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실록 12권, 숙종 7년 8월 23일 계묘 3번째기사 1681년 청 강희(康熙) 20년
지돈녕부사 김수홍의 졸기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김수홍(金壽弘)이 졸(卒)하였다. 김수홍이 이름난 가문(家門)의 자식으로 비록 사우(士友) 사이에서는 약간의 명성이 있었으나 문학(文學)에 부족하여 사람됨이 괴상하고 망령되어 그를 버리는 이가 많았다. 기해년475) 의 효종[孝廟] 상(喪)에 자의 왕대비(慈懿王大妃)476) 가 입어야 할 복(服)에 대하여 대신(大臣)과 유신(儒臣) 송시열(宋時烈) 등은 국상(國喪)의 복제(服制)를 참고 적용하여 기년(朞年)으로 의논 결정하였는데, 그 뒤에 김수홍이 허목(許穆)·윤휴(尹鑴) 등의 다른 의논에 억지로 맞추어 편지로 송시열(宋時烈)이 기년(朞年)의 복제(服制)를 〈논의한〉 잘못을 논척(論斥)477) 하여 대항하고, 송시열이 헌의(獻議)한 말의 꼬투리를 잡아 선동(煽動)하고 곤궁에 빠뜨리려는 뜻을 두었다가 마침내 대각(臺閣)의 탄핵을 받아 오래도록 폐기(廢棄)당하였었다. 그러다가 갑인년478) 에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여 송시열이 죄를 입자, 당시의 무리들이 예론(禮論)을 사류(士流)들을 일망 타진(一網打盡)하려는 계기와 함정으로 삼았었다. 김수홍은 본래 세상에서 일컫는 서인(西人)인데 예론(禮論)에 공(功)이 있는 것을 진취하는 매개로 삼다가 마침내 음관(蔭官)의 벼슬길에서부터 사헌부(司憲府)의 직임에 발탁되고, 승선(承宣)479) 과 아경(亞卿)480) 의 벼슬을 거치고 승진하여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임명되었다. 김수홍은 이를 편안하게 여기면서 부끄러움 없이 진취(進取)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늙도록 도리에 어긋나고 비루하며 사특한 행동을 한 것은 모두 논할 수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나이 80이 넘어 죽었다. 당시 송시열이 임야(林野)에서 기용되어 동전(東銓)481) 을 맡아 인사(人士)로 하료(下僚)에 억눌려 있는 자를 추천하여 발탁하고 대헌(臺憲)에 천거하여 보임(補任)되게 하였는데, 김수홍도 희망(希望)하였었지만 송시열이 취(取)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비방하며 배척한 것도 유감으로 노여워한 데서 나왔다고들 하였다.
송시열은 언제나 크고 작은 문자(文字)에 반드시 숭정 연호(崇禎年號)482) 를 기록하여 존주지의(尊周之義)483) 를 나타냈는데, 김수홍은 그의 조부(祖父)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이 병자년484) 강도(江都)485) 의 난리에 순절(殉節)하였는데도 강희 연월(康熙年月)486) 을 써서 송시열과 서로 반대되는 뜻을 보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더럽게 여겼다. 그 사람은 비록 보잘것없지만 처음에는 여러 간신(奸臣)들의 움직임을 도왔고 마침내는 사림(士林) 참화(慘禍)의 단서가 되었으니, 그는 세도(世道)가 쇠약해지고 융성해지는 시기에 관계가 있는 사람인가 보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547면
- 【분류】인물(人物)
- [註 475]기해년 : 1659 현종 즉위년.
- [註 476]자의 왕대비(慈懿王大妃) : 인조(仁祖)의 계비(繼妃) 조씨(趙氏).
- [註 477]논척(論斥) : 논란하여 배척함.
- [註 478]갑인년 : 1674 숙종 즉위년.
- [註 479]승선(承宣) : 승지(承旨).
- [註 480]아경(亞卿) : 참판(參判).
- [註 481]동전(東銓) : 이조 판서(吏曹判書).
- [註 482]숭정 연호(崇禎年號) : 명나라 의종(毅宗)의 연호.
- [註 483]존주지의(尊周之義) : 주나라 왕실을 존숭한다는 뜻으로, 천자국을 존숭하는 뜻임.
- [註 484]병자년 : 1636 인조 14년.
- [註 485]강도(江都) : 강화도(江華島).
- [註 486]강희 연월(康熙年月) : 청나라 성조(聖祖)의 연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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