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졸기(卒記)

지돈녕부사 김창협의 졸기

추읍산 2018. 7. 23. 13:37

숙종실록 46권, 숙종 34년 4월 11일 정사 2번째기사 1708년 청 강희(康熙) 47년

지돈녕부사 김창협의 졸기


지돈녕부사(知敦寧府使) 김창협(金昌協)이 졸(卒)하였다. 김창협의 자(字)는 중화(仲和)로서,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의 둘째 아들이다. 천성이 온수(溫粹)하고 청결하여 한 점(點)의 더러운 세속의 기운이 없고, 문장(文章)은 농욱(醲郁)174) 을 모방하여 육일거사(六一居士)175) 의 정수(精髓)를 깊이 얻었다. 국조(國朝) 이래로 작자(作者)는 1, 2분[公]에 불과(不過)했는데, 김창협정립(鼎立)176) 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시(詩)도 역시 한(漢)·위(魏)를 출입하면서 소릉(少陵)177) 으로 보익(補翼)하였다. 고고(高古)178) 하고 아건(雅健)179) 하여, 천박한 문장을 일삼지 않았는데, 조금 후에 이것은 우리 선비[吾儒]가 끝까지 할 사업은 되지 못한다고 여겨 마침내 육경(六經)180) 에만 오로지 정진하여 염락 관민(濂洛關閩)의 학(學)181) 에 미쳐서 침함(浸涵)182) 하고 연이(演迤)183) 하여 침식(寢食)을 잊기까지 하니, 견해(見解)가 정확(精確)하고 공부(工夫)가 독실(篤實)하여 요즘의 변통성이 없는 선비에 비길 수 없었다. 주자서(朱子書)에 공력(功力)을 씀이 더욱 깊어, 송시열(宋時烈)《주문차의(朱文箚義)》를 저술할 때에 그의 말을 많이 인용하였다. 만년(晩年)에 의리(義理)가 꽉 막히고 사문(斯文)이 갈라지고 찢어지는 때를 당하매, 명의(名義)를 표정(表正)하고 사피(邪詖)함을 물리치는 것으로써 자기의 임무를 삼으니, 세도(世道)가 힘입어서 유지(維持)되어 울연(蔚然)히 유림(儒林)의 으뜸[宗]이 되었다. 종학(從學)하는 자가 매우 많았는데 훈회(訓誨)하기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후생(後生) 가운데 문사(文詞)를 바로잡을 자가 있으면 문득 이끌어서 학문(學問)에 나아가게 하였다. 젊어서 괴과(魁科)184) 에 올라, 명망이 한 시대를 굽어보았다. 법연(法筵)에 진강(進講)하니, 순부(淳夫)185) 처럼 삼매(三昧)186) 의 경지에 있다는 성예(聲譽)가 있었다. 더욱 군덕(君德)의 궐유(闕遺)에 권권(眷眷)187) 하고, 일을 만나면 규절(規切)188) 하여 임금의 노여움을 피(避)하지 않았다. 기사년189) 의 화(禍)를 만나자, 다시는 당세(當世)에 뜻을 두지 않았고, 경화(更化)190) 한 뒤에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궁산(窮山)에서 굶주림을 참아가면서 굳게 지조를 지키면서 한평생을 마쳤으니, 비록 지취(志趣)가 다른 자라도 또한 높이 우러러 공경하여 미치기 어렵다고 여겼다. 대개 그의 자품(資稟)의 순수함과 문장(文章)의 높음과 학술(學術)의 심오함을 논(論)하면, 모두가 남보다 뛰어났으니, 진실로 세상에 드문 홍유(鴻儒)191) 가 될 만하다고 하겠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58세이었다. 태학생(太學生)192) 들이 관(館)을 비우고 와서 전(奠)을 올렸고, 학자(學者)들이 그를 ‘농암 선생(農巖先生)’이라고 일컬었다. 문집(文集) 34권(卷)이 있어 세상에 행하여졌으며, 뒤에 문간(文簡)이란 시호(諡號)를 내려 주었다.


  • 【태백산사고본】 53책 46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294면
  • 【분류】
    인물(人物) / 사상-유학(儒學)

  • [註 174]
    농욱(醲郁) : 맛이 진함.
  • [註 175]
    육일거사(六一居士) : 송(宋)나라 문호(文豪) 구양수(歐陽修)의 호(號).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 문장이 농욱(醲郁)하다고 함.
  • [註 176]
    정립(鼎立) : 솥발과 같이 셋이 나누어 섬.
  • [註 177]
    소릉(少陵) : 당(唐)의 시인(詩人) 두보(杜甫)의 호.
  • [註 178]
    고고(高古) : 고상하고 옛 풍취가 있음.
  • [註 179]
    아건(雅健) : 필력(筆力)이 고상(高尙)하고 기운참.
  • [註 180]
    육경(六經) : 여섯 가지 경서(經書). 곧 《역경(易經)》·《서경(書經)》·《시경(詩經)》·《춘추(春秋)》·《예기(禮記)》·《악기(樂記)》. 《악기》 대신 《주례(周禮)》를 넣기도 함.
  • [註 181]
    염락 관민(濂洛關閩)의 학(學) : 송(宋)나라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호(程顥), 그 아우 정이(程頤),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희(朱熹)가 제창한 유학(儒學).
  • [註 182]
    침함(浸涵) : 학문에 젖어듦.
  • [註 183]
    연이(演迤) : 널리 행함.
  • [註 184]
    괴과(魁科) : 과거(科擧)에서 문과(文科)의 갑과(甲科)를 이르는 말.
  • [註 185]
    순부(淳夫) : 송(宋)나라 유학자 범조우(范祖禹)의 자(字). 평상시에는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지마는, 일을 만나면 시비(是非)를 분변하여 밝혔음.
  • [註 186]
    삼매(三昧) : 마음을 한 가지 일에 집중하여 일심 불란(一心不亂)함.
  • [註 187]
    권권(眷眷) : 잊지 않고 돌봄.
  • [註 188]
    규절(規切) : 경계하여 바로잡음.
  • [註 189]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 [註 190]
    경화(更化) : 갑술년의 정국 변동.
  • [註 191]
    홍유(鴻儒) : 대학자(大學者).
  • [註 192]
    태학생(太學生) :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

출처 : http://sillok.history.go.kr/id/ksa_13404011_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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