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겸재의 ‘석실서원도’와 현재의 석실서원 터. 한강변(현 남양주 미사리)에 자리잡은 석실서원은 안동 김씨 학문의 요람이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없어지고 지금은 서원 터를 알리는 비석만 남아 있다. |
⑤절개·학문·문예 겸비 조선후기 최대 명문가 안동 김씨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교수)
19세기 세도정치의 주역이었던 안동 김씨는 정확히 말해 신(新) 안동김씨 ‘선원파’와 ‘청음파’를 말한다. 선원파는 선원 김상용의 후손, 청음파는 청음 김상헌의 후손이다. 그들은 인왕산과 경복궁 사이의 장의동(현 종로구 청운동~효자동 일대)에 주로 살았으므로 ‘장동 김씨’라고도 부른다.
세도정치의 부정적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되겠지만, 안동 김씨는 세도가문이 되기 이전에도 200여 년에 걸친 명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들 명성의 장기 지속은 조선후기 사대부의 지향을 가장 잘 구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정조 또한 그 점을 중시했고, 그들을 왕실의 파트너로 삼았다. 잠시 정조가 ‘일득록’에서 내렸던 평가를 보자.
김상헌의 학문과 절개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청나라 사람들도 공경했으니 문장은 오히려 부차적이다. … (김상헌·김상용) 형제의 절개는 고금에 견줄 만한 사람이 없다. 김수항은 할아버지 김상헌에게 부끄럽지 않았고, 김수흥은 동생 김수항에게 부끄럽지 않았다. (김수항의 아들들인) 김창집은 충절을 다했고, 김창협과 김창흡은 학문과 문장으로 뛰어났으며, 김창업·김창즙·김창립이 모두 명성을 날렸으니 참으로 드문 명문가이다.
정조의 평가에서 우리는 김상용·김상헌 형제의 절개, 김수항·김창집 부자의 충절, 그리고 김창협·김창흡 형제의 학문과 문장이 두드러졌음을 읽을 수 있다.
절개, 학문, 문예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가문. 그것을 통해 그들은 조선 후기 최대의 명문가가 됐다.
< 김상용·김상헌 형제의 절개, 김수항·김창집 부자의 충절>
안동 김씨의 선조들은 16세기 중반에 서울, 경기 일대에 정착했다. 서울의 정착지는 청풍계와 장의동 일대가 중심이었고, 선영(先塋)은 경기도 양주의 석실(石室)이었다. 17세기 중반에는 선영에서 10여 리 정도 떨어진 한강 가에 석실서원을 세워 문호를 크게 열었다.
안동 김씨는 병자호란 때 김상용·김상헌 형제의 행적으로 인해 명문으로 부상했다.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 피난했는데, 청나라 군사가 강화도를 함락하자 누각에서 화약을 터뜨려 순절했다.
▲ 청풍계(淸風溪) 1739년. 겸재 정선 그림. 간송미술관 소장. 인왕산 자락에 자리잡은 청풍계는 김상용과 그의 후손들이 살던 곳이다. 뛰어난 경치를 자랑했고, 가문의 큰 모임도 이곳에서 자주 열렸다. |
김상헌은 병자호란 전후에 척화론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거했다가 이후 청나라에 압송됐다. 70 노구로 끌려간 김상헌은 청나라 관료들에게 조선 선비의 꼿꼿함을 보여주어 내외의 찬탄을 자아냈다. 수년 만에 귀환한 그는 절개와 의리를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김상헌의 행적은 송시열이 이념화했다. 송시열은 김상헌의 행적으로 인해 조선이 의리를 보전했고 강상(綱常)을 다시 세울 수 있었다고 정리했다. 그리고 송시열은 김상헌의 손자인 김수흥·김수항 형제와 막역하게 교유했다.
김수흥·김수항 형제는 현종 대에 서인의 중진으로 활약했고 숙종 대에 모두 정승을 지냈다. 그러나 숙종 대부터 조선의 붕당 정치는 점차 격렬해져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격돌했다. 숙종은 1689년(숙종 15)에 희빈 장씨의 소생(훗날 경종)을 원자로 세우고 남인 중심의 정권을 세웠다. 그리고 서인의 기둥인 송시열과 영의정 김수항을 사사했다. 김수항의 형 김수흥은 유배지에서 죽었다.
5년 후 서인들은 복귀했고 남인은 정계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서인은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김수항의 맏아들 김창집은 숙종 말년에 영의정이 되어 노론을 이끌었다. 그러나 경종 대에 일어난 정치 변동으로 김창집은 사사됐고, 그의 아들 김제겸, 손자 김성행도 함께 죽었다.
경종의 뒤를 이은 영조는 탕평 정치를 통해 정국을 안정시키면서, 안동 김씨를 비롯한 노론 인물들을 점차 신원했다. 그 중심에 김창집 등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정조가 안동 김씨의 절개와 충절을 높이 평가했음은 위에서 본 바이다.
< 육창(六昌)의 학문과 문예(文藝)>
정치적 격변의 한 가운데서 부침을 거듭했지만, 가문의 명성을 날리게 한 원동력은 학문과 문예에서 거둔 성과였다.
김상헌 이래 안동 김씨에서 학문과 문장에 뛰어난 인물을 대대로 배출했지만, 그 꽃은 김수항의 여섯 아들들, 이른바 ‘육창(六昌)’에서 만개했다. 그들은 모두 학문과 문장으로 명성을 날렸는데 그 중 둘째 김창협, 셋째 김창흡, 넷째 김창업은 꼭 기억할 만하다.
김창협은 송시열의 수제자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대 한문(漢文) 문장가 10인에 들 정도로 문장이 탁월했다. 김창흡은 학문 뿐만 아니라 시(詩)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그들 형제는 18세기 서울의 학문, 문학, 예술 분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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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협 형제의 제자들은 18세기 서울의 노론 학파인 낙론(洛論)을 형성했다. 낙론은 18~19세기 서울의 최대 학파였다. 한편 김창협 형제는 문학과 예술에서 조선의 현실을 중시하는 이론을 전개했다. 그 이론에서 조선풍을 구현하는 문학과 회화가 나왔다. 진경 회화를 완성한 겸재 정선이 바로 김창흡의 문인이었다.
한편 김창업은 뛰어난 화가였고, 연행기의 걸작 ‘연행일기’를 저술했다. 김창업의 ‘연행일기’는 조선후기 3대 연행록의 첫 머리를 장식하며, 훗날 홍대용과 박지원의 연행록에 큰 영향을 주었다.
육창 다음의 세대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는 김원행이었다. 그는 석실서원에서 꾸준히 제자를 길러내, 낙론의 외연을 크게 확장했다. 제자 중에는 홍대용ㆍ황윤석 같은 실학자가 있었고, 정계로 진출한 제자들은 주로 시파(時派)로 활동하며 정조의 정치를 보좌했다.
< 세도가의 명암, 그리고 노블리스 오블리제>
안동 김씨를 눈여겨 본 정조는 그 가문의 중심 인물인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점 찍어두고 세상을 떴다.
순조 즉위 초 이른바 정순왕후의 수렴청정기(1800~1803)는 정조 정치에 대한 반동이었다. 자칫 정조가 정해 놓은 국혼(國婚, 순조와 김조순 딸의 혼인)마저 무산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1802년에 국혼은 성사됐다. 국구가 된 김조순은 반남 박씨 등과 연계하여 정순왕후의 일족인 경주 김씨를 도태시키고 세도정치의 기틀을 놓는다.
세도정권기에 국가의 활력이 쇠퇴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중심에 있던 안동 김씨는 이미 비전을 가진 집단이 아니라, 안정에 급급하는 세도가문로 변해 있었다. 다만 완화된 정책으로 현상을 유지했으므로,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조치나 사상 통제가 비교적 느슨했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청나라와의 문물 교류는 다시 활성화됐고, 심지어 천주교조차 다시 교세를 확장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안동 김씨의 세도가 절정에 달한 철종 대는 쏟아지는 비판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헌종 초와 철종 초에 두 번이나 수렴청정했던 순원왕후(순조비, 김조순의 딸)조차 비판을 항시 의식했다. 그러나 순원왕후가 의지했던 가문의 핵심 인물인 김좌근, 김흥근 등은 선대의 역량에 한참 못 미쳤다.
시국에 대처하는 책임 의식도 능력도 부재했던 그들은, 고종의 등극과 대원군의 집권으로 정계에서 크게 위축되었다. 하지만 세간의 인식처럼 완전히 도태되지는 않았고, 김병학 등을 중심으로 정계 일각을 차지하면서 수구 혹은 온건 보수파로 활동했다.
조선의 망국과 더불어 안동 김씨의 성세는 마감했다. 정조에게 받았던 명예로운 가문이라는 칭송은 이제 국망에 상응하는 엄중한 책임감으로 돌아올 따름이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기, 안동 김씨의 몇몇 인사들은 그 책임을 다하고자 노력했다. 갑신정변의 풍운아 김옥균,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작위를 사양하고 자결한 김석진, 일제의 작위를 거절하고 상해에서 독립운동에 힘쓴 김가진, 청산리 전투를 지휘한 장군 김좌진 등을 우리는 지도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충실했던 가문의 마지막 영광으로 기억해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