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졸기(卒記)

형조 참판 김양행의 졸기

추읍산 2018. 7. 23. 14:05

정조실록 8권, 정조 3년 11월 23일 계묘 2번째기사 1779년 청 건륭(乾隆) 44년

형조 참판 김양행의 졸기

  

형조 참판 김양행(金亮行)이 졸(卒)하였다. 김양행의 자(字)는 자정(子靜)이고, 호(號)는 지암(止庵)이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증손이다. 젊어서부터 경학(經學)에 힘쓰고 행실을 깨끗이 하였으며 고(故) 대사헌(大司憲) 민우수(閔遇洙)에게 수업하였다. 영종(英宗)무인년420) 에 학문에 독실하고 실천을 힘쓰는 것으로 천거되어 대직(臺職)에 제수하였으나 응소(應召)하지 않았다. 찬선(贊善) 송명흠(宋明欽)이 엄한 견책을 받았을 때에 상소하여 경계를 아뢰었는데, 영종이 노하여 면직하여 서인(庶人)이 되었다. 금상이 즉위하여 여러 번 불렀으나 병을 이유로 나오지 않았다. 기해년421) 에 임금이 영릉(寧陵)에 전알(展謁)하였을 때에 김양행여주(驪州)에 살았으므로 명을 받고 행전(行殿)에 들어와 뵙고 거가(車駕)가 돌아올 때에 따라서 조정에 나왔다가 곧 돌아갔다. 이때 홍국영(洪國榮)이 권세를 부리고 날뛰었으므로 금문(禁門)을 들어가는 자는 다 문안하였으나 김양행만은 돌아보지 않았는데, 임금이 늘 말하기를, ‘풍의(風儀)가 청고(淸高)한 것이 볼만하니 근세의 유자(儒者) 중에서 으뜸이라 하겠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하교하기를, ‘이미 초연(初筵) 때부터 노쇠하고 병든 줄 알기는 하였으나 문득 졸서하였다는 기별을 들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으니, 내가 애통하고 상심된다. 졸서를 슬퍼하고 돌보는 은전(恩典)은 상례(常例)와 같이 할 수 없다.’ 하고 상례의 치부(致賻) 이외에 고(故) 찬성 박필주(朴弼周)·고 집의 송능상(宋能相)에 견주어 재량하여 더 주라고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51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136면
  • 【분류】
    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 [註 420]
    무인년 : 1758 영조 34년.
  • [註 421]
    기해년 : 1779 정조 3년.      

출처 :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311023_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