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황산과 그 문우들

추사의 전당시서서

추읍산 2015. 11. 2. 04:44

[고미술이야기] (30)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는 학문이 가장 뛰어나고 다음으로 글씨인데 세상에는 서예가로만 알려진 바가 더 많다. 또 서예만이 아니라 그림도 그렸고 글씨나 그림의 품평(品評)에도 매우 뛰어났지만 아는 이가 드물다.

십년 전쯤 추사관련 책을 몇 권 산적이 있는데 그 중 한권의 책갈피 속에 글씨가 써 있는 옛날 원고지 한 장이 끼어 있었다. 언뜻 봐선 보통 글씨로 보이나 자세히 보니 예사 글씨가 아니고, 판심제(版心題)를 보니 바로 추사의 다른 호인 예당서(禮堂書)라 써 있지 않은가?

하여 추사의 젊었을 때 글씨가 아닐까 막연하게 생각하고 어디엔가 놓아두고 한참을 잊고 지내다, 근간에 다른 일로 책을 뒤지다 우연히 다시 보게 되었다. 본 김에 이리저리 다시 연구하다가 바로 이 종이가 추사가 쓰던 전용 원고지요, 글씨 또한 추사의 글씨가 확실하다는 결론을 갖게 되었다. 약 10여 년을 통해 얻어진 결과라 여간 기쁜 것이 아니다.



판심제인 예당서도 추사 글씨로 각한 것이란 것을 알았다. 공부란 일생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함을 이를 통해 또다시 깨달았다. 글 내용도 추사의 문집인 완당선생문집(阮堂先生文集) 6권에 실려 있었다. 제목은 전당시서서(全唐詩序序)(사진)로, 친구인 황산 김유근(黃山 : 1785-1840)이 중국 당나라 때의 모든 시를 모아 놓은 전당시(全唐詩)의 서문만을 모아서 편집한 책에 대한 서문이다.

중간 중간 고친 글자와 글자를 끼워 넣은 것하며 양쪽으로 꺽쇠를 써서 내용을 빼라고 한 것은(全唐詩之幷序合編亦習尙之謬耳) 본인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추사가 중국을 다녀온 후 열심히 고증학 공부를 할 때의 글임을 알 수 있고, 이러한 류의 글씨를 한때 썼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또 1836년 경에 황산이 중풍으로 인한 실어증으로 고생을 하였으므로 아마도 이 서문은 1830년 전후의 글로 추정되며 글씨 또한 그때의 것이라 여겨졌다.

"…지금 황산이 전당시의 여러 서문을 기록하여 따로 펴낸 것은 대개 편하게 보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전 사람이 편하게 보기 위함은 옛 법에 맞질 않으나, 황산이 편하게 보기 위함은 옛 법에 맞으니 다만 전당시 뿐만이 아니라 옛날 경사(經師)의 내려오는 가법(家法)이 이로 인하여 다시 밝혀졌으니…"「전당시서서」

황산이 전당시 서문만을 별도로 간행한 것에 대해 매우 극찬을 하였다. 얼마나 가깝고 학문의 생각이 같았으면 이런 서문을 지었을까? 그 당시 노론 쪽 사람 중에 가장 신임을 받은 젊은 사람이 추사와 황산이었다. 하여 추사의 약전(略傳)을 지은 제자인 민규호(閔奎鎬: 1836-1878)는 자호를 황산의 황(黃)과 추사의 사(史)자를 써서 황사(黃史)라 했을 정도이다.

황산이 추사보다 한 살이 위이지만 매우 가까웠고 마음도 맞았지만 황산이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추사는 많은 시련을 겪게 되었다. 만약 황산이 조금 오래 살았다면 추사가 제주에 귀양 가는 일은 절대 없었으리라. 이런 두 사람의 우정이 깃든 이 얇은 한 장의 원고지가 다른 사람에게는 별것이 아닐지 몰라도 내게는 추사의 다른 어떤 글보다도 귀중하게 느껴진다. 추사 자신이 지은 글을 정리하여 놓은 친필원고지가 무슨 연유로 흩어져서 내 서재까지 왔는지 가만히 생각하면 할수록 신기하기만하다

 

출처 : 법률신문

         https://www.lawtimes.co.kr/Legal-News/Legal-News-View?Serial=78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