스코는 건강을 얻게 되자, 더 높은 이상을 갖기 시작했다. 이번에 그는 기사가 되길 꿈꾸었다. 십자군 원정에 참전하는 명성과 더불어서 기사도의 낭만은 당시 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었다. 1204년 그는 교황과 황제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교황군에 합류할 목적으로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풀리에로 출정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는 스뽈레또라는 곳에서 환시를 보았는데, 방 안에 수많은 갑옷과 무기가 있었다. 그리고 "주인을 섬기겠느냐? 아니면 종을 섬기겠느냐?"는 물음에 "주인을 섬기겠다"고 응답하고 아씨시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 아씨시로 되돌아갔다. 그 후 프란치스코는 친구들과 어울려 사치스럽게 연회를 보내 세월을 보내었다. 그러나 그도 얼마 지나지 않아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늘 아씨시 변두리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한 이름 모를 사람과 함께 한적한 장소에 가곤 했으며, 스스로 동굴에 가서 몇 시간 동안을 보내곤 하였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완전히 멍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는 아씨시 밑에 있는 평원으로 말을 타고 나가곤 하였는데, 거기에는 나환자촌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어느 한센병 환자와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었는데, 비록 그는 그 한센병 환자를 보고 놀랬지만 말에서 내려와 그 사람에게로 가서 돈을 쥐어 주고는 평화의 입맞춤을 하였다. 그는 그의 삶 전체를 통해서 이 만남을 가장 소중히 여겨 마음에 간직하였는데, 유언에서 "주님께서 나 프란치스코에게 이렇게 회개생활을 하도록 해 주셨습니다"하고 회상한다.
1205년에 가서는 또 다른 만남이 그를 전적으로 변화시켜 주었다. 이번에는 낡고 반쯤은 버려진 아씨시 밑 쪽에 위치한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였다. 그 성당은 한 가난하고 늙은 신부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 신부는 너무 가난해서 십자가 앞에 불을 밝힐 기름을 살 돈도 없었다. 프란치스코는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 성당의 보수를 위해 아버지의 가게로 가서 값비싼 포목을 꺼내 가지고는 폴리뇨 시장에 가서 죄다 팔았고 거기서 말도 팔았다. 그런 다음, 그는 자기가 번 돈을 그 성당의 신부에게 갖다 주기 위해 돌아왔는데, 그 신부는 그 돈을 정중히 거절하였다. 그 대신 프란치스코에게 봉사자로서 교회에 봉사를 해주는 것은 허락해주었다.
[편집] “가난과 결혼하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와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피에트로는 프란치스코가 성당 수리를 위해 벽돌을 구걸하러 돌아다니고, 거지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에게 돈을 주는 모습을 못마땅해 하였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민중들과 함께 살기 위해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실례로 그는 “나는 가난이라는 부인과 결혼했다” 라고 말하면서 가난을 실천했다. 부자의 아들로 자란 그는 부(富)가 선망의 대상이 아닌, 인생의 족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는 아버지로부터 상속권을 박탈당할 위기에 놓였다. 피에트로는 프란치스코에게 상속권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하기 위해 시의 집정관들에게 데리고 갔다. 그러나 이 문제는 종교적 문제였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주교의 권한에 달려있었다. 시의 집정관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래서 산타 마리아 마죠레 성당에서 가까운 주교관에서 재판이 열렸다. 아씨시의 귀도 주교는 프란치스코가 가지고 있는 돈을 아버지에게 돌려주라고 권유하였다. 이에 프란치스코는 순명하여,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주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다 벗고는 옷들과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아버지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부터 저는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려, 그 분을 하늘에 계신 저의 아버지라고 부르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피에트로는 당황한 채로 집에 돌아갔고,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은수자의 옷을 입고 아씨시를 떠났다. 가는 길에 프란치스코는 강도의 습격을 받았는데, 그는 자신이 위대한 왕의 사자라고 말하였다. 그 강도들은 그를 정신병자 정도로 생각하여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고 떠났는데, 프란치스코는 거기에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기독교의 성인이자 수사인 성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가난을 실천했다는 사실은 부자가 되려는 기독교인들과 교회에 교훈이 된다.
[편집] 성년기
1206년 여름에 프란치스코는 아씨시로 되돌아가 구걸 행위를 통해 성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다른 성당들, 즉 성 베드로 성당과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 혹은 포르치운쿨라 성당을 수리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이 포르치운쿨라 성당은 아씨시 아래쪽에 있는 움브리아 평원에 자리잡고 있으며, 프란치스코가 시작한 운동(프란치스칸 운동)이 태동하는 자리가 된다.
성 프란치스코의 삶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생겼고, 수도회가 생겨났다. 프란치스코는 이들을 작은 형제들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가 수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모범을 따르는 진정한 형제들로서,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수도자로 살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 작은 형제 공동체는 그 숫자가 꾸준하게 늘어갔다. 프란치스코의 작은 형제 공동체는 노동과 묵상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이러한 전통에 따라 프란치스코 수도회인 작은형제회에서 수사들이 약 1개월동안 세속에서의 노동을 함으로써 실천하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고향 아시시에서 수바시오(Subassio) 산에 운둔처를 세웠는데, 이는 후에 카르체리 수도원(은둔소)이 되었다.
1209년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을 위해 복음에 기초한 간단한 수도규칙을 써 주었다. 그리고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로마로 가서 교황을 알현하여 자신들의 수도회를 인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처음에는 프란치스코가 제출한 회칙의 생활 양식이 너무나도 이상적이며 엄격하다 하여 인가를 거절하였으나, 그날 밤 꿈 속에 쓰러져가는 성 라테라노 대성당을 프란치스코가 어깨로 부축하여 세우는 것을 보고 프란치스코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약함과 가난을 실천하는 교회가 아닌, 권력과 부자가 된 교회의 타락을 개혁하는 종교개혁자라는 사실을 깨달아, 다음날 수도규칙과 수도회를 정식 승인하였다.
1211년 그리스도의 수난 성지주일 날, 귀도 주교의 허락 아래 클라라가 아씨시의 자기 집에서 뛰쳐나와 포르치운쿨라로 왔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를 비밀리에 만나 자기도 프란치스칸 운동에 동참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래서 그녀는 성모상 밑에서 머리를 자른 다음 자신의 귀족 옷을 벗고 회개자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프란치스코는 몇몇 수도자들과 함께 그녀를 안전한 장소인 분도회의 한 수녀원으로 피신시켰다. 클라라의 가족들은 그녀에게 집으로 되돌아올 것을 요청하기 위해 수도원을 찾아갔지만, 외부인에게 대해서는 출입이 허락되지 않은 수도원의 규칙 덕분에 클라라는 그 곳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얼마 후 클라라의 동생 카테리나도 언니를 따라 프란치스칸 운동에 참여하였다. 삼촌인 모나르도가 와서 강제로 카테리나를 집으로 데리고 가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나중에는 클라라의 어머니 오토라나와 또다른 여동생 베아트리스도 입회하였다. 프란치스코는 클라라와 동료 수녀들을 성 다미아노 성당으로 보냈다. 훗날 클라라와 수녀들은 가난한 자매들의 회(클라라회)의 수도자가 된다. 프란치스코가 클라라와 더불어 창설한 이 클라라회는 반봉쇄 수도회로, 지금도 프란치스칸 2회로 분류된다. (흔히 작은형제회라 부르는 수도회는 남자 수도회로서, 프란치스칸 1회라 부른다. 1회는 분파가 갈라져 최종적으로 세 분파로 나뉘었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이 세 분파를 각각 '작은형제회'(OFM), '꼰벤뚜알 작은형제회'(OFMconv.), '카푸친 작은형제회'(OFMcap.)라고 부른다.)
프란치스코는 1213년 모로코 선교를 시도하였고, 이어서 시리아와 아프리카에도 선교사로 가기를 원했지만 파선과 질병으로 모두 좌절되었으며,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그들을 찾아갈 적이 있을 정도로 선교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러다가 1219년에 십자군을 따라 이집트로 갔다가 술탄 말렉크 알 카멜을 만나 십자군 전쟁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한 대화를 시도했으나, 포로 신세가 되었으며 술탄을 개종시키려는 시도를 했었다. 그 뒤 1220년에 예루살렘 순례를 하고 시리아까지 선교 활동을 벌였는데 이로써 예루살렘에 작은형제회가 살기 시작하였다.
1215년 11월에 프란치스코는 교회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 중의 하나인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프란치스코는 또다른 위대한 수도회의 창설자인 도미니코를 만난 것은 이 때였을 것이다. 이 공의회는 몇 가지 중요한 결정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새롭게 창설된 수도회들의 수도규칙을 승인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교황이 이미 1209년에 구두로 인준해 주었기 때문에, 1223년 수도규칙을 승인받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성흔(오상)으로도 유명한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생전 십자가에 매달릴 때 입은 상처가 성인들에게 그대로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알려져 있다. 1224년 8월 15일부터 9월 29일 사이에 프란치스코는 라베르나 산에서 단식 기도를 하고 있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인 9월 14일이 지난 9월 17일 프란치스코는 기도를 하던 도중 갑자기 십자가에 못박힌 세라핌을 목격하고 그리스도가 받은 다섯 상처를 자신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똑같이 입었는데, 이것은 로마 가톨릭 최초로 공식 확인된 성흔이다. 하지만 성흔 현상 이후 건강이 급속히 안 좋아져 눈이 반쯤 멀었고 심한 병까지 얻었다. 이 사건은 프란치스코에 관한 중세의 믿을 만한 사료들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엘리야 총장의 회람편지, 토마스 첼라노의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 성 보나벤투라의 대전기 등).
1226년 10월 3일 토요일 해질 무렵에 프란치스코는 동료 수도자들에게 요한 복음서의 수난기를 읽어달라고 청하고 나서 시편 141편을 기도한 후에 “어느 누구도 죽음의 포옹에서 달아날 수 없습니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2년 뒤 1228년 7월 16일 프란치스코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성 프란치스코의 유해는 성 조르지오 성당에 잠시 묻혔다가, 1230년에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1939년 프란치스코는 이탈리아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되었고, 1980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생태학자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가톨릭교회의 미사에서 그의 축일에 바치는 본기도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 가난하고 겸손한 성 프란치스코를 통하여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저희에게 보여 주셨으니, 저희도 그를 본받아 성자를 따르게 하시고,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차 주님과 하나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하신 하느님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대한성공회의 감사성찬례에서 그의 축일에 바치는 본기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 하느님, 주님의 종 프란시스를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불타게 하시어 세상의 찬란한 빛이 되게 하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도 성인이 보여주신 사랑과 절제를 본받아 어두운 세상에서 빛의 자녀로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편집] 일화
수도사가 된 뒤에도 프란치스코는 성적인 욕망을 느끼고 이 때문에 괴로워했는데 하느님과 예수님께 자신의 음욕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면서 장미 가시덤불 위에서 맨몸으로 굴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에 피어난 장미들에는 가시가 없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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