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졸기(卒記)

송시열의 졸기

추읍산 2018. 7. 23. 13:21

숙종실록 21권, 숙종 15년 6월 3일 무진 2번째기사 1689년 청 강희(康熙) 28년

송시열의 졸기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이때 우의정(右議政) 김덕원(金德遠)이 또한 새로 일을 보면서 같이 입시하였는데, 임금이 돌아보며 이르기를,

"지난 날의 일은 대신을 대우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었으니, 마음속으로 항상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고, 이어서 위로하고 효유(曉諭)하기를 심히 지극히 하였다. 영의정 권대운(權大運)이 말하기를,

"이현일(李玄逸)은 박학 군자(博學君子)이니 마땅히 자주 강연(講筵)에 입시(入侍)하게 하고, 인하며 국자 좨주(國子祭酒)를 겸하게 하면 사자(士子)의 긍식(矜式)377) 이 될 만합니다. 그가 이부(吏部)378) 를 면하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므로 만약 그 원에 따라 오로지 경학(經學)에만 책임을 맡기면 반드시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좌의정 목내선(睦來善)김덕원이 또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가하다."

하였다. 목내선권대운이,

"청컨대 천주(薦主)379) 를 골라서 별도로 인재를 추천하게 하되, 적절한 재주를 갖추지 않았다면 천주를 좌죄(坐罪)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받아 들였다. 임금이 박정신(朴廷藎)의 옥사(獄事)를 물으니, 지의금(知義禁) 유명천(柳命天)이 대신(大臣)에게 묻기를 청하였다. 김덕원이 말하기를,

"박정신·김기문(金起門)·변이보(卞爾輔)는 모두 숨기는 정상이 있고, 한석조(韓錫祚)는 사행(使行) 때 뇌물을 준 일 때문에 나치(拿致)되었는데, 그때의 수역(首譯)이 이미 죽었으므로 한석조가 반드시 고하지 아니한 것이니, 박정신에 비하여 차이가 있습니다."

하였다. 목내선이 말하기를,

"한석조는 진실로 세 역관(譯官)과는 다름이 있고, 또 고신(栲訊)을 세 차례나 겪었으니 용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박정신 등은 인하여 형신(刑訊)을 가하고, 한석조는 배소(配所)로 도로 보내도록 명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민암(閔黯)이 병조에 당상 군관(堂上軍官)을 다시 설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보다 앞서 홍중보(洪重普)가 병조 판서로 있을 적에 30원(員)을 설치할 것을 아뢰어, 반(半)은 금군 별장(禁軍別將)에 붙였는데, 남구만(南九萬)이 정승이 되었을 때에 임금에게 아뢰어 혁파하였기 때문에 민암이 이와 같이 청한 것이다. 민종도(閔宗道)가 말하기를,

"전 교관(敎官) 성대경(成大經)이 일찍이 상소하여 윤선도(尹善道)를 신구(伸救)하다가 정거(停擧)된 지 10년이 되고, 또 효행(孝行)이 있으니 조용(調用)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권대운이 이어서 말하니, 임금이 6품 관직에 서용(敍用)하라고 명하였다. 지평(持平) 이준(李浚)이 전에 아뢴 말을 거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고, 다만 허윤(許玧)은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推考)하라고 명하였다. 민암이 말하기를,

"송시열(宋時烈)의 지극히 흉하고 악함은 국문을 기다리지 아니하고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조종(祖宗)께서 나라를 세움이 인후(仁厚)하여 일찍이 대신을 국문하지 아니하였으니,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임금이 대신에게 물으니, 권대운이 말하기를,

"송시열의 죄범(罪犯)은 흉역(凶逆)하나, 나이가 80이 넘었으므로 국문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상께서 참작해 처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목내선김덕원의 말도 같았다. 우윤(右尹) 목창명(睦昌命)은 말하기를,

"신이 대각(臺閣)에 있을 때에 국문하기를 굳이 청하였으나 의논하는 이가 모두 잘못이라고 하니, 바로 처분을 내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의 말이 이와 같으니 참작하여 사사(賜死)하되, 금부 도사(禁府都事)가 갈 때에 만나는 곳에서 즉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이때 송시열제주(濟州)에서 나치(拿致)되어 돌아오는데 바다를 건너와서 중궁(中宮)을 이미 폐한 것과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가 간하다가 죽은 것을 듣고는, 드디어 먹지 아니하고 정읍현(井邑縣)에 이르러 사사(賜死)의 명을 받자, 이에 유소(遺疏) 두 본(本)을 초(草)하여 그 손자 송주석(宋疇錫)에게 주어 다른 날을 기다려 올리게 하고, 또 훈계하는 말을 써서 여러 자손에게 남겼다. 아들 송기태(宋基泰)가 말하기를,

"국가에서 형벌을 쓸 때 현일(弦日)380) 을 꺼리니, 마땅히 이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니, 송시열이 들어 주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내가 병이 심하여 잠시를 기다릴 수 없으니, 명을 받는 것을 늦출 수 없다."

하고는 드디어 조용히 죽음에 나아가니, 이때 나이가 83세이다.

송시열은 은진(恩津)사람인데 그 아버지는 송갑조(宋甲祚)이다. 일찍이 꿈에 공자(孔子)가 여러 제자를 거느리고 집에 이르는 것을 보고 송시열을 낳았기 때문에 소자(小字)를 성뢰(聖賚)라고 하였다. 천자(天資)가 엄의 강대(嚴毅剛大)하여 어려서부터 이미 성학(聖學)에 뜻을 두었고, 자라서는 김장생(金長生)에게 배웠다. 뜻이 독실하고 힘써 실천하여 더욱 채우고 밝힘을 가하니, 마침내 동방 이학(東方理學)의 적전(嫡傳)이 되었다. 대저 그 학문은 일체 주자(朱子)를 주(主)로 하였고, 동유(東儒)로는 이이(李珥)를 제일로 삼았다. 그 언행(言行)·어묵(語默)·출처(出處)·진퇴(進退)는 움직이면 주문(朱門)의 법을 따랐으며, 그 성취(成就)한 바에 대하여 논하면 그 높고 정밀하며 멀고 큼은 근세(近世)의 뭇선비들의 미칠 바가 아니다.

병자년381) 이후로 관구(冠屨)382) 가 무너진 것을 분하게 여겨 여러번 불러도 나아가지 아니하다가, 효종이 처음 정무(政務)를 볼 때 김상헌(金尙憲)·김집(金集), 여러 어진이와 더불어 조정에 나아갔다가 곧 돌아왔다. 효종이 큰 뜻을 가지고 송시열과 더불어 일을 함께 할 만한 것을 알고는, 김익희(金益熙)를 보내어 성의(聖意)를 비밀리에 유시(諭示)하니, 드디어 계합(契合)383) 이 융숭하고 중하여 선생이라고 일컬었으며, 특별히 독대(獨對)를 내리고 또 밤에 현종(顯宗)에게 명하여 친히 어찰(御札)을 전하게 하였다. 송시열이 감격하고 분발하여 스스로 춘추 대의(春秋大義)를 세웠는데, 효종의 승하(昇遐)하자 애통하고 사모하여 살고자 아니하는 것처럼 하였고, 효종재궁(梓宮)384)부판(付板)385) 을 썼으므로 유명(遺命)으로 자기의 상(喪)에도 부판을 쓰게 하고, 휘일(諱日)마다 어찰(御札)을 가지고 종일 통곡하였다.

이이(李珥)의 시대로부터 조정의 선비들 이미 사정(邪正)의 당(黨)으로 나뉘어졌는데, 김장생(金長生)은 매양 음양(陰陽)·선악[淑慝]의 분변에 조금도 가차가 없었고, 송시열에 이르러서는 더욱 세도(世道)를 스스로 맡아서 윤리(倫理)를 거스리고 인심을 허물어뜨리며 위험하고 간사한 자가 있는 것을 보면 반드시 마음을 수고롭게 하며 힘써 물리쳐서 원수와 원망이 세상에 넘치는 데 이르렀으나, 오히려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며, 적 윤휴의 무리에게 꺼리고 미워함을 가장 많이 입었다. 갑인년386) ·을묘년387) 의 화(禍)에 거의 죽게 되었다가 겨우 면하고, 경신년388) 경화(更化)에 거두어 서용하고 돈독히 부르는 명이 있자, 정자(程子)의 서감(西監)의 예(例)389) 에 의하여 잠시 들어갔다. 곧 국휼(國恤)을 만나니, 성모(聖母)390) 께서 언찰(諺札)로 간절하게 만류함으로써 몇 달 힘쓰다가 돌아갔다. 계해년391) 에 또 부르기를 더욱 돈독히 하니, 송시열이 효묘 세실(孝廟世室)의 논의가 한 번 조정에 발론되었으나, 미처 이루지 못함으로써 항상 한(恨)스러워하다가 이에 미쳐 명령에 응하여 맨 먼저 이를 건의하였다. 이때 박세채(朴世采)도 조정에 나아가니 조야(朝野)에서 좋은 정치가 있을 것을 생각하고 바랐는데, 이때 의논이 도리어 불화함을 품어서 참합(參合)392) 하고자 하기에 이르러, 을묘년의 흉당(凶黨)393) 과 더불어 같이 일하였으나, 송시열은 이미 일체 주자(朱子)의 가르침에 따라 마음으로 몹시 옳지 못하게 여겼으며, 수상(首相) 김수항(金壽恒)도 대대로 그 조부의 착함을 드러내고 악함을 징계하는[彰癉] 논의를 지켰다. 이 때문에 송시열과 더불어 뜻이 합하였으므로 당시의 무리가 김수항과 아울러 공격하여 훈척(勳戚)에게 편당을 한다고 지목하였는데, 송시열이 화(禍)을 입는 데 미쳐서는 이것도 죄를 얽는 한 단서가 되었다.

윤증(尹拯) 부자(父子)는 본래 윤휴(尹鑴)를 편들고 송시열과 어긋났는데, 윤증이 당시의 의논이 이와 같음을 보자, 갑자기 글을 보내어 송시열을 헐뜯고 배척하니, 당시의 무리가 이에 드디어 윤증을 도와서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 이에 이르러 윤휴·윤증의 무리가 두 감정을 번갈아 부채질하여 해기(駭氣)394) 가 더욱 벌어져서 드디어 극진한 화에 이르렀다. 송시열윤휴윤증을 배척할 때에 비록 송시열을 존중하는 자라고 하더라도 혹 너무 지나치다고 하였으나, 그 끝에 가서는 마침내 모두 송시열의 말과 같았으므로 세상에서 모두 그 선견(先見)에 탄복하였다. 임명(臨命)395) 때에 문인 권상하(權尙夏)의 손을 잡고 부탁하기를,

"학문은 마땅히 주자(朱子)를 주(主)로 할 것이며, 사업은 마땅히 효묘(孝廟)께서 하고자 하시던 뜻을 주로 삼을 것이다. 주자의 이른바, ‘함원인통 박부득이(含冤忍痛迫不得已)396) ’ 여덟 글자를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이 전수하여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또 말하기를,

"천지가 만물을 생(生)하는 소이와 성인(聖人)이 만사에 응하는 소이는 ‘직(直)’ 일 뿐이다. 공맹(孔孟) 이래로 서로 전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곧을 ‘직(直)’자인데 주 부자(朱夫子)가 문인에게 부탁한 것도 이에 벗어나지 아니한다."

하였다. 탐라(耽羅)에 갈 적에 일찍이 글을 지어 김장생(金長生)의 묘(墓)에 제사하여, 당인(黨人)이 화(禍)를 꾸민 전말(顚末)을 갖추어 진술하였고, 또 그 부모의 묘에 제사한 글에 그 평생의 출처(出處)를 두루 서술하였는데, 사실이 매우 상세하며 모두 유집(遺集)에 있다. 권상하가 그 화상(畫像)에 찬(贊)하기를,

"높고 높은 산악의 기상이요 넓고 넓은 하한(河漢)397) 의 마음이라. 미쁘도다. 뭇 선비의 학문을 모은 대성(大成)이오, 울연(蔚然)하게도 백세(百世)의 사종(師宗)이 되었도다. 한 몸으로 성인(聖人)의 길이 장차 막히려는 것을 열었고, 한 손으로 하늘의 기둥이 이미 쓰러지는 것을 받들었도다. 깊은 궁중에서 비밀히 협찬한 것은, 내가 그 무슨 계책임을 알지 못하겠고, 한가로이 있으면서 깊이 탄식하는 것은, 내가 그 무슨 포부임을 알지 못하겠도다. 아아, 도(道)가 커서 용납할 수 없으니, 내가 장차 고정(考亭)398) 을 버리고 누구를 따르겠는가?"

하였고, 김창협(金昌協)은 찬(贊)하기를,

"호걸 영웅의 자질(姿質)로써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공(功)이 있었고, 호연(浩然)의 기운을 가난한 집 가운데 모아서 우주(宇宙)에 채울 만하였으며, 지극히 중한 임무를 한 작은 몸으로 맡아서 화숭(華嵩)399) 의 높음과 겨룰 만하였도다. 나아가서 묘당(廟堂)에 올라 제왕의 스승이 되었으나 그 궁(窮)함을 보지 못하겠다. 굳굳한 지주(砥柱)400) 는 홍수 속에 우뚝하고, 늠름(凛凛)한 푸른 솔은 한 겨울에 빼어났다. 만일 억만년 뒤에 이 칠분(七分)401) 의 모습을 보더라도 3백 년 간기(間氣)402) 의 모인 바를 오히려 알 것이다."

하였다. 뒤에 억울함을 씻고 제문(祭文)을 내렸다.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이다.


  • 【태백산사고본】 23책 21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190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사급(賜給)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 인물(人物) / 군사-군정(軍政)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註 377]
    긍식(矜式) : 모범.
  • [註 378]
    이부(吏部) : 이조.
  • [註 379]
    천주(薦主) : 관원(官員)의 후보자(候補者)로 보증(保證) 추천한 사람. 추천되어 임관(任官)된 자가 만약 장오(贓汚)의 죄나 패상(敗常)의 죄를 범(犯)한 때에는 천주도 함께 그 죄에 연좌됨.
  • [註 380]
    현일(弦日) : 음력 7, 8일의 상현(上弦)과 22, 23일의 하현(下弦)을 가리킴.
  • [註 381]
    병자년 : 1636 인조 14년.
  • [註 382]
    관구(冠屨) : 의관 제도.
  • [註 383]
    계합(契合) : 뜻이 서로 맞음.
  • [註 384]
    재궁(梓宮) : 관(棺).
  • [註 385]
    부판(付板) : 판자를 붙인 것을 말함.
  • [註 386]
    갑인년 : 1674 숙종 즉위년.
  • [註 387]
    을묘년 : 1675 숙종 원년.
  • [註 388]
    경신년 : 1680 숙종 6년.
  • [註 389]
    예(例) : 정자는 송(宋)의 학자 정이(程頤). 정이가 휘종(徽宗) 원부(元符) 3년(1100)에 귀양지인 부주(涪州)로부터 돌아와서 서경 국자감(西京國子監)에 제수되자, 명을 받고는 곧 나아가 알현(謁見)하였음.
  • [註 390]
    성모(聖母) : 대비.
  • [註 391]
    계해년 : 1683 숙종 9년.
  • [註 392]
    참합(參合) : 섞이고 합함.
  • [註 393]
    흉당(凶黨) : 남인.
  • [註 394]
    해기(駭氣) : 화가 일어날 기미.
  • [註 395]
    임명(臨命) : 임종.
  • [註 396]
    함원인통 박부득이(含冤忍痛迫不得已) : 원통함을 품고 어찌할 수 없어서 한다는 말.
  • [註 397]
    하한(河漢) : 하늘의 내. 은하(銀河)를 말함.
  • [註 398]
    고정(考亭) : 주자.
  • [註 399]
    화숭(華嵩) : 화산과 숭산.
  • [註 400]
    지주(砥柱) : 하남성(河南省) 섬주(陝州)에서 동쪽으로 사십 리되는 황하(黃河)의 중류에 있는 주상(柱狀)의 돌. 위가 판판하여 숫돌 같으며, 격류(激流) 속에서 우뚝 솟아 꼼짝도 하지 않으므로, 난세(亂世)에 처하여 의연(毅然)히 절개를 지키는 선비의 비유로 쓰임.
  • [註 401]
    칠분(七分) : 화상.
  • [註 402]
    간기(間氣) : 천지의 기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