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졸기(卒記)

세제 시강원 진선 김창흡의 졸기

추읍산 2018. 7. 23. 13:50

경종실록 6권, 경종 2년 2월 21일 병자 2번째기사 1722년 청 강희(康熙) 61년

세제 시강원 진선 김창흡의 졸기


세제 시강원(世弟侍講院) 진선(進善) 김창흡(金昌翕)이 졸(卒)하였다. 김창흡의 자(字)는 자익(子益)이고, 호(號)는 삼연(三淵)인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이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났고, 젊은 날 협기(俠氣)를 드날렸으며 약관(弱冠)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일찍이 장자(莊子)의 글을 읽다가 마음속에 황연(怳然)하게 깨달은 바가 있어 이때부터 세상일을 버리고는 산수(山水) 사이에 방랑하며 고악부(古樂府)의 시도(詩道)를 창도(唱導)하여 중흥조(中興祖)가 되었다. 또 선가(仙家)·불가(佛家)에 탐닉하여 오랫동안 스스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는데, 가화(家禍)를 당하자 비로소 그 형 김창협(金昌協)과 함께 학문에 종사하니, 그 견해가 때로 크게 뛰어났다. 만년에는 설악산(雪嶽山)에 들어가 거처를 정하고 《주역(周易)》을 읽었는데, 스스로 ‘정자(程子)·주자(朱子)가 이르른 곳이라면 또한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괴격(乖激)한 데 가까와 무릇 시론(時論)에 대하여 혹은 팔을 걷어붙이고 장서(長書)를 지어 당로(當路)를 알척(訐斥)067) 하되, 말이 걸핏하면 다른 사람들의 선조(先祖)를 범하여 자못 처사(處士)로서 의논을 함부로 한다는 이름을 얻었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많이 애석하게 여겼다. 조정에서 유일(遺逸)로 여러 차례 헌직(憲職)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 70세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6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99면
  • 【분류】
    인물(人物)

  • [註 067]
    알척(訐斥) : 흠을 들추어내어 배척함.      

출처 : http://sillok.history.go.kr/id/kta_10202021_002 



경종수정실록 3권, 경종 2년 2월 21일 병자 1번째기사 1722년 청 강희(康熙) 61년

처사 김창흡의 졸기



처사(處士) 김창흡(金昌翕)이 졸(卒)하였다. 김창흡의 자(字)는 자익(子益)인데, 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이다. 젊어서부터 지기(志氣)가 탁월하여 옛 가시(歌詩)를 즐겨 지었는데, 《시경(詩經)》 3백 편에서부터 아래로 성당(盛唐)011)이백(李白)·두보(杜甫)와 송(宋)나라·명(明)나라의 제가(諸家)에 이르기까지 절중(折中)하지 않은 것이 없어 우뚝하게 가시의 종장(宗匠)이 되었다. 음직(蔭職)으로 주부(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가화(家禍)012) 를 당하고서부터 상복(喪服)을 벗었어도 거적자리에서 자면서 주육(酒肉)을 먹지 않았는데, 갑술년013) 에 신복(伸復)되자 비로소 상식(常食)을 회복하였으나, 그래도 오히려 외침(外寢)에서 거처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성리학(性理學)을 즐겨 읽어서 만년(晩年)에 다시 깊고도 높은 조예(造詣)를 이룩했다. 설악산(雪嶽山) 아래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연신(筵臣)의 말에, ‘그의 높은 풍도(風度)와 절조(節操)는 넉넉히 나약(懦弱)한 사람에게 뜻을 확립시키고, 재리(財利)를 탐내는 자의 마음을 청렴하게 할 수 있다.’고 한 말이 있었다. 숙종(肅宗)이 임조(臨朝)하여 오랫동안 차탄(嗟歎)하던 끝에 여러 차례 집의·진선으로 승천(陞遷)시켰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동교(東郊)에서 졸하니, 나이 70세였다. 품질(品秩)을 정경(正卿)으로 추증(追贈)하고 시호(諡號)를 문강(文康)이라고 내렸다.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62면
  • 【분류】
    인물(人物)

  • [註 011]
    성당(盛唐) : 당나라 때 시문(詩文)의 전성기.
  • [註 012]
    가화(家禍) : 숙종 15년에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김수항(金壽恒)이 사사(賜死) 되었던 일.
  • [註 013]
    갑술년 : 1694 숙종 20년

출처 : http://sillok.history.go.kr/id/ktb_10202021_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