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중앙도서관에는 영안 부원군金祖淳 神道碑文도 보관되어 있었다. 모두 폰으로 찍어 여기 올린다. 전면은 보이지를 않아 아래 사진으로 대신한다.
출처 : 아래
풍고 묘소(2010, 6, 19)
신도비가 보관된 곳
비문이 아니라 신도비문이다
아래 빠진부분(붉은 글씨) 있어 넣는다.
御製 有明朝鮮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
春秋館觀象監事 世孫師行輔國崇祿大夫領敦寧
府事兼判義禁府事知 經筵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
奎章閣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永安府院君諡忠文
金公神道碑銘并序
忠文金公予外祖也歲己酉小子以 純元聖母命嗣有丕基上自
김조순신도비(金祖淳神道碑)
어제 유명 조선 증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손사 행 보국숭록대부 영돈령부사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규장각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 영안부원군 시 충문 김공 신도비명 병서
충문 김공은 나의 외조부이다. 기유년(헌종 15, 1849년)에 소자는 순원성모(순조비)의 명에 따라 왕위에 올라 대통을 잇게 되었다. 공은 위로는 조종의 심법으로부터 아래로는 민생의 편안함과 근심에 이르기까지 마땅히 알아두어야 할 일에 대하여 그때그때 빠짐없이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또한 나는 공의 나라를 위한 충성과 집에 있어서의 효행과 근신, 한 가지 언동과 한 가지 일에 이르기까지 아침저녁으로 모시는 사이에 보고 들어 공의 덕업에 대한 시종을 자세히 알 수가 있었다. 옛날 정종께서 재위하실 때 여러 어진 신하들이 대거 진출하여 밝고 화평한 정치를 기약하였음이 이때보다 더할 때가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성스러운 임금님의 특별히 빼어난 지우를 받아 왕께서 몸과 마음을 진실로 의지하고 마음속 깊은 신임으로 의탁하신 분은 오직 공뿐이었다. 또한 어린 세자의 보필을 부탁받아 이에 감격하여 밤낮으로 몸이 파리하도록 마음과 힘을 다하여 오직 왕실에만 마음을 써서 우리 순조의 30년 재위를 도와 오늘날까지 왕실에 복을 이어준 분도 역시 공 한사람뿐이다.
공의 휘는 조순이고 자는 사원이며 호는 풍고다. 김씨는 안동에서 계출하였으니 고려 태사 휘 선평이 시조이다. 조선조에 이르러 휘 상헌은 좌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공인데, 일찍이 척화를 주장하다가 심양에 구치되어 갔어도 굴하지 않고 대의를 천하에 밝혔다. 2대를 내려와 휘 수항이 있으니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충공이다. 이 분도 사림이 영수로서 기사년에 화를 입었고 이 분이 휘 창집을 낳으니 바로 영의정을 지낸 충헌공이다. 이 분은 경종께서 병이 잦자 세제 책봉을 결행타가 아들과 손자 3세가 임인사화에 죽었다. 증조의 휘는 제겸인데 벼슬은 승지에 이르렀고 후에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조부는 휘가 달행이니 좌찬성에 증직되었고, 부친의 휘는 이중이니 벼슬은 부사를 지냈고 후에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이 분의 첫 번째 부인은 평산 신씨로 목사를 지낸 휘 사적의 따님이고, 둘째 부인은 함평 이씨로 진사 휘 형옥의 따님인데 후에 모두 정경부인으로 추증되었다. 공은 첫째부인의 소생으로 영조 을유년(영조 41, 1765년) 8월 22일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머리가 빼어났으며 단정하고 장중하여 행동거지가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6,7세에 글을 배우는데 선생이 엄하게 다스리니 하루는 온데간데가 없었다. 집안 사람들이 사방으로 찾아보니 으슥한 곳에서 책 한권을 손에 들고 쉴사이 없이 읽고 있었으니, 이는 스스로 힘써 노력과 스승의 계발에서 나온 것이다. 이때부터 공부가 날로 진취하였다니 그 타고난 품성이 도를 가까이 함은 태어날때부터 벌써 이러하였다.
정조 을사년(정조 9, 1785년)에 문과에 급제하니 임금께서 불러보고 매우 기뻐하면서 “과연 문정(김상헌)을 닮은 손자로구나.”하셨다. 처음 휘는 낙순이었는데, 이때에 임금께서 지금 이름을 하사하셨다. 마침내 명을 내려 벼슬길에 나아가게 했는데, 매우 깊고 엄한 자리에 처하게 하여 학식과 덕이 뛰어난 선비로 대하였다. 만년에는 더욱 더 중하게 여겨 동궁께 유시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이야 말로 틀림없이 그릇된 도리로써 너를 보필하지는 않을 것이니 너는 스승으로 섬겨라.”라고 하였다.
경신년(정조 24, 1800년)에 순원왕후께서 세자빈의 간택에 응하여 겨우 재간을 마치자 정조께서 승하하시니 공은 애통해하고 몸 상한 것이 부모의 상을 당함과 같이하였다. 그 후 더욱 힘써 왕위를 이은 임금을 도와 선왕을 추모하면서 지금 임금을 지극한 충성으로 모시는 의리를 다하였다. 임술년(순조 2, 1802년)에 왕비를 맞아들이는 예를 올릴때 순조께서는 어린 나이였다. 미처 문묘를 배알하지 못하였었는데 혹자는 말하기를 “태묘(종묘)에 친향하기 전에는 석채(문묘의 배알)를 선행할 수는 없다.”하였다.
이에 공은 당시 재상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태묘에는 향사 이외에도 세시의 전배가 있지 않습니까? 성상께서는 아직껏 선사의 묘정을 알지 못합니다. 한나라 고조는 맨 먼저 공자에게 제사를 지냈으니 이는 실로 왕업의 기본입니다. 석채를 묘향보다 먼저 드린다하여 실례될 일은 없다고 봅니다.”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도 이 말을 옳게 여겨 청하여 행하게 되었다. 신사년(순조 21, 1821년)에 효의왕후(정조비)를 마땅히 건릉(정조의 능침)에 합부하여야 하겠지만 건릉은 처음 쓸때부터 물이 스미고 무너져내려 해마다 자주 수축을 하여야 했다. 공은 이점을 걱정하여 주문공이 영부릉을 의논한 고사를 인용하여 건릉은 천만년 영구히 도모하기 어려운 곳이라 말하고 천봉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현융원(사도세자의 묘소)의 오른쪽 언덕에 자리를 정하고 천봉하도록 하였다. 이 역사에 공은 두루 돌아다니면서 자리를 잡느라 수고가 많았지만 조금도 꺼려하지 않았다. 이는 공이 전례에 밝고 또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한 시대의 덕화를 밝히고자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미년(순조 11, 1811년)에 관서 지방에 토민의 난이 있어 경향이 시끄러웠으나 공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국가의 기밀사무를 관장하여 사태를 수습하고 안정을 되찾으니, 민심도 이를 믿고 두려워함이 없었다. 적이 평정되니 관찰사가 호포를 시행하려 하였다. 공은 “오늘날 관서지방의 급무는 민생을 넉넉하게 하고 민심을 진정시키는데 있는데 이런 일이란 치안이 완전히 회복이 된 뒤에 의논할 일이라.”하고 이해와 득실의 한계를 분명히 들어 조정에 건의하여 이것을 만류하도록 하니, 관찰사도 납득하고 이를 그만두었다. 이로써 관서지역이 평안하게 되었다.
이는 공이 이리저리 계책을 내고 임기응변으로 일을 융통성 있게 처리하는 것이 왕안석이 백성들을 제도한 국량보다도 더 뛰어난 예이다. 공은 의리를 지킴이 본래부터 엄준하였고 사물의 시말을 꿰뚫어 보았으며 원용하고 비유하고 계획하고 실행함이 실정에 맞지 않음이 없었다. 병인년의 대징토 때에 공은 재상과 집사자에게 서신을 보내 너그럽게 용서하도록 권하였으나 의론이 분분하였다. 공은 무고한 사람들이 관련됨을 깊이 걱정하여 여러 차례 조정에 건의하였으며 이로써 죄를 면한 자가 많았다. 대체로 공은 율곡이 조정의 의견을 조정하려고 한 노력을 본받아 이를 행하려고 하였으나 여러 논의들이 격앙하여 끝내 이룰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포용하여 서로 더불고 화평한 복을 기리고자 하였으니 이는 어찌 공께서 일을 처리하는 데만 그러하였겠는가? 이는 공의 도량이 넓어 모든 것을 용납하였기 때문이니 참으로 옛말에 이른바 지공무사한 대인이라 할 수 있겠다.
공은 좋은 일과 궂은 일을 함께하는 처지에서 몸은 나라의 안위를 짊어지고 명예와 지위와 지우를 받음이 저토록 높고 빛났어도 마음은 항상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가져 조정의 기밀에는 참견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금께서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자문을 구하였으며 이때는 즉시 봉서로 말씀을 올리고는 바로 초고를 없애버렸다. 매번 들어가서는 고하고 나와서는 순종하였고 모든 훌륭한 점은 모두 주상의 공으로 돌리니 공의 힘이 컸음을 세상에서는 알지 못하였다.
평소에 아들들을 가르칠 때에는 의로써 바로잡았다. 공이 현암의 시골집에 있을 때 둘째 아들의 문과 급제 소식을 듣고도 즐거운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도리어 서신을 보내 힘쓸 것을 격려하기를 매우 준절히 하니 사람들은 분수에 넘치는 일을 경계하는 공의 뜻을 알고 크게 감복하였다.
중년에 옥호에 작은 집을 짓고 때때로 쉬며 목욕하며 지냈는데 집이 매우 박루하여 항시 거처하는 방은 겨우 두간 넓이에 지나지 않아 손님이 오면 쉬어갈 수조차 없었다. 의복, 기명, 장식품 등은 애당초 마음에 두지를 않았고 오직 좌우에는 서적만이 있었을 뿐이다. 공의 담백함은 이와 같았다. 익종께서 동궁으로 계실 때 외조모를 위하여 탁지(호조)에 명하여 견평방 본 집에 당을 한 채 지어드렸다. 공은 그때에 여주 묘막에 있었는데 돌아와 보니 그 문이나 창이 모두 조각품으로 훌륭하게 장식되어 있음을 심히 불쾌하게 여겨 결국은 고쳐버렸다. 이는 공이 본디 검소함을 지켜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고 분수이외의 복은 누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안이 본래 가난하여 끼니를 이어가지 못하였고 귀하게 된 뒤에도 자산을 늘리는 데에는 마음이 없었으며 봉록의 여분마저 친척이나 친구에게 또 혹 소원한 사람에게까지 나누어 주었다.
문생이나 하인 등 조석으로 상대한 사람이 백명이 넘었어도 후하거나 박함이 없이 똑같이 대하여 각기 환심을 샀다. 이로 볼 때 공은 온화함과 돈후함이 쌓여 스스로 많은 복을 받게 된 것이다. 공의 인과 애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니 지금까지도 공을 칭찬해 마지않는 사람들이 많다. 경사와 제자백가를 널리 섭렵하여 그 뜻을 관통하였으며 글을 지으면 문장이 청건하고 준아하여 자연히 대가의 궤범을 이루었다. 시례를 익히고 성리학의 연원을 찾고 또 이를 진지하게 실천하였다. 속유와 천학들이 바라고 도달할 바가 아니었다.
벼슬길에 나아가 관직을 역임한 것은 공의 입장에서 볼 때 많다고는 할 수 없으나 모두 당세에서 가장 주요한 직책들이었다. 참외(종9품에서 종7품까지 벼슬)로는 설서, 검열, 대교, 홍문관 정자를 지냈고, 6품으로 올라서는 동학교수, 부교리 겸 지평, 장악원과 사복시의 정, 서장관, 장령 겸 직각, 응교를 지냈으며 통정으로 올라서는 동부승지, 형 · 병 · 이 · 예 · 공 5조의 참의와 대사간 겸 보덕을 지냈고, 가선으로 올라서는 병조와 예조의 참서, 동지춘추관사, 부총관, 총융사, 부제학, 장용사를 거쳐 병조판서, 지의금부사, 예문제학, 지경연 실록사를 지냈으며 정헌이 더해져서는 규장각제학, 형조 · 예조판서, 동지성균관사, 지돈령부사, 대제학, 지성균관사를 지냈고 숭정으로 올라서는 판의금부사, 금위영, 어영청, 훈련도감의 대장, 제학 선혜청 관상감 장용영 군기시 상의원 사재감 내의원 혜민서 종부시 내자시 사복시, 전설사의 제조를 역임하였다.
임술년(순조 2, 1802년) 가례를 마치고는 보국숭록대부에 올라 영안부원군에 봉하여지고 영돈령부사를 지냈다. 공은 만년에는 더욱 세상일은 물리치고 삼청동 소무속헌에서 한가하게 소일하면서 지냈다. 하루는 퇴청을 하고 집에 돌아와 담소하며 즐기기를 평일과 다름없이 하였는데 갑자기 병도 없이 이 세상을 마치니, 때는 임진년(순조 32, 1832년) 4월 기묘일이오 향년 68세이다. 부음을 듣고 임금께서는 매우 슬퍼하다가 마침내 큰 소리로 곡을 하며 애도하고는 조정과 저자의 문을 닫게하고, 조문하고 부의를 보내며 은졸(공신의 죽음에 임금이 애도의 뜻을 표함)에 예를 더하였다. 임금께서 친히 제문을 지어 제를 올리고 영의정에 증직하고 충문이란 시호를 내렸다. 계사년(순조 33, 1833년) 4월에는 정조 묘정에 배향하도록 명하셨다.
부인은 청양부부인 심씨로 정랑을 지낸 휘 건지의 따님이오, 이조판서 휘 택현의 증손녀이다. 품성이 조용하고 그윽하며 용모와 행실은 정숙하여 대혼(순원왕후혼사)을 치룬 후로는 집안이 빛을 보게 되었지만 늘 조심스럽게 처신하여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궁궐에 출입하지 아니하였다. 또 궁궐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곧 바로 나와서 말하기를 “외부 사람은 오래 머물러서는 아니된다.”고 하였다. 공도 일찍이 여자 선비로 허여하였다. 공보다도 4년 먼저 이 세상을 떠나시니 동궁께서 친히 사저에 나와 조상하였다. 임진년(순조 32, 1832년) 6월에 여주 효자리에 공을 장사지냈고, 병신년(헌종 2, 1836년)에 백석동으로 옮겼다가 신축년(헌종 7, 1841년)에 다시 이천 가좌동 임좌의 자리에 옮겨 부부인과 합장하였다.
맏아들은 유근이니 문과출신으로 판돈녕부사를 지냈는데 좌찬성에 증직된 용순의 후사로서 출계하였고, 다음은 원근이니 문과출신으로 참판을 지냈으며, 다음은 좌근이니 원임 영의정이다. 맏딸은 순원왕후요, 다음은 판관 남구순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지금 판서로 있는 이겸재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승지 이긍우에게 출가하였다. 서녀는 전 군수 이병익에게 출가하였다. 유근의 양자 병주는 지금 참판이오, 딸들은 전 참판 이인기, 현 목사 조장호, 판서 조병기에게 각각 출가하였으며, 서자 병도는 현재 군수로 재임중이다. 원근의 아들 병지는 전 승지요, 서자 병완은 전 군수이며, 병륙은 전 지평이오, 딸은 검서관 심의훈에게 출가하였다. 좌근의 양자 병기는 전 판돈녕부사이다. 순원왕후는 익종대왕을 탄생하시었고 딸은 세명을 두었는데 명온공주는 동령위 김현근에게 하가하였으며, 복온공주는 창녕위 김병주에게 하가하였고, 덕온공주는 남녕위 윤의선에게 하가하였다. 익종대왕은 헌종대왕을 낳으시고 헌종이 후사가 없어 소자가 들어와 대통을 물려받았다. 남구순의 아들 병철은 현재 판서로 재임중이요, 병길은 현재 참판이다. 딸들은 김병기, 조구희에게 출가하였다. 이겸재의 아들은 전 현감 승서, 현 현감 승위, 현 사과 승기, 승유, 현 승문 정자 승순이오, 딸은 진사 한장석에게 출가하였다. 이긍우의 아들은 현재 현령인 순익과 승지인 정익이다.
오호라! 지난날 내가 집안이 매우 가난하고 힘들었을때 집안을 지키고 몸을 보전하여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은 오로지 우리 순조와 순원왕후의 은덕이었다. 그 은덕 실로 끝이 없었으니 이 모두가 실은 공이 좌우에서 나를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공의 높은 사행은 이미 역사에 쓰여지고 솥과 제기에 새겨져 다시 더 찬송할 일은 없다. 다만 몸소 문자를 다루어 비에 새겨 묘를 드러내려고 한 것은, 소자가 겨우 임금의 복제를 마치고 현인을 추모하는 사모함이 깊어 성모의 은혜에 다하지못한 보답을 공에게 붙여 그 만의 하나라도 표장코저 하는 것이다. 명에 이른다.
장엄하고 위엄있는 충문은 정조의 충신이다.
독실함은 대대로 내려온 가풍이니 밝고 어질게 도왔도다.
몸과 마음을 의탁한 것은 임금께서 몸소 가리신 것이라네.
그리하여 감격하여 보답을 하고저 시종 두루 다스렸지.
바른 도를 잡는 엄함에는 정신과 의기가 바탕이었다네.
조금의 차착도 없이 패연히 원두를 찾아냈지.
공만 있고 사가 없으니 조정에서는 존경을 받았네.
관복과 홀로 자세를 바로하니 바라보면 엄하고 접하면 온화하였다네.
물욕을 누르는 덕량은 큰 산의 기운이었고,
발휘함이 빛남은 깊은 학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네.
요순의 법도로 삼아 다스리는 계획을 내고 임금을 보좌하였지.
강수와 한수로 씻고 가을 햇빛에 말린 것처럼 희고 빛났다네.
우리 순조는 오래 다스려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잘 이끌었다네.
공은 참으로 충순하여 있는 힘껏 몸을 바쳤다네.
옛날 뛰어난 신하들을 찾아봐도 누가 공과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겠는가?
공이 높아도 자긍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 가득할까 경계하였네.
삼청동 수석 좋은 곳에서 서적은 정연하였지.
군자는 수고로워도 겸손하여 거목은 큰 집을 지탱하였다네.
인에 젖게 하고 온화로 인도하여 나라의 운을 크게 이어나갔다네.
묘정에 배향됨은 아직도 남은 복이 많았기 때문이다.
슬프다! 직접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잃었으니 소자가 무엇을 알겠는가?
자세한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들으니 추모하는 뜻만 깊고 간절하네.
이를 어떻게 드날려 말하랴. 사실만을 골라 글을 엮는다.
나라가 길이 공의 힘을 입을 것이니 이 큰 비를 보라.
외손 숭록대부 행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 경연 춘추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경연일강관 규장각 제학 남병철은 왕교를 받들어 삼가 전을 하고 아울러 씀.
출처: http://gsm.nricp.go.kr/_third/user/search/KBD008.jsp?ksmno=865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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