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생각해 봅시다

『순조,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맞던 날 』의 방영을 보고서

추읍산 2015. 7. 26. 11:40

필자는 지난 12일 밤 10시 30분 KBS 1에서 방영된 『역사저널 그날』을 어제서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야기 있어 검색하였고 열어보았습니다. 세도정치와 무관한 영안 부원군 김조순을 왜 자꾸 끌어드리는 것입니까? 김조순 별세(別世) 17년 후인 철종 대왕 재위 기간에 일어난 세도정치, 이는 김조순과는 무관합니다. 생전의 흔적이 평가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왕조(王朝)도 백성의 삶은 곤궁했는데 현군(賢君)이라 해도 가뭄과 홍수에서 오는 흉년과 훼손, 전염병의 창궐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를 못한다고 했겠습니까? 어려워진 백성의 봉기는 홍경래난만 있었던게 아닙니다. 흥선대원군 집권 후인 고종 재위 기간에도 임오군란, 동학농민운동 등 살피건대 소요는 끊임없었습니다. 서북인과 서손의 차별을 풀어주도록 온 힘을 다하신 분이 영안 부원군 김조순임을 잊어서는 안될것입니다.

 

대의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이 없었던 그때를 지금의 잣대로 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뜻이 맞는 분들과의 연합은 비리가 아닙니다. 권력의 핵, 비변사의 안동 김씨 인사들이 13‰(37명)라고 하는데 세도라면 절반을 넘겨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중요한 것은 그 시대가 총채적인 부정부패에 빠져들었나이고 김조순이 조장했는냐 이겠지요.

 

역사 속 「김조순」의 평가는 분명합니다.

 

「문정(김상헌)을 닮은 손자로구나(정조대왕)」

 

「어릴 때부터 기량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성격이 곧고 밝아서 정조의 사랑을 받았다. 왕세자의 보도(輔導 : 보필하여 인도함)를 맡았고, 국구(國舅 : 왕의 장인)가 된 뒤로는 왕을 보필해 군덕(君德)을 함양시키는 일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요직이 제수될 때마다 사양하는 것으로 보아 권세를 누리기 위해 노력한 인물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시벽의 당파나 세도의 풍을 형성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둘러싼 척족 세력들이 후일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어린 순조를 도와 국구로서 30년간이나 보필한 공적이 컸다(두산백과)」

 

필자는 김조순 후대인 철종대왕때의 세도정치를 부끄러워합니다. 오죽하면 조선은 이씨의 나라가 아니라 김씨의 나라라고 했겠습니까? 물이 고이면 썩습니다. 「삼정의 문란」「매관매직」했다고 질타당하는데 그때의 부끄러운 자화상이 아닐까요? 특히 하옥 김좌근이 첩 나합 벼개밑 송사에 놀아났을까? 생각은 꼬리를 무는데 크게 부풀려진 느낌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필자는 양평군에서 발행한 본인의 기증유물 인사말의 2차 안동김씨 세도정치 편에서 아래와 같이 사죄한 바 같은 마음임을 밝힙니다.

 

이 부끄러운 가문의 역사에 대하여 후손으로서 머리 숙여 깊은 사죄를 드립니다. 그리고 저부터 정직한 삶 속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또 그렇게 다짐함으로써 국가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