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정의주현(kcd8344)
http://blog.naver.com/kcd8344/memo/220498631168
풍고 김조순(楓皐 金祖淳, 1765 ~ 1832)
오늘날 모든 역사책에 김조순이 순조 즉위 초부터 순조를 압도하고 정권을 독차지했으며, 이때부터 안동김씨 세도(安東金氏勢道)가 시작되었다고 쓰여 있다. 이선근이 1961년에 출판한 저서 『한국사』에 순조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김조순이 “어린 임금을 허위에 떠받들고 선왕의 유탁과 국구(國舅)의 위엄을 자세(藉勢)하면서”, 안동김씨 세도가 시작되었다고 했다.[1] 이 이후 반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모든 역사가들이 이 설이 사실인지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리하여 강만길은 “김조순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세도정권을 형성”했고, 세도정권은 “왕을 정치권력으로부터 철저히 배제”시켰다고 했다.[2] 송찬섭도 김조순이 순조의 전 치세 동안 순조를 압도하고 정권을 휘둘렀다고 하며,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왕을 보좌하던 김조순이 자신의 딸을 순조의 왕비로 들여보내고, 왕권을 압도하면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실시되었다”고 했다.[3] 오수창은 “홍경래의 난 이후로 김조순이 정권을 오로지하고 있었음은 더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사실”이라고까지 했다.[4]
김조순이 순조치세에 국정을 주도했다고 한 첫 언급은 정원용의 『수향편』에 보인다. 그는 김조순이 자신에게 “군상(君上)이 나를 믿어 책임을 맡겼다”고 했다고 하며, 김조순이 순조 30년간 세도(世道)를 주도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순조의 외삼촌 박종경(朴宗慶)이 순조 11년 이후 17년 겨울에 이르도록 세도에 참여했다고 하며, 그 후 순조의 친어머니인 가순궁(嘉順宮 = 綏嬪 : 1770 ~ 1823)이 그의 조카 박주수(朴周壽)를 김조순에게 보내 왕을 비밀리에 도우라고 하여, 김조순이 여러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이에 응했다고 하기도 한다.[5] 이 정원용의 말이 사실이라면 김조순이 국정에 관여한 것은 순조 17년 12월 1일 박종경이 죽은 후다. 『일성록』을 보면 김씨들이 6조와 삼사의 장으로 자주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순조 20년 이후이며, 그 이전에는 박종래(朴宗來), 박종보(朴宗輔), 박종경 등 박씨들이 정계에 포열되어 있었다. 순조 20년 이후에도 박종훈(朴宗薰)이 이조와 병조판서를 역임했고, 순조 34년에는 우의정으로 국사를 이끌어 갔다. 박종훈 이외에도 이 시기에 김씨들에 못지 않게 박주수, 박기수(朴綺壽), 박회수(朴晦壽), 박기수(朴岐壽) 등 박씨들이 정계에 포열되어 있었다.[6]
최근에 와서는 김씨세도가 시작된 것이 정조가 김조순에게 정국을 주도하라는 부탁을 한 것에 연유했다는 설이 자주 보인다. 임혜련은 『열성왕비세보(列聖王妃世譜)』에 순조가 지은 김조순의 묘지명인 「어제신도비명(御製神道碑銘)」이 실려 있는데, 그 내용에 정조가 순조에게 김조순을 일컬어 “이 사람이 너를 잘못된 길로 이끌지 않을 것이니, 네 스승으로 하라”라는 글이 있다고 하며, 김조순이 정조로부터 순조를 보도할 책임을 부탁받았다고 했다.[7] 그러나 김조순은 정조치세에 시강원의 일원이었을 뿐, 세자의 사부(師傅)는 아니었다.
『일성록』에 의하면 정조 21년 4월 18일 무자에 원자(元子)의 사부로 송환기(宋煥箕)가 임명되었다. 정조실록에는 정조가 24년 1월 1일에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며, 이병모(李秉模)를 세자사(世子師)로, 심환지(沈煥之)를 세자부(世子傅)로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에 35세인 김조순은 시강원의 여러 관원 중의 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다.[8] 시강원의 모든 인원은 실제로 정조로부터 순조를 보도할 책임을 부탁받은 사람들이니, 정조가 김조순에게만 순조를 부탁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임혜련이 인용한 정조의 말이 어떻게 하여 나오게 된 것인가를 정원용이 서술했는데, 그에 의하면, 하루는 한 대간이 정조에게 오만하게 대하여, 정조가 화를 심히 냈다고 한다. 이때에 김조순이 정조를 모시고 있다가, 직언(直言)은 마땅히 포용해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정조가 이 말을 듣고 얼굴색을 변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으므로, 김조순이 두려워하며 물러났다고 했다. 그 후 경연에서 정조가 김조순을 가리켜 충직하다고 했고, 그 후부터 정조가 김조순을 주의하여 보았으며, 그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했다고 한다. 세자빈을 김조순의 딸로 정하고 나서, 정조가 하루는 순조의 손을 잡고 김조순에 대해 말하기를 “이 사람에게 부탁하면 반드시 보도를 잘못하지 않을 것”이라 했는데, 과연 그 후 30여년간 보도를 잘했다고 하며, 정조가 사람을 보는 눈이 지혜롭다고 했다.[9] 이 정원용의 서술을 보면 '부탁'하라는 말은 단순히 관리로 쓰라는 말이지, 대권을 맡기라는 말로는 해석될 수 없다.
유봉학은 정조가 죽기 보름전인 24년 6월 14일에 김조순에게 자신이 갑자년(1805)에 퇴위하여 화성(수원)으로 간 후에 순조를 도와 국사를 독단하라고 했다는 글이 김조순이 지은 「영춘헌옥음기(迎春軒玉音記)」에 있다고 했다.[10] 실제로 김조순이 이러한 글을 썼다고 하더라도, 이는 김조순이 정조의 말을 오해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정조가 김조순에게 자신이 순조에게 왕위를 이양하여, 순조로 하여금 국정을 독단하도록 할 터이니, 순조를 잘 도우라고 했을 가능성은 있다. 이것을 김조순이 오해하여, 정조가 김조순 자신을 보고 국정을 독단하라고 한 것으로 잘못 들었는지는 몰라도, 실제로 정조가 김조순에게 국정을 독단하라고 했을 리는 없을 듯하다. 유봉학이 어떤 『풍고집(楓皐集)』에서 이러한 글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필자는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영인판으로 출판한 『풍고집』에서 이러한 글을 찾을 수 없었다.[11]
순조실록에는 김조순이 죽은 후, 영의정 남공철(南公轍)이 그를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자고 하며, 김조순이 정조의 부탁을 받아, 순조를 30년간 보좌했다고 한 것이 있을 뿐이다.[12] 정조가 순조를 '부탁했다'는 글은 조인영(趙寅永 : 1728 ~ 1850)이 쓴 박종보의 시장(諡狀)에도 보인다. 여기에서 조인영은 정조가 가순궁의 아버지 박준원(朴準源)과 오빠 박종보에게 순조를 보호하라고 부탁했다고 했다.[13] 『조선왕조실록』에는 순조도 헌종을 조만영(趙萬永) 혹은 조인영에게 부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조만영이 죽은 후에 헌종은 조만영이 순조와 효명세자 양조(兩朝)의 부탁을 받아 자신을 보좌했다고 했다. 또한 조인영이 죽자, 순원왕후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순조가 조인영에게 헌종을 보도(輔導)할 책임을 맡겼다고 했고, 왕조실록의 편찬자도 조인영이 순조의 부탁을 받아 헌종을 보좌했다고 했다.[14]
이러한 왕을 '부탁했다'는 기록들을 정권을 독단하라고 했다는 말로 이해하면, 정조나 순조가 여러 사람에게 순조와 헌종을 부탁하며 국정을 독단하도록 한 것으로 되니,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조선에서는 국초부터 새 왕이 즉위하면 당시의 삼상이 사퇴하고, 새 왕으로 하여금 새롭게 국정을 이끌 자를 결정하도록 했다. 왕은 전제군주로서 독단을 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데, 전왕이 새 왕의 전제권을 제약하는 결정을 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순조 초년과 헌종 초년에 당시 영상들인 심환지와 심상규(沈象奎)가 원상(院相)으로 전권을 행사했고,[15] 선왕의 유탁을 받았다는 김조순, 박종보나 조만영, 조인영이 원상에 임명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유봉학이 전하는 김조순의 말이 사실일 수 없는 것을 증명한다.
더욱이 정조는 자신의 외척 홍씨들이 자객을 보내고 역적모의를 하여 몇 번 죽음을 모면했으므로, 외척의 집권으로 인한 폐해를 통찰했었다. 또한 그의 전 치세 동안 홍씨뿐만 아니라, 정순왕후의 친가 경주김씨(慶州金氏), 자신의 처가 청풍김씨(淸風金氏), 정조가 총애했다는 가순궁의 친가 반남박씨(潘南朴氏) 등 왕실의 외척 인물들에게 정권을 독차지하도록 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유봉학 ・ 오수창 ・ 김명숙 등 오늘날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정조가 김조순을 불러들여 순조치세에 정국을 주도하라고 당부했을 리는 없을 듯하다.[16]
정조나 순조가 이러한 말을 했다 하더라도, '부탁했다'는 말은 단순히 잘 보좌하라는 말이지, 국정을 독단하라는 말로는 해석될 수 없다. 실제로 정조가 김조순에게 국정을 독단하라는 지시를 했다 하더라도, 죽은 왕의 유교(遺敎)는 새 집권자가 좇을 의사가 있지 않은 한, 아무 효력을 발생할 수 없다. 이는 순조치세 초에 정순왕후가 집권하고 있을 때에 윤행임(尹行恁)이 말끝마다 정조의 유교라고 하며 권세를 부리려 한다고, 정순왕후가 그를 죽인 사실로도 충분히 증명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안동김씨가 정계를 독차지한 책임을 정조에게서 찾을 수 없다.
(중략) 정조가 승지로 있던 김조순의 딸을 왕세자빈으로 하려 하여, 초간택이 있기 22일 전인 정조 24년 2월 4일에 그에게 병조참의를 제수했다. 이로 보면 정조 말년에 김조순이 권력을 행사할 만한 직위에 있지 않았고, 그가 1765년에 태어났으니, 그의 나이 당시 35세로 정국을 독단할 나이도 아니다. 김조순은 정조가 임종했을 때에 왕의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의 일원인 부승지(副承旨)였을 뿐, 승정원의 장(長)인 도승지(都承旨)도 되지 못했었다. 이 시기에 안동김씨가 많이 정부에 포열되어 있기는 했으나, 그의 친아버지가 일찍 죽어, 김조순은 아버지의 후광을 받지도 못했다. 정순왕후가 집권한 후인 1800년 8월 이후 김조순은 정순왕후의 호의로 병조판서와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윤행임이 사사된 후 동년 11월 계미에 정계에서 물러났다. 이와 같이 그가 겨우 3개월간 병조와 이조판서로 직임했으니, 권세를 부릴 기간이 없었다. 그 후 그는 순조가 집권한 5년 7월부터 훈련대장과 어영대장을 겸임하는 등 순조의 경호원 노릇을 했다.
정원용의 언급을 통해서 보면, 이때에 정순왕후 주위에 인물들인 소위 벽파를 제거할 때에 그가 큰 역할을 했던 듯하다. 김조순은 그러나 순조 9년 이후 순조가 관직을 제수할 때마다 사양하여, 현직을 맡은 적이 없다. 『일성록』을 보면 김조순은 순조 9년 이후에 약방(藥房)이 왕을 문안할 때에나 대신들과 함께 참석했지, 국사를 의논하는 자리에 참석했거나, 왕과 국사를 논의한 기록이 전혀 없다. 그는 죽을 때까지 계속 학술기관인 규장각(奎章閣)의 검교제학(檢校提學)으로 있으면서, 책을 간행하는 일이나 지문(誌文)을 쓰는 것 등 국가에서 발표하는 공문의 작성을 담당했다. 이 이외에 그는 과거시험에 시험관으로 참석하는 등 학자로서 일생을 보냈을 뿐, 정계의 일선에 나서지는 않았다. 규장각의 일개 서생(書生)이 무슨 권한으로 왕을 압도하고 비변사를 장악할 수가 있었겠는가?
김조순의 경력을 순조의 외삼촌 박종경의 관직과 비교하면 누가 더 세도를 부렸는지 뚜렷해진다. 순조실록을 보면 박종경은 순조 10년 이후에 선혜청 당상, 한성부판윤, 이판, 호판, 병판 등 6조의 장직뿐만 아니라, 삼사의 장직을 모조리 돌아가며 차지했으며, 이로 인해 조득영(趙得永)에게서 권세를 부린다고 비난을 받았었다.[17] 박종경이 죽은 후에는 박종훈이 이판, 병판을 역임했고, 순조 말년인 34년에는 우의정으로 되었는데, 그도 윤상도(尹尙度)로부터 권세를 부리고 탐학하다고 비난을 받았다.[18] 순조는 그의 외가에 대한 어떠한 비난도 용서하지 않아, 박종경을 탄핵했다고 조득영을, 박종훈을 탄핵했다고 윤상도를 왕 자신에게 역심을 품은 행위라고 하며 귀양보냈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서 순조 전 치세에 김씨보다는 오히려 박씨들이 더 권세를 부렸던 것을 알 수 있다.
순조 자신도 박종경이 죽자, 자신이 그에게 “국사를 위임한 것이나 다름없으며, 중신 또한 스스로 국사를 담당했다”고 했다.[19]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던 태종도 세종에게 선위하자, 그가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리들로부터 뒷전에 물러난 한 늙은이에 불과하다는 소리를 들었었다. 정순왕후도 정권을 왕에게 돌리자마자 정치를 독단했다고 비난받았다. 순원왕후는 철정하기 전에 자신에 반대할 만한 자들을 모두 정계에서 제거하고, 안동김씨를 포열하고 나서 대권을 헌종에게 주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원왕후는 헌종의 주위인물들이 자기를 “한 늙은 형세(形勢) 없는 홀어미” 취급을 한다고 분해했었다. 오늘날이나 조선에서나 정권을 쥐었던 자도 그 자리에서 물러나면, 냉대를 하는 것이 정계인물들의 행태다. 김조순은 한번도 큰 세력을 쥐지 않았었는데, 그가 무슨 배경으로 단순히 죽은 왕의 유교를 받았다거나, 왕의 장인이라고 왕을 압도하고 비변사를 장악할 수가 있었겠는가?
김조순이 어떻게 정치에 간섭을 했는가를 알리는 한 예로서, 그가 형조판서로 있던 이지연(李止淵)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이 편지에서 그는 은잔을 훔친 도둑을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를 죽이지 말라고 하며, “이것이 내가 간섭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이 중하므로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 자신이 이러한 편지를 보내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20] 이 편지를 보면, 그는 국가의 일에 외척이 간섭한다는 말을 들을까 하여 조심한 감이 있다. 정원용은 김조순을 평하여 항상 겸허했다고 하며, “오래된 신하들을 보호하고, 곤궁한 자들을 휼양하며, 형(刑)을 주는 데 관대하도록 비밀리에 조언하여 왕을 보좌했는데, 이러한 일을 바깥에서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그는 은언군(恩彦君)의 자녀들을 서울 근교로 오도록 하여 결혼을 시키고 생활비를 주도록 했는데, 이것이 모두 김조순이 비밀리에 조언을 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다.[21]
김조순이 순조로부터 세도를 위임받아, 공공연히 국사를 주도했으면, “바깥에서는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 나올 수가 없다. 김조순이 죽었을 때에 순조가 “누구에게 국사를 의뢰할 것인가?”하며 슬퍼했던 것을 보면, 박종경이 죽은 후에 실제로 김조순이 순조의 결정에 큰 역할을 하기는 한 듯하다.[22] 순조가 김조순을 깊이 신임하여, 그의 조언을 항상 따랐으므로, 관리들이 김조순이 순조를 조종하는 실제 권세가라고 생각했을 것이나, “왕을 압도했다”거나, “비변사를 장악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순조치세에 비변사가 정치를 독단한 것으로 보이는 현상은 순조 스스로 이들에게 모든 것을 맡긴 것에 기인했지, 강만길이 주장하듯이, 비변사당상들이 “국왕의 중요한 정치적 결정권과 관료임명권을 박탈”했기 때문이 아니다.[23] 오수창은 순조가 “김조순 가문을 중심으로 한 세력의 독주를 견제하려고 했다”고 했고, 이가 실패하자, 효명세자로 하여금 정치를 전단하도록 하여 김씨세도를 억제하도록 했다고 하며, 순조가 국왕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했다고 한다.[24] 그러나 이러한 오수창의 주장을 뒷받침할 사료가 없다.
순조는 친정 이후 어떠한 일도 스스로 단안을 내린 적이 없이 항상 묘당(廟堂)이 알아서 하라고 하며, 비변사 당상들에게 모든 것을 일임했다. 순조 17년 8월 경인에 우의정 남공철이 왕이 내전에 들어앉아 국사를 돌보지 않고, 모든 일을 묘당(정부)에 위임한다고 비난했었다. 19년 4월 기사에 사간(司諫) 임한(任熯 - 실록에는 임업)도 왕이 친정을 시작한 이후 조정에서 아뢰는 일에 단지 허락한다는 윤자(允字)만 쓰지, 정무는 모두 권력을 쥔 간신(奸臣)들에게 맡긴다고 비난했다. 34년 8월 정미에도 좌의정 홍석주(洪奭周)가 왕이 깊은 궁궐에 들어앉아, 정사에 관심이 없다고 비난했다.[25] 순조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어느 한 시기에 한하지 않고, 그의 전 치세에 해당했다. 그러므로 비변사당상들이 정치를 좌우했다.
순조는 정치에 무관심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외척으로 정부를 포열하려 했다. 그리하여 15년 4월 갑신에 영의정 김재찬(金載瓚), 좌의정 한용귀(韓用龜)가 관리를 뽑는 원칙은 이조의 전랑들이 그 인물됨을 보아 천거하면, 왕이 그 중에서 뽑아 관직을 제수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요사이는 왕이 특지(特旨)로써 제수하는 일이 자주 있는데, 이를 보면 모두 인척들이니 이럴 수가 없다고 했다.[26]
순조치세에 외척이 정권을 오로지 한 것은 순조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서였지, 그가 일개 가문에 억눌려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조선의 왕권이 미약했다고는 하나, 고려왕국의 무신정권(武臣政權)하에서와 같이 일개 가문에 눌려,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할 만큼 유명무실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정순왕후조차도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여, 그가 정권을 내놓자 마자 독단을 했다고 비난대상이 되었었다. 그의 섭정 기간에 김조순은 자신의 딸이 왕비가 못 될까 걱정을 무척 했었다. 그런데 순조가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던 정조의 아들로서, 김조순의 세력에 눌려 지냈을 리는 없다.
순조가 20년 이후 김조순의 영향을 받아, 김이재(金履載), 김이교(金履喬), 김시근(金蓍根), 김교근(金敎根) 등을 이조판서에 앉혀 김씨들을 정부에 포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김씨에 못지않게 박씨들이 관계(官界)에 포열되어 있었으므로, 안동김씨 세도기로는 볼 수 없다. 순조 전 치세에 김씨보다는 순조의 외가 박씨가 오히려 권세를 부렸다. 그러나 오늘날의 역사책에는 박씨세도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퍼져 있는 안동김씨 세도가 순조치세에 시작되었다는 설은 황현(1855 ~ 1910)이 그의 저서 『오하기문(梧下紀聞)』에 “순조가 정사를 김조순에게 위임했다”고 한 것에서 기인했다.[27] 이 설은 황현을 비롯한 20세기 초 학자들이 정순왕후와 순원왕후의 존재를 무시하여 생긴 오류이다.
- 변원림, 「2-3) 김조순이 순조를 압도하고 안동김씨 세도를 이룩했는가?」, 『순원왕후 독재와 19세기 조선사회의 동요』(일지사, 2012).
[1] : 이선근 : 『한국사 최근세편』, 29쪽, 진단학회 편, 을유문화사, 서울, 1961.
[2] : 강만길 : 『고쳐쓴 한국근대사』, 39쪽, 창작과비평사, 서울, 1995.
[3] : 송찬섭 : 「2. 삼남지방의 민중항쟁」, 『한국사 : 조선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권 36, 285쪽, 국사편찬위원회 편, 탐구당, 서울, 2003.
[4] : 오수창 :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한국사 : 조선후기의 정치』, 권 32, 203쪽, 국사편찬위원회 편, 탐구당, 서울, 2003.
[5] : 鄭元容 : 『袖香編』, 128, 130쪽, 影印本, 同文社, 서울, 1971.
[6] : 『日省錄』, 순조 24년, 12월 29일, 27년 11월 20일, 34년 8월 4일, 11월 20일.
[7] : 임혜련 : 「조선후기 헌종대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한국인물사연구』, 3호, 202, 206쪽, 한국인물사연구소, 서울, 2005.
[8] : 『朝鮮王朝實錄』, 권 47, 228쪽 : 정조 24년 1월 1일.
[9] : 鄭元容 : 『袖香編』, 133쪽.
[10] : 유봉학 : 『개혁과 갈등의 시대 - 정조와 19세기』, 168쪽, 신구문화사, 서울, 2009.
[11] : 金祖淳 : 『楓皐集』, 영인판, 민족문화추진회 편, 동양인쇄주식회사, 서울, 2002.
[12] : 『朝鮮王朝實錄』, 권 48, 393쪽 : 순조 33년 4월 신해.
[13] : 趙寅永 : 『雲石遺稿』, 397쪽, 한국문집총간, 299집, 영인판, 민족문화추진회 간, 서울, 2002.
[14] : 『朝鮮王朝實錄』, 권 48, 517쪽 : 헌종 12년 10월 병인, 559쪽; 철종 1년 12월 계해; 純元王后 綸綍, 8 - 35 : 철종 1년 12월 6일.
[15] : 『日省錄』, 순조 즉위년 7월 3일, 순조 34년 11월 13일 갑술.
[16] : 오수창 : 「정국의 추이」, 『조선정치사』, 권 상, 106쪽, 한국역사연구회 편, 청년사, 서울, 1990; 김명숙 : 「운석 조인영의 정치운영론」, 『조선시대사학보』, 11호, 157쪽, 조선시대사학회, 서울, 1999; 유봉학 : 『개혁과 갈등의 시대 - 정조와 19세기』, 40쪽.
[17] : 『朝鮮王朝實錄』, 권 48, 37쪽 : 순조 12년 11월 7일.
[18] : 『朝鮮王朝實錄』, 권 48, 357쪽 : 순조 30년 8월 28일.
[19] : 『朝鮮王朝實錄』, 권 48, 124쪽 : 순조 17년 12월 1일.
[20] : 金祖淳 : 『楓皐集』, 241쪽.
[21] : 金祖淳 : 『楓皐集』, 388쪽; 鄭元容 : 『袖香編』, 132쪽.
[22] : 『日省錄』, 순조 32년 4월 3일.
[23] : 강만길 : 『고쳐쓴 한국근대사』, 39쪽.
[24] : 오수창 :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한국사 : 조선후기의 정치』, 권 32, 203, 221쪽; 오수창 : 「정국의 추이」, 『조선정치사』, 권 상, 92 ~ 96쪽.
[25] : 『朝鮮王朝實錄』, 권 48, 119, 147, 411쪽.
[26] : 『朝鮮王朝實錄』, 권 48, 79쪽 : 순조 15년 4월 갑신.
[27] : 黃玹 : 『梧下紀聞』, 19쪽, 김종익 번역, 역사비평사, 서울, 1995.
'남기고 싶은 글 > 생각해 봅시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범초(範初) 절벽을 넘다 (0) | 2017.10.28 |
---|---|
혼란스런 기독교 (0) | 2016.08.10 |
『순조,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맞던 날 』의 방영을 보고서 (0) | 2015.07.26 |
춘산과 추사 그리고 황산 (0) | 2013.01.19 |
[스크랩] 김조순이 쓴 대웅전 (0) | 2011.1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