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庶尹公의 후예

김광욱의 묘지명(墓誌銘)

추읍산 2018. 7. 12. 14:21

국역 국조인물고

김광욱

[]

원본글 출처김광욱의 묘지명()
저자김수흥()
이명 : 회이()
: 죽소()
원전서지국조인물고 권16 경재()

안동() 김씨()는 우리 태사(, 김선평())로부터 대()를 이어 전하다가 신천 군수() 증 좌찬성() 휘() 생해()에 이르러 세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가 곧 군기시 정() 증 이조 판서() 휘 원효()이다. 이분이 형조 참판() 증 좌찬성() 휘 상준()을 낳았는데, 태종()의 후예()인 현감() 이천우()의 딸과 혼인하여 의정부 좌참찬() 휘 광욱()을 낳으니, 자()는 회이()요, 스스로 호()를 죽소()라 하였다. 어려서부터 외모가 매우 출중하고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행동 거지를 스스로 법도에 맞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별달리 보았다. 성장하자 힘써 배워 사예()가 빠른 진도를 보이면서 이름이 높아졌다. 병오년(, 1606년 선조 39년)에 진사()에 1등으로 입격하였고 이어 대과()에서 발탁되어 승문원()에 배속()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어 예에 따라 대교()ㆍ봉교()에 승진하였으며, 병조 좌랑()으로 승진하여 지제교()의 직함을 띠었고, 사서()ㆍ정언()을 거쳐 홍문관()에 들어가 부수찬()이 되었는데, 관()의 동료()들과 함께 차자()를 올려 ‘궁금()을 엄하게 하고 사정()을 변별하며 인심을 진정시켜야 한다’고 역설하였으니, 실로 광해군 초년()이었다. 그 뒤 여러 번 홍문관에 들어가 신해년(, 1611년 광해군 3년)에는 정언()에 임명되었었는데, 마침 정인홍()이 회재(, 이언적()) 퇴계(退, 이황()) 두 선생을 무함해 헐뜯으니 공이 홀로 아뢰어 배척하면서, “늙었으면서도 죽지 않는다”는 말까지 하였다. 그러므로 간사한 무리들의 비위를 크게 거슬렸다. 2년 뒤인 계축년(, 1613년 광해군 5년)에 병조 정랑()에 임명되었는데 박응서()의 옥사()1)가 일어나면서 선조() 때의 이름난 공경 대부()들이 모두 체포당하였다. 공 및 참판공()도 이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나, 신문()을 받고는 곧 풀려났다.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 을묘년(, 1615년 광해군 7년)에 복제()를 마치었다.

이때 간신()이 화()를 빚어 모후(, 인목 대비())를 폐하려고 백관()을 위협하여 정청()하게 하였는데, 공은 끝까지 나아가지 않아 드디어 관직이 삭탈되었다. 이에 고양()의 행주() 강가로 거소()를 옮기고 끝내 세상에 나아가지 않을 것처럼 하기를 10년이었다. 계해년(, 1623년 인조 즉위년)에 반정()이 이루어지면서 비로소 서용되었는데, 참판공()이 뜻밖의 화()를 당하여 멀리 북관()으로 유배()되자 고산 찰방()으로 나가기로 청하여 고원()의 수령()으로 옮겼다가 참판공이 내지()로 배소()가 옮겨지면서 관직()을 버리고 뒤따라 돌아왔다. 기사년(, 1629년 인조 7년)에 직강()에 임명되면서 여러 시()의 정()과 승문원()의 판교()를 지냈으며, 다음 해인 경오년(, 1630년 인조 8년)에 목릉(, 선조()의 능)을 천봉()하는 일에 도청()으로서 노고가 있어서 당상()으로 승진하여 홍주 목사(使)로 나아가니, 대체로 어버이 봉양의 편의를 위해서였다. 정사를 간약()하게 하여 치적()이 도()에서 제일이었으므로, 암행 어사()가 포장()하도록 아뢰어 표리()가 내려졌다. 계유년(, 1633년 인조 11년)에 양서 관향사(西使)가 결원()이 되자 특별히 정선()하여 파견하도록 명하였는데, 묘당()에서 모두 공을 추천하여 공이 임명되었다. 이때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가도()에 진()을 두고 머무르며 한없이 요구를 하므로 국가의 재력()이 크게 줄어들어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공의 조치()가 적의()하여 늘 여유()가 있었고 사세상 따를 수 없는 경우에는 굳게 거절하여 흔들림이 없었으므로 그도 함부로 굴지 못하였으며, 이에 수년 사이에 창고의 저축이 가득하였다. 을해년(, 1635년 인조 13년)에 어버이 병으로 사임하여 교체되어 들어와서는 호조 참의()에 임명되었고, 오래잖아 상()을 당하였는데, 공의 나이 60세에 가까웠어도 집상()은 예()대로 행하였다.

병자년(, 1636년 인조 14년)의 난()에 강화()로 들어갔는데, 분사()의 대신()이 공을 분호조 참의()로 기용()하여 섬 안에 있는 호조의 전곡()을 관장하게 하였으나 (상신()의) 예에 어긋남을 들어 사임하고 끝내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정축년(, 1637년 인조 15년)에 외직()에 임명되었다가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며 순서에 따라 우부승지()에 승진하였고 나주 목사(使)에 제수()되어서는 오로지 학교()를 진흥시키고 교화()를 숭상하는 정책을 우선으로 하여, ≪소학()≫ 및 율곡 선생(, 이이())의 ≪격몽요결()≫을 간행()하여 사림()에 배포하였는데, 얼마 안되어 사임하고 돌아왔다. 신사년(, 1641년 인조 19년)에 판결사()에 임명 되었다가 황해 감사()로 나아갔는데, 본도는 난을 치른 이후로 공사() 모두 가난하였으나 고위 관원()들의 왕래가 빈번하여 그 책응()이 매우 번다하였으므로, 공은 몸소 솔선하여 절약하면서 위엄과 혜택을 아울러 시행하니 서도(西)의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칭송하고 있다. 임기가 차 병조 참의()에 임명되어 승문원 부제조(調)를 겸하였다. 갑신년(, 1644년 인조 22년)에 좌승지()가 되어 역적(, 심기원())을 국문()한 노고로 가선 대부()에 승진하였고, 세자()의 빈객()으로서 중국 심양에 갔다가 다음 해에 세자를 모시고 우리나라로 돌아와 곧 도승지()에 임명되었으며, 교체되어 병조 참판()이 되어 의금부()ㆍ춘추관() 및 비변사()의 유사 당상()을 겸하였다. 북저() 김류() 공과 택당() 이식() 공이 공의 문장()은 예문관()의 선임()에 합당하다 하여 예문관 제학()에 추천 임명되었고 이 뒤 여러 번 대제학() 후보에 추천되기도 하였으며 효종()이 세자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빈객()의 직책은 그대로 맡았다. 병술년(, 1646년 인조 24년)에 의금부 당상으로서 호서(西)의 역옥(, 반역 사건)의 국문()에 참여함으로써 가의 대부()로 승진하였다. 또 도승지로 임명되었는데, 전후로 이 직임에 있기를 아홉 번이었고, 한성 우윤()과 좌윤(), 병조()ㆍ형조()ㆍ공조()의 참판()을 지냈고, 기축년(, 1649년 인조 27년)에는 호조 참판을 지냈다. 인조()가 훙서()하자 명정()에 전자()를 써서 자헌 대부()에 승진하였고, 기로사()에 들어갔으며 형조 판서()와 한성 판윤()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인 경인년(, 1650년 효종 원년)에 외직에 나가 경기 감사()가 되었는데, 역신() 변사기()가 수원 부사(使)로 있으면서 남 몰래 반역()할 뜻을 품고 있었으나 사람들이 혹 의심하면서도 감히 배척하는 말을 하지 못하였다. 공은 다른 일을 근거로 하여 파출()시키도록 아뢰었으나, 조정()에서는 공에게 벌을 주고 그 직()은 그대로 맡겨두었는데, 오래지 않아 또 고과()에서 변사기를 최하에 놓자 조정에서 공이 조정을 경멸()한다고 논하여 공을 파직시켰다. 이에 대사헌() 홍무적()이 파직의 명을 도로 거두도록 항언()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자, 공은 곧 물러나 행주()의 강사()로 돌아갔다. 변사기가 복주()되자 사람들은 비로소 공의 선견()에 탄복하였다. 지돈령부사()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형조 판서가 되어 큰 송사()를 곧 결단하니 여러 사람들이 시원하게 여겼으며 또 한성 판윤과 오위도총부 총관()을 지냈다. 그런데 마침 특진관()으로 입시()하였다가 제학()의 해임을 청하고, 이어, “이민구()의 죄범()이 비록 무겁기는 하나 이미 직첩()을 내렸으니 대신()에게 하순()하여 흠은 씻어버리고 거두어 쓰도록 하소서.”하고 아뢰었으나 말이 밖으로 전해지면서 대부분이 그 진실과 달라졌다. 대간()이 이를 논()하면서 정외()의 말까지 덧붙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뒤에 공이 상소()하여 사실을 진술하니 의심을 품었던 자들이 환히 의심을 풀었다.

임진년(, 1652년 효종 3년)에 개성유수()로 나아갔는데, 공은 백성들의 병폐()를 조목 조목 아뢰어 폐지하거나 설치하는 일이 많았고, 정규 녹봉 외에는 하나도 사사로이 하는 바가 없었으며, 또 월름(, 월급으로 주는 곡물)을 내어놓아 백성들의 요역()에 보태었다. 얼마 뒤 병으로 사임하고 돌아오니 송도()의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칭송하였다. 돌아와 지중추부사()로서 의금부()를 겸하였고, 이어 의정부 우참찬()에 임명되었다가 곧 좌참찬()으로 승진하였는데, 여러 번 글을 올려 치사(, 나이가 많아 벼슬에서 물러남)를 빌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병신년(, 1656년 효종 7년) 정월 정침()에서 졸()하니 춘추()는 77세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집안사람들과 결별하되 집안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없었고, 다만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 조금도 보답을 못하였으니, 이것이 유한()이다.”하면서 이어 자제()에게 명하여 붓을 들게 하고 입으로 한 마디를 내리어 뜻을 나타내었다. 부음()이 알려지자 임금이 2일동안 철조()를 명하고 관원()을 보내 의례()에 의거 조제()하게 하였다. 이해 3월 병오일()에 양주()의 관아 동쪽 석실()의 선영() 곁 술좌 진향()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이씨()는 왕가()의 계통()으로서 효령 대군()의 후손이요, 우찬성() 정간공() 이직언()의 딸이다. 정간공은 결백한 몸가짐과 독실한 행동으로 일세()를 압도하였거니와 마땅히 보내야 할 곳을 선정하여 공에게 보낸 것이었다. 부인은 일찍이 가정의 훈도를 받아 효성스럽고 공경하며 화순()하여 부도()를 매우 갖추어서 해로()하기 60년동안에 부덕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병신년은 곧 혼인한 해였다. 공보다 2년 뒤에 졸()하여 공의 묘 왼쪽에 부장()하였다. 딸 하나만을 길렀는데 승문원 판교() 이전선()에게 출가하였다. 공이 죽고 후사가 없었으므로 아우인 현령() 김광위()의 아들 김수일()을 후사로 삼았는데, 음사()로 당상관()에 올랐고 여러 번 주목()의 수령()을 맡았었는데, 능력과 지모()가 크게 드러났다. 3남 1녀를 낳으니 맏이 김성최()는 현령이요, 다음은 김성대()요, 다음은 김성후()이며, 딸은 사인() 홍처주()에게 출가하였다. 내외의 손자와 손녀는 남녀 19인이다.

공은 풍채와 태도가 굳건하고 수려하여 몇 사람을 잇닿아 조응()할 정도였는데다가 성품이 단아하고 엄정하여 남들과 교유()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세 임금을 내리 섬겼으나 진퇴(退)에 담박하였다. 젊어서부터 늙기까지 독서()에 게으르지 않았고 책상 앞에 바로 앉아 날마다의 과정()이 있었다. 효성스럽고 우애로운 성품은 타고 난 것이어서 집상()하던 날에는 밤에까지 애통()해 하였으며, 종족()이나 옛 친구에게는 은애()가 도타웠고 가족을 통솔함에 있어서는 화합하게 하면서도 법도가 있었다. 자제()에게는 허물이 있더라도 곧 큰소리로 꾸짖지 아니하고 온화한 말로 타일러 스스로 고치게 하였으며, 평생 간묵()하고 신중히 하여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았다. 성품이 분잡하고 화려한 것을 싫어하고 검소함을 숭상하여 장복(, 벼슬아치의 공복()) 외에는 채색으로 장식한 옷을 입지 않았다. 집안에서나 임직()에서 정성스럽고 부지런하여 게으름이 없이 한결같이 청렴하고 근신함으로써 스스로 힘썼고 재능을 자랑하여 나타내려 아니하였다.

혼조(, 광해조())를 만나서는 강사()로 물러나 거처하면서 문을 닫고 들어 앉아 사람들과의 접촉이 뜸했고 오직 전적()과 시가()를 읊조리는 것으로 일을 삼았으며, 때로 촌옹() 야로()와 더불어 날씨를 헤아려 농상()을 권면할 뿐이었다. 이이첨() 부자의 정사()가 공이 거주하는 곳과 매우 가까웠는데, 하루는 급히 와서 보려고 하매 공이 출타()하였다고 핑계하며 보지 않으니, 이이첨이 크게 유감으로 여겼다. 공은 젊어서부터 박정길()과 서로 알고 지냈는데, 공이 벼슬에서 물러나 강사로 들어앉게 되자 박정길이 시()로써 공의 의사를 탐색하였다. 공이 이에 수답()하였는데, 말뜻이 완곡하면서도 엄격하였으므로 박정길이 공의 시를 보고 공이 본래의 뜻을 바꾸지 않을 것임을 알고서 이로부터 마침내 단절하였다.

대체로 공은 특이한 언행으로 명성을 쌓으려하지 않았으므로 중간에 집안의 환난을 당해 진도()에 막힘이 많았는데, 만년()에 늘 퇴휴(退)할 뜻을 갖고 호서(西)의 구사()를 수리하여 그 정자()의 이름을 ‘귀래()’라 하였으나 마침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찍이 묘명()을 스스로 서술()하면서 세덕()과 관차(, 관직의 차례)를 쓰고 이르기를, “이로써 족히 자손에게 보일 수 있으니 비()를 세워 포장()하는 일이 없게 하라.”하였다. 공이 지은 바 시문()은 모두 병화()에 잃었고 다만 난후()에 창수()한 여러 저작() 약간이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아! 불녕(, 자신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이 공에게 가장 깊이 인정을 받아 가르치고 돌보며 곡진하게 은혜로은 뜻을 더하시었는데, 일찍이 귀래정() 곁에 밭을 사서 의뢰할 곳으로 삼게 하였다. 불녕은 공이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기다려 공을 모시고 원림()에 노닐며 풍류()를 즐길 것을 스스로 기약했었는데, 공이 갑자기 돌아가시어 이 일이 결국 적막하게 허사가 될 줄 뉘 알았겠는가? 지금 이 묘지()의 부탁은 글을 할 줄 모르는 나로서 진실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나 입은 바 은혜에 감격하여 감히 사양할 수 없어, 드디어 대략 차례 대로 서술하고 이어서 명()을 쓰거니와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우리 김씨() 높이 드러남은 태사공()으로부터 비롯되어, 후손이 끊임 없이 이어지면서 두터이 덕을 쌓고 적게 베풀다가, 아! 우리 조고()때에 이르러 형제분 연이어 세상에 드러났도다. 그리고 여러 종형제(), 뒤 이어 높이 들날렸는데, 공은 그 사이에서 선대의 명성을 이었다 네. 맨 먼저 이름을 드날리어 세상의 영예로음 되었는데, 혼탁한 때를 당하여 제대로 되는 일이 없어, 죄 없이 걸려 들었으나 내심 반성해보아 무슨 가책이 있겠나? 10년 강호()에 노닐었지만 누가 그 뜻을 변화하게 할 것인가? 험난한 곳에서도 더욱 태평하였으니 마음과 몸 편안하였다네. 해와 달이 다시 밝아지자 뭇 인재가 조정()에 나아갔는데, 공은 오히려 벽지()로 가야했고 주현()에서 보람없이 애만 썼다네. 내몸에 수양()을 쌓아 마침내는 능력에 맞는 직임에 임명되었는데, 전곡()과 갑병()에 관한 것 어느 일인들 섬김이 아니랴? 다스린 곳의 백성 사모하였고 공정한 판결에 원망이 없었다네. 저 간사한 싹 끊음은 기선()을 살피는 데 있다네. 제학()에 추천됨에 있어 인망()이 문단()에 가지런하였네. 늘그막에 재상()에 오르매 미덥다, 세상이 존경하는 인물이라네. 치사()하려는 뜻이 간절하였는데 늙은이 예우()하는 은혜 깊었네. 훌쩍 선계()로 떠나게 되매 간절한 유언()이 있었다네. 석실()의 언덕은 곧 우리의 세장지()이라네. 이에 공의 유택()을 만드니 백세 동안 참으로 좋을 것이로다.

각주

  • 1) 박응서(朴應犀)의 옥사(獄事) : 박응서는 박순(朴淳)의 서자(庶子)로, 당시 시문(詩文)에 능했던 심우영(沈友)ㆍ서양갑(徐羊甲)ㆍ김경손(金慶孫)등과 서출(庶出)인 자신들은 출세의 길이 막혔음을 불평하면서, 소위 ‘강변칠우(江邊七友)’로 자처하여 시주(詩酒)를 즐기다가 광해군 4년(1612년)에 조령(鳥嶺)에서 은상(銀商)을 죽이고 은 수백 냥(兩)을 약탈했다가 체포되었는데, 당시 정인홍(鄭仁弘)ㆍ이이첨(李爾瞻)등의 사주를 받아 ‘김제남(金悌男)등과 모의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키 위한 자금을 마련하려고 한 짓이다’ 라고 진술하였으므로, 마침내 이듬해 광해군 5년에 김제남 등 많은사람이 사살되고 이어서 영창대군이 화를 당하게 된 사건. 계축 옥사(癸丑獄事).


'안동 김씨 > 庶尹公의 후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녕위 명온공주 묘역을 벌초하다  (0) 2018.09.10
안동 김씨를 말하다  (0) 2018.07.13
김시걸의 묘갈명(墓碣銘)  (0) 2018.07.12
곡운구곡도  (0) 2018.07.09
김광혁의 묘갈명(墓碣銘)  (0) 2018.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