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庶尹公의 후예

김광혁의 묘갈명(墓碣銘)

추읍산 2018. 6. 28. 16:41

국역 국조인물고

김광혁

[]

원본글 출처김광혁의 묘갈명()
저자송시열()
본관광주()
이명 : 회경()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25 명류()

청음 선생(, 김상헌()) 이후 천하에서 모두 우리나라에 안동 김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대저 선생과 일족()인 자에 대해서는 세상에서 모두 그 직위와 행적()을 알고 있으려니와 더구나 훌륭한 자질()의 경우에는 더욱 자세하고 진실될 것이다. 선생에게 형이 있는데 장단 부사(使) 김상관()이요, 그 아들 김광혁() 회경(, 김광혁의 자())은 타고난 성품이 맑고 고상하고 자상하며, 학식이 넓고 성품이 아담()하며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는데 이 마음을 미루어 친구에게 성의를 다하였다. 그리고 조정()에 들어가서의 풍채()는 두려울이만큼 의연하여 뇌정()과도 같은 임금의 위엄 아래에서도 지키는 바는 더욱 굳고 확실하였다. 이러므로 세상의 칭찬을 받았으나 또한 이 때문에 임금의 미움을 사기도 하였다. 일찍이 임금에게 스스로를 탄핵하여 말하기를, “대저 임금의 신하된 자로서 대각()의 직책을 띠고 있다면 군부()의 과오를 보았을 경우 오직 임금을 바르게 인도하고 일을 바로잡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지 어찌 이해()를 따져 한 몸의 이익을 취하는 바탕으로 삼아서야 되겠습니까? 신은 학술()이 보잘 것 없고 천성 또한 어리석어 사리()에 어두운 소견을 고집하여 고치거나 뉘우칠 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평생을 나라에 몸 바치는 의리는 한 몸을 편안하게 보존하거나 녹봉을 탐하기 때문에서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 차마 본 뜻을 억지로 굽혀 여러 사람들이 하는대로 따라 할 수만은 없습니다.”하였다.

공은 젊어서 진사지()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 때에 스스로 문을 닫고 물러나 있다가 인조() 때에 비로소 참봉()에 제수()되었으며, 곧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를 시작으로 묘간()에 들어 세자 시강원()의 설서()가 되었고 예문관()에 들어가 한림()이 되어 붓을 들어서는 좌우로 민첩하면서도 위의()가 있었으며, 붓 놀림이 나는 듯하였고 말 뜻이 창달()하여 역시 사가()의 법을 잃지 않았다. 이때 인물이 무성히 많은 때였으나 역시 공보다 앞서는 자가 없었다. 네댓 벼슬을 거쳐 사간원 정언()이 되었으나 논사()로 인하여 체직()이 되었다. 정묘년(, 1627년 인조 5년) 노란() 때 검찰사(使)가 공을 불러들여 따르면서부터 시기와 형편에 알맞도록 힘썼으며, 이어 홍문관()의 수찬()과 교리()에 임명되었다. 이로부터 더러 다른 곳으로 옮긴 일은 있었으나, 늘 옥당()에 있었다. 일찍이 차자()를 올려 장릉(, 인조의 생부인 원종() 지칭)의 전례()에 관하여 간쟁()하니, 임금이 노하여 의금부에 내려 멀리 귀양 보내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대간()과 대신()이 죄 줄 수 없다고 힘껏 말하여 명령은 비로소 취소되었다. 오랜 뒤에 옛 직책에 다시 임명되었다. 이때 장릉은 이미 명()나라의 은명()을 받아 종묘()에 그 신주()를 모시기로 되어 있었다. 공이 또 동료()들과 모인 자리에서 논란을 벌이니 임금이 엄한 교지()를 내렸고 얼마 안되어 조관(, 배로 곡물을 실어 나르는 일을 맡은 관원)에 특별히 제수하니 대체로 임금이 공에게 재주와 역량이 있음을 알고 비록 좌천이긴 하나 역시 그 특장()을 시험하려는 것이었는데, 과연 직무를 잘 수행하므로 포상하라는 명이 있었다.

숭정() 병자년(, 1636년 인조 14년)에 노장()이 일을 자주 변경하여 맹약을 어기자 공은 체찰사(使)의 종사관()이 되어 호남()을 돌면서 군병()들을 검열()하였으며, 노병()이 침입해 들어오자 계속하여 온갖 노고를 겪어야 했다. 노()와의 일이 결정을 보게 되자 소환되어 이조 정랑()이 되었고, 사간원 헌납()으로 옮겼다가 의정부()의 검상()ㆍ사인()이 되었으나 시사()는 크게 변하여 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진취()를 좋아 아니하고 호남() 땅으로 물러나 집을 짓고 거친 땅을 개간하며 일생을 마칠 계획을 세우면서 당시의 일을 서글피 생각하여 울분()한 심정을 음영()에 나타내었다. 그리고 소명()이 자주 내렸으나 모두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는데, 조정에서 이어 광주 목사(使)로 임명하였다. 공은 낭관()으로 있을 적부터 사무에 통달하고 정체()에 밝았다.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경내가 크게 다스려졌다. 다시 소명을 사양하고 전리()에서 한가로이 지냈는데, 사헌부 집의()로 다시 소명을 받으매, 억지로 북행()을 하다가 도중에서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며, 직임()에 나아간 지 수일 만에 돌아오다가 청음 선생()이 노중()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정신없이 달려가 노상()에서 결별을 고하였다. 또 능주()로 부임하라는 명을 받고 부임하여 수년 동안 편안하게 다스렸는데, 병이 찾아들어 마침내 부신()을 풀어놓고 돌아가다가 담양()의 촌사()에서 졸()하니, 실제로 계미년(, 1643년 인조 21년) 7월 24일이요, 수()는 54세였다.

김씨()의 묘()는 모두 양주() 도산리()에 있으나 그 동북() 쪽 2리() 쯤에 새로이 정하여 그해 10월에 공을 장사지냈다. 배()는 김씨()로 관향은 광주()이며 동지중추부사() 김존경()의 딸로서 정숙하고 조용하다고 일컬어졌다. 공이 죽은 7년 뒤에 세상을 뜨매 부장()하였다. 아들이 없어 청음 선생이 그 손자 김수흥()에게 명하여 후사()가 되게 하니 도로 부사공(使)의 제사 받들기를 대략 통전()에 실려 있는 바와 같이 하였는데, 현종 대왕()이 영의정(, 김수흥을 가리킴)을 위하여 공에게 증직()하기를 그 벼슬과 같게 하였다. 따님이 세 분인데, 맏사위는 현령() 이빈()이요, 다음은 군수() 김홍경()이며, 막내 사위는 장령() 여증제()이다. 공은 예법가()에서 성장하였고 재주 또한 뛰어나 선배나 후배 모두 높은 벼슬에 오를 것이라고 기약하였었는데, 불행히도 지위가 덕()에 맞지 않았고, 나이 또한 길지 못하여 임금을 보좌할 자질과 세상을 부지()할 능력을 모두 펴지 못하였으니, 세상의 공을 아는 자 어찌 공을 모두 알았다고 할 것인가?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공이 비록 한미한 가문의 쓸쓸한 계보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입신 양명()할 것임은 전혀 의심할 것이 없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근본 있고 문채()가 있어 어진 부형()이 있었으며, 가정에 있어서나 나라에 있어서나 한결같이 전형()을 따랐다네. 어찌 하늘 오르듯 하였던가? 순풍()과도 같았었는데, 수()와 녹(祿)이 그 덕에 맞지 않았으니 그 누가 인색함과 풍요를 맡았던가? 아들이 능히 현명하였으니 직질()과 사물()이 융숭하였다네. 증직을 내려 영화롭게 하였으니 실로 공에게 마땅한 것이라네. 그러나 일찍이 주어지지 않아 식자()가 서글피 여기는 바라네.

관련이미지 3

[네이버 지식백과] 김광혁 [金光爀]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출처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45779&cid=49618&categoryId=49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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