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동창인 개군초등학교 26회에서는 올해 칠순 기념으로 캄보디아와 베트남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5월 2일 드디어 그 등정길에 올랐다. 새벽 부랴부랴 먹는 둥 마는 둥 여행용 가방을 들고 중앙선 도심역에서 전철로 청량리역에서 하차하여 역전에서 인천공항행 버스에 몸을 실으니 8시(공항) 약속시각보다 약 30분 늦을 것 같았다. 늦어 재촉을 받으며 도착하니 벗들이 줄 서 절차를 받고 있지 아니한가. 반갑게 악수를 하며 탑승하니 10시 10분경이다. 이번 여행길은 초행으로 아래 순서에 의해서 올린다.
집을 나와 덕소고등학교 건너편 도로변에 활짝 핀 철쭉이 이번 여행길을 축복하는 듯 화사하다.
청량리역 앞에서 인천공항 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가는 중 세종로에서 바라본 조선일보 사옥
자유로에서 한강을 건너고 있다
탑승하기 전 인천 공항 대기실의 풍경
10시경 탑승했다. 베트남 항공이다.
5시간 30여분을 걸려 호치민 공항에 도착했다. 오후 4시경
호치민 공항 대기실
호치민 공항에서 캄보디아행으로 갈아타기 전 모습
캄보디아 씨엠립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 안
호치민 공항 이륙 후 내려다 본 호찌민 시(구 사이공 시)
호치민 시를 벗어나 평야지대가 시야에 들어온다.
하늘 위 구름에 싸여
캄보디아 씨엠립 공항에 도착했다. 5월 2일 오후 6시경
씨엠립 공항을 나온 일행은 교포가 운영하는 식당으로 향하였다.
한식으로 마련한 식단이 깔끔하다. 소주 2홉들이 한 병에 7불 엄청난 가격에 놀라다. ---이상 폰사진.
투숙한 호텔 외경이다. 5월 3일. 하룻밤 지나 아침이다. 발코니에서
캄보디의 아침
조식 후 본격 역사유적 답사길에 올랐다. 앙코르와트 가는 버스 안
불교국가 캄보디아의 승려들
타고 온 관광버스 하나투어와 가이드(왼쪽)
앙코르와트 입장하기 위한 절차
앙코르와트를 향해 걷다.
앙코르와트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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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아랫글을 읽으면서 이해를 돕는다.
600년 앙코르 왕조, 왜 소리 없이 사라졌을까
[세계문명기행 IV : 캄보디아 앙코르 유적②]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
여행을 해서 얻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세계에 대한 풍부한 이해이다. 그것은 단순히 진리추구를 넘어 우리의 삶을 분명 풍요롭게 한다. 나는 이것이 없다면 인생은 너무나 재미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여행은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비행기를 타고 갈 때는 약간의 흥분감도 없지 않지만 현지에 도착하여 피곤한 몸을 이끌고 유적지를 이곳저곳 다니다 보면 여행의 재미는 어느새 사라지고 빨리 호텔로 들어가 쉬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 사람들은 그저 사진만이 남는 것이라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그중에는 며칠이 지나면 돈을 준다고 해도 이렇게 피곤한 여행은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 눈에는 앙코르의 그 불가사의한 신전이든, 이집트의 위대한 피라미드이든 한낱 돌무덤에 불과하다. '내가 이 돌 보러 이 돈 들여 이곳까지 왔는가' 하면서 신세타령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눈에 무엇인가 보이는 자에게 여행은 재미와 흥미, 그리고 그 이상이다. 그에게는 유적지에서 만나는 돌 하나도 그냥 넘길 수가 없다. 이것이 인류의 유산이요, 보고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 그 시대의 사람들과 함께 앙코르 어느 사원 앞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 앙코르에 와서 이곳의 이 찬란한 문명을 접하며 조금이라도 캄보디아인들의 위대한 유산에 찬사를 아끼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금은 알고 이곳에 오지 않으면 안 된다.
캄보디아, 그 찬란한 역사
▲ 위 지도에서 보듯 시엠립은 앙코르 와트를 포함하여 수많은 유적이 있는 곳이다. | |
ⓒ 위키피디아 |
캄보디아, 크메르라고도 불리는 이 나라에 대해 우리는 타이와 베트남 사이에 있는 나라로 서양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이 있었던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반까지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은 나라로 알고 있다. 그 후 독립하였지만 미국의 영향력하에 있다가 1970년대 미국이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물러나자 교조적 공산주의자들인 크메르 루즈에 의한 집단학살이 일어난 나라. 한 마디로 우울한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하지만 캄보디아도 과거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지닌 나라이다. 한때는 동남아시아 최강국의 면모를 보였고, 동서양을 통틀어 세계 최대의 도시가 있었던 나라이기도 하다. 지금은 한참 개발도상국으로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지만 캄보디아의 역사에는 위대한 조상이 있고, 조상이 남긴 위대한 문화유산이 곳곳에 깔려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김용옥 선생이 말하는 대로 우리가 한국의 역사를 말하라고 하면 대강 신라, 고려, 조선 정도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캄보디아의 역사를 말하라고 하면 부남(후난, AD 1세기~550), 진랍(쩐라, 550~802), 앙코르(802~1432) 이 3개의 시대 정도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캄보디아 고대 왕조는 부남과 진랍을 거쳐 9세기에 들어와 앙코르 왕조를 만들면서 본격적인 통일 왕조를 맞이한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앙코르 와트를 중심으로 하는 앙코르의 유적은 모두 9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앙코르 왕국의 역사적 산물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통상 캄보디아 시엠립의 유적을 단순히 앙코르 와트라고 표현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이다. 앙코르 와트는 앙코르 유적 중 하나일 뿐이다. 시엠립의 앙코르 유적은 600년 앙코르 왕조가 만들어 놓은 수많은 유적의 집합체이다. 결코 앙코르 와트만이 앙코르 유적을 대표할 수는 없고, 더욱 그것이 이 지역 유적 전체를 부르는 대명사가 될 수 없다.
앙코르 왕조는 다시 크게 3기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앙코르 유적의 특징에서 오는 구분인데 알아 두면 사원의 형태나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제1기는 9세기 초(자야바르만 2세)부터 11세기 초(자야바르만 5세)까지로 약 200년의 기간을 말한다. 자야바르만 2세는 앙코르 왕조의 시조로서 프놈 쿨렌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캄부자(이것이 뒤에 캄푸치아라는 이름으로 변한다)라 정한다. 이 시기의 유적군에 속하는 것이 룰루오스 유적지에 있는 프레아 코와 바콩 사원이며, 이 시기에 속하면서 후기의 유적지로는 반테이 스레이가 유명하다.
▲ 앙코르 와트에 양각되어 있는 수리야바르만 2세, 수리야바르만은 앙코르 와트를 세운 왕으로 앙코르 왕조 최전성기의 왕이다. | |
ⓒ 박찬운 |
제2기는 11세기 초 (수리야바르만 2세)부터 12세기 후반 참족(베트남)에 의한 침략기까지로 약 160년 정도의 역사이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왕자의 난을 통해 등극한 인물인데 전쟁과 외교를 통해 당시 앙코르 제국의 영역을 확장하고 굳건한 내치를 통해 앙코르 왕조의 번영을 이끌었다.
앙코르 유적 중 단연 최고로 꼽히는 앙코르 와트는 바로 수리야바르만 2세가 왕실 전용 사원으로 만든 것이다. 최근 학자들이 항공촬영 등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 시기 앙코르 지역은 인구 1백만 명이 사는 세계 최대 도시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 프랑스 동양박물관의 자야바르만 7세의 상. | |
ⓒ 위키피디아 |
이 시기를 이야기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이가 원나라 사신 주달관이다. 주달관은 정확히 1296년 당시 원나라 황제 성종(테무르 칸)의 사신으로 진랍국이라 불리던 앙코르 왕조의 수도 앙코르 톰에 도착한다.
그는 1년간 인드라바르만 3세 곁에서 머물면서 생생한 기록을 남긴다. 이것이 그 유명한 <진랍풍토기>다.
앙코르 왕조는 600년 역사를 간직한 왕조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종이로 된 기록이 거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외국인인 주달관이 종이에 앙코르 왕조를 기록했으니 이 책의 사료적 가치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40장 분량의 이 기록은 당시 앙코르 왕조의 종교, 법 제도를 비롯하여 동식물, 의식주, 상거래 등의 내용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 주달관 저 <진랍풍토기>. 이 책은 최근 번역되었다. 소책자이지만 이런 책이 번역되었다는 것은 인문학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 |
ⓒ 백산자료원 |
그가 누구인가? 실크로드 기행 중 돈황 막고굴을 이야기할 때 본 그 인물이다(관련 기사 : <세계문명기행III: 실크로드 문명기행⑥ 여행의 하이라이트, 세계문화유산 막고굴> 참고). 막고굴 제17굴에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한 이 말이다.
그는 프랑스극동학원의 교수로서 1902년에 극동학원잡지(BEFEO)에 <진랍풍토기>를 <주달관의 캄보디아 견문록에 대한 비망록>이라는 이름으로 번역하여 게재한다.
위의 역사에서도 말했거니와 우리가 앙코르에 가서 불가사의한 고대 캄보디아(크메르)인의 거석문화를 보고자 한다면 적어도 위의 역사를 대표하는 유적들은 보고 와야 한다. 그래야만 앙코르를 다녀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앙코르 왕조의 초기를 대표하는 프레와 코와 바콩 그리고 반테이 스레이, 중기를 대표하는 앙코르 와트, 말기를 대표하는 앙코르 톰 등의 유적은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 속으로 증발한 앙코르, 어떻게 그런 일이?
적어도 지금까지 알려진 역사적 사실은 캄보디아의 앙코르 시대는 1432년 샴족의 침입을 받은 이래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한때 백만도 넘는 인구가 살면서 어쩌면 세계 최고의 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 위대한, 아니 믿기지 않는 석조 문명을 만들어 낸 앙코르 시대가 어찌하여 그리도 소리 없이 소멸되었는가. 물론 앙코르 지역은 위의 샴족 침입 이후에도 두 번에 걸쳐 잠시 크메르족의 수도로 사용된 적이 있다.
그러나 앙코르의 영화는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고 몇몇 탐험가나 선교사들에 의해 서양에 앙코르 유적의 존재는 알려진 바 있지만 주목받지 못하고 수 세기 동안 열대 밀림 속에 잠자고 말았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자연주의자 앙리무어에 의해 서양사회에 알려진 후에야 인류사의 전면에 나타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의문을 잠시 풀고 가자. 이 의문에 대한 설명은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나 대략 다음과 같은 설명을 모아 볼 수 있다.
첫째, 14세기부터 2세기에 걸친 샴족의 지속적인 침략이다. 앙코르 지역은 지리적으로 타이와 가까운 관계로 타이가 국력을 키울수록 그들을 감당하기 힘들었고 전쟁으로 인해 너무나 잦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다 보니 앙코르는 수도로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수도를 남쪽의 프놈펜 쪽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둘째, 자야바르만 7세 치하에 너무나 많은 사원의 건축이 있었고 왕족의 사치스러운 생활로 민심이 이반하였으며 마침내 중앙 권력이 약화되고 지방 권력이 점점 강력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앙코르 지역은 급속도로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셋째, 잦은 전쟁은 많은 남자들의 사망으로 연결되었고 이것은 앙코르 지역의 수리 시설을 제대로 돌 볼 수 있는 인력의 부족을 가져왔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고 앙코르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넷째, 환경적 재앙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13세기경 이 지역의 숲은 황폐해지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농업생산력의 저하로 나타났다. 거기다가 가뭄과 다른 환경적 요인이 작용하여 이 지역에서 사는 것이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혹자는 전쟁으로 인한 남자의 부족으로 수리 시설을 관리하지 못하자 모기의 비정상적인 증식을 가져와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도 한다.
다섯째, 외교적으로 14세기 후반부터는 명나라와의 관계를 중시하였고 해상 무역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이런 상황은 캄보디아 북부의 앙코르 지역에 수도를 유지하는 것보다 남부의 메콩강 유역의 프놈펜이 훨씬 나은 조건이었다.
이런 설명에도 한때 100만 명 이상의 사람이 살았다는 앙코르 지역이 거의 수세기 동안 밀림으로 방치되었다는 것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세계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고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의 도시를 이루었던 앙코르가 하루아침에 지구상에서 존재를 감추고 수세기 뒤에서나 세상에 다시 등장한 것은 어떤 설명에 의해서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미스터리이다.
힌두신과 설화에 관한 정보
앙코르 유적을 탐방할 때 제일 필요한 지식이 힌두 신에 대한 정보이다. 앙코르 유적은 대개 힌두교 또는 불교, 혹은 그 결합의 소산이다. 특히 힌두교는 초기 유적지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9세기와 10세기의 유적지에서는 시바신앙이, 11세기의 유적지에서는 비쉬누 신앙이 넘친다.
그리고 앙코르 와트를 비롯한 여러 곳에 벽면 부조를 볼 수 있는데 이 부조는 하나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물론 그 당시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전쟁, 시장의 모습, 고기 잡는 모습도 있지만 힌두의 설화를 소재로 한 것도 많다.
따라서 앙코르 여행을 하면서 이러한 힌두신과 힌두 설화를 전혀 모르고서는 무엇인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유적지의 이해를 하는 데 한계를 느낀다. 이하에서는 힌두의 주요 신과 설화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고자 한다.
▲ 남부 인디아 촐라 왕조의 춤추는 시바(사진 왼쪽), 12세기 캄보디아의 비쉬누(가운데), 태국의 4면상 브라마(오른쪽) | |
ⓒ 위키피디아 |
힌두의 주요 신과 기타 신, 혹은 영물 | ||||||
[힌두의 주요 신] 시바(Shiva) : 시바는 앙코르 문명의 초기에서 가장 자주 보이며 가장 일반적인 신이다. 프놈 바켕, 반테이 스레이, 바콩 및 프레아 코의 신전은 모두 그에게 봉헌된 것이다. 초기 앙코르 유적에서 볼 수 있는 시바는 링가(Linga)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발기된 남성의 심볼로 표현된다. 그는 또한 인간의 모습으로도 나타나는 데 자비와 위엄 두 가지 주제로 표현된다. 그는 히말라야 정상에 사는 난디라고 하는 하얀 소를 타고 나타나며 어떤 때는 춤의 주인(Lord of Dance)으로서 춤추는 신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비쉬누(Vishnu) : 비쉬누도 또한 앙코르 문화에서 아주 잘 알려진 신으로 조각상이나 부조에 많이 나온다. 앙코르 와트는 비쉬누에게 봉헌된 신전이다. 통상 4개의 팔을 가지고 손에 소라와 세상을 뜻하는 둥근 볼 그리고 2개의 무기를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이 바로 비쉬누이다. 또한 비쉬누는 가루다라고 하는 새들의 왕을 타고 다닌다. 비쉬누는 유지(preservation)의 신으로 자신의 역할을 대신해 주는 여러 현신을 만들어 낸다. 마츠야, 쿠르마, 바라하, 나라시마, 바마나, 파라슈라마, 라마, 크리쉬나, 부다, 칼키 등이 바로 그것이다. 브라마(Brahma) : 브라마는 창조의 신으로서 유지자로서의 비쉬누, 파괴자로서의 시바와 함께 힌두 3위 일체 중 하나이다. 브라마는 신성한 거위인 함사(Hamsa)를 타고 다닌다. 가네샤(Ganesha) : 지혜의 신이며 역경을 이기게 하는 신이다. 가네샤는 시바와 그의 처 파르바티의 아들이며 쥐를 타고 다닌다. 코끼리 모양의 머리와 뚱뚱한 인간의 몸 그리고 4개의 팔로 그려진다. 데비(Devi) : 여신 중의 최고신이다. 그녀는 사자와 호랑이를 타고 다니며 손에 칼을 비롯한 무기를 들고 다닌다. 시바의 아내이며 여성의 출산과 관련이 깊다. 강가(Ganga) : 갠지즈 강과 관련이 있으며 시바의 아내이기도 하다. 통상 시바의 헝클어진 머리 속에 작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락슈미(Lakshmi) : 행운과 풍요의 여신이다. 힌두 신화인 '우유 바다 젖기'를 하는 동안 태어났으며 그녀의 상징은 연꽃이며 통상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파르바티(Parvati) : 산의 딸이라고도 하며 시바의 아내이기도 하다. 우마(Uma)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시바의 삼지창을 가지고 연꽃 위나 사자를 타고 나타난다. [기타 신 혹은 영물]
아난타(Ananta) : 영원한 존재, 비쉬뉴가 잠을 자고 있는 동안 그의 현신으로 나타난다. 압사라(Apsara) : 천상의 요정으로 춤과 노래를 하는 신을 즐겁게 해준다. 아수라(Asura) : 힌두의 선신인 데바의 영원한 맞수이며 악신이다. 데바(Deva) : 부처의 자비를 보여 주는 선신이다. 여성신을 데바타(Devata)라고 한다. 드바라팔라(Dvarapala) : 문의 수호자로서 신전을 지키는 남신이다. 가루다(Garuda) : 새들의 왕이며 비쉬누를 태우는 영물이다. 몸통은 인간의 모습이지만 새의 날개를 가지고 있다. 칼라(Kala) : 가면을 쓴 모습의 생명체인데, 신전의 문설주에 보통 등장하며 신전의 수호자로서 역할을 한다. 큰 눈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이나 사자의 코를 갖고 두 개의 뿔을 가지고 있다. 그의 식성은 대단하여 무엇이나 먹을 수 있다. 마카라(Makara) : 거대한 바다 동물로 파충류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또한 신전의 린텔에 수호자로서 그려진다. 나가(Naga) : 뱀의 모습을 한 영물이다. 이는 가루다의 천적이다. 나가는 비와 번영을 통제하는 것으로 앙코르 신전에서 항상 볼 수 있다. 난디(Nandi) : 시바가 타고 다니는 흰 소이다. |
힌두의 설화 |
힌두의 설화는 많지만 앙코르 문명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두 개의 설화만 알아보자. 하나는 라마야나이며 또 다른 하나는 마하바라타이다.
출처: 아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22187&CMPT_CD=P0001 |
개군초등학교 26회 첫 탐방지 앙코라와트
앙코르와트 사원입구로 넓은 호수가 맞는다.
캄보디아 온도가 40도 c를 육박한다.
111
앙코르톰 탐방
앙코르와트와 앙코르톰 어느 말이 맞는 말일까? 합해 앙코르유적지라고 부름이 타당할 것이다. 앙코르톰은 여러 곳에 산재하고 앙코르와트 외곽에 있는 것이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이곳은 관광자원 보호라는 특성상 관광버스의 출입을 통제한다. 거리와 40도에 육박하는 무더위가 피곤케 하므로 일명 오토바이 택시인 툭툭툭이를 이용한다.
툭툭이
개군초등학교 26회 툭툭이 행렬
필자간 탄 툭툭이 기사
탐방객 중에는 한국인들이 꽤 보이는듯하다.
앙코르톰의 재앙! 어찌 이런 일이, 어찌할꼬~~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우기에 지붕 위에 떨어진 씨앗이 이렇게까지 될줄이야. 또 하나의 볼 거리일까?
어느 왕(생각나지 않음)이 모친을 잃고 통곡하며 지은 돌방(석실)이란다.
캄보디아인들의 아리랑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자선 안 하고 가시는 임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 총총걸음으로 지나치고 뒤돌아봄은 왜일까
돌문화의 보고 앙코라와트와 톰 그 찬란한 크메르 왕국은 어디로 갔는가?
1850년 최초로 앙코르 와트를 발견한 프랑스의 선교사(가톨릭) 샤롤 에밀 부유보 신부가 그곳에 베르사이유 궁전보다 더 큰 신의 궁전이 있다고 증언을 할때 덩치가 큰 서양인들은 설마 키작은 아시아의 크메르 민족들이 그럴 수 있을수 있냐면서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13년뒤인 1863년...
나비를 찾아 정글을 해매던 곤충학자 앙리무어가 또 다시 정글속을 헤매다가 앙코르의 장엄함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렇게 밀림속의 거대 도시는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역사를 탐방함은 그 속에서 선조님의 지혜를 읽고 인류가 지향하여야 할 바를 바로 깨닫는 데 있다 할 것이다. 거대국가 크메르 왕조 그 속에 담긴 역사가 온전하지 못해 몹시 섭섭하였다. 기록할 문자가 없어서일까? 그나마 한자가 있어 우리 역사가 기록되었음은 다행스럽기 그지없다. 되돌아보는 역사! 흥망성쇠의 흔적이 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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