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庶尹公의 후예

김시걸의 묘갈명(墓碣銘)

추읍산 2018. 7. 12. 14:13

국역 국조인물고

김시걸

[]

원본글 출처김시걸의 묘갈명()
저자이의현()
이명 : 사흥()
: 난곡()
원전서지국조인물고 권23 명류()

안동 김씨()는 씨족의 명망이 우리나라에서 으뜸이 되나 더욱이 절행()으로 한때에 칭송되었는데, 대개 우리 선조ㆍ인조 때에 김상용()은 지위가 우의정()으로서 강화()에서 순절()하였으므로 문충()이라 증시()되고 그 여문()에 정표()되었으며, 그 아들 김광현()은 이조 참판()을 지냈는데 여러 번 언사()로 임금의 뜻을 거슬러 배척되어 졸서()하였으므로 정직하다는 칭송이 있으며, 김수인()을 낳았는데 수원 부사(使)를 지냈고, 그 아들 진사 증이조참판() 김성우()가 또 효()로 여문에 정표되었으니, 대대로 미덕을 이루고 계속하여 실추하지 않은 것이 이와 같기 때문이다. 진사공이 목사(使) 윤형성()의 딸을 아내로 맞아 김시걸을 낳았는데 자()는 사흥()이며 사람됨이 효우()에 도탑고 선행을 즐기고 의리를 좋아하며 겉보기는 온화하고 평이한 듯하나 속은 실로 강직하며 더욱이 윤상()의 대도를 지키는 것이 매우 확고하였는데 가학()이 그렇기 때문이다.

당초 숙종 기사년(, 1689년 숙종 15년)에 임금이 중궁을 폐출하고 행희() 장씨()를 왕비로 세우니, 군흉()이 아부하여 꾀하는 것이 날로 더욱 심하여 마침내 위로 점점 감히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데, 임금이 깨달아 군흉을 내치고 중궁의 자리를 회복하고 특별히 공을 발탁하여 사헌부 지평()으로 삼았다. 공이 그래서 맨 먼저 김덕원()ㆍ이현일()이 흉적을 영구()하고 자성()을 무욕()한 역적이라는 것과 유명천()이 위권()을 마음대로 희롱하였다는 것을 논하여 모두 변방으로 귀양 가게 되니, 사론()이 모두 상쾌하다 하였으나 국정을 담당한 자는 바야흐로 뒷날 스스로 안전할 계책에 힘쓰므로 매우 기뻐하지 않았다. 마침 민암()이 장씨의 오라비 장희재()와 몰래 결탁하여 중궁을 해치려 꾀하다가 국문()을 당하게 되었는데, 옥사()를 주관하는 자가 그 일을 무산시키려고 공초에 끌어댄 역적들을 국문하지 않고 또 고자()를 막아서 말하지 못하게 하고 수인()의 공초 중에서 민암에게 해로운 것은 말하지 못하게 하고 저지하여 옥안()에 쓰지 않고 낭관()을 시켜 무릎에 가깝게 신장()을 쓰게 하였다. 이때 국정을 담당한 자가 이미 민암ㆍ장희재를 힘써 보호하여 형신()하지 않고 오직 한두 가지 잗단 일만을 신문하고서 또 사실대로 불세라 염려하여 빨리 죽게 하여 그 옥안을 결말지으려고 무릎에 가깝게 신장을 써서 쉬이 죽게 하였다. 이때 공이 문사랑()이었으므로 목격한 것을 다 말하였는데, 대신 남구만() 이하 여러 신하가 무리 지어 일어나 스스로 변명하니, 임금이 마지못하여 공을 파직()하여 그들의 뜻을 위로하였으나, 그 지시받은 낭관에게 기록을 근거로 신문하니 감히 완전히 숨기지 못하였으므로 중외()에서 그 정상을 다 알았다. 이윽고 남구만이 장희재가 세자의 외척임을 핑계 삼아 그 사형을 감면하므로 여정(輿)이 다 분노하였는데, 공이 홍문관에 있었으므로 차자()를 올려 논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고, 관학 유생()이 상소하여 논하고 이어서 대신이 법을 왜곡한 것을 지적하니, 남구만 등이 외방으로 피하여 나갔다. 임금이 바야흐로 분노를 쌓고 기다리는데, 공이 상소하여 유생이 좋은 말을 하였다고 칭찬하였으므로, 임금이 엄한 분부를 내려 체직()하였다. 이미 삼사()가 함께 입대()하여 장희재의 일을 힘껏 쟁론하기로 약속하였는데 공의 말이 더욱 격렬하였으므로, 임금이 매우 노하여 이르기를, “이 논의를 김시걸이 힘껏 주장하니 매우 괴롭다.” 하였다. 공이 물러가서 다시 상소하여 전의 뜻을 더욱 밝히고 조금도 꺾이지 않았고 병이 극심해져서도 오히려 근심하여 마지않아 지은 시에 ‘늙은 정승이 국법을 업신여기니 뒤에 근심이 있을 줄 내가 안다[ ]’고 한 글귀가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인현왕후()가 승하하고 고옥()이 과연 일어나서 모두 공이 근심한 것과 같았으므로 듣는 자가 미리 아는 슬기로움에 탄복하였다.

공이 조정에서 벼슬한 10여 년 동안에 일을 당하면 강직하여, 이를테면 변방의 장수가 흉악한 무리에게 뇌물을 주고 학당의 선비가 거짓 스승을 꾸미고 곧은 신하를 앞다투어 얽매어 섬으로 귀양 보낸 것을 논하였는데, 그런 일들은 모두 적을 만하나 대절()이 아니므로 우선 생략하여 거론하지 않고 가장 명의()에 관계되는 것만을 나타내어 공이 문충공의 후손이 되기에 부끄럽지 않은 것을 밝혔다. 공이 일찍이 난곡()이라 자호()하였는데, 그 뜻을 취한 것이 깊다.

공은 문사()가 속되지 않아서 젊은 때에 과장()에 출입하였으나 으레 실패하다가 우연히 소과()에 입격하고 대과에 급제하였는데 모두 앞줄을 차지하고 승문원()을 거쳐 춘추관()에 들어가니 당시의 명망이 컸는데, 세도()가 비색()할 때를 당하여 잇달아 평안도 도사()와 부안()ㆍ북청() 두 고을의 수령으로 내쳐지고, 경화()되어서도 또 시의()를 거슬러서 함경도의 좌이관()으로 나갔으며, 이 뒤로는 걸핏하면 시기하는 자들에게 배척받았다. 여러 번 수찬()ㆍ교리()ㆍ응교()ㆍ헌납()ㆍ사간()ㆍ집의()에 제수되어서는 논의가 상하와 맞지 않는 것이 많았고, 이조()의 낭관()에 제수되어서도 또한 진급에 조급한 자들에게 반목 당하였으며, 또 문충공이 청나라에서 죽었으므로 북경에 가는 사신으로 차출되었으나 이를 괴로워하여 힘껏 사양하여 해면되니 곧 그 관직이 삭탈되었고, 이따금 시강원 관원과 시정()이 되었으나 당시의 정승이 사복시()의 작은 일을 들추어 아뢰어 파직되었으며, 사릉()을 봉하는 일의 공로로 판결사()ㆍ승지()에 승진되었고, 외직으로 나가 전라도 관찰사(使)가 되어서는 스스로 결심하고 백성을 넉넉하게 하고 학교를 일으키고 군사를 훈련하여 온 도내에서 칭송하고 사모하였으며, 대사간()으로 소환되어서는 좋아하지 않는 자가 아들이 죄를 범한 것을 지적하여 공도 아울러 나문()하기를 청하였으나 아들만을 나문하라고 명하였는데 공이 관직에 종사하는 동안에 이미 병들고 쇠약하여 조정에 돌아온 지 10여 일 만에 마침내 졸서하니 실로 신사년(, 1701년 숙종 27년) 6월 28일이며 49세이었는데, 사우()가 다 그 활용을 다하지 못한 것을 아까워하였다. 9월 18일에 홍주() 조휘곡() 간좌()인 언덕에 장사하였는데 선대 묘역이며, 뒤에 정부인() 청송 심씨()를 부장()하였다.

부인은 목사(使) 심서견()의 딸이며 정숙한 덕과 아름다운 행실이 있는데 모두 삼연(, 김창협()) 김공이 지은 묘문()에 나타나 있다. 두 아들과 네 딸이 있는데 아들은 사어() 김영행()과 김정행()이고 딸은 다 사족()에게 출가하였다. 김영행의 아들은 생원() 김이건()과 김이선()ㆍ김이원()ㆍ김이억()이며, 김정행의 아들은 김이정()이다. 명()은 이러하다.

지키는 것이 확고하고 말이 곧으며, 남의 이로운 것을 좇고 내 의리를 도타이 하였다. 행하는 것은 위축되었으나 기개는 스스로 높은 것은 풍계(, 김상용())의 5세에서 그 자손을 내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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