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贊成公(達行) 가문

작은 못은 어느 곳에 있었을까?

추읍산 2018. 9. 17. 19:30



1942년에 완공된 향리 저수지 그 이전에는 50여 호 있었고 개울물이 가로질러 지금의 여수터(사진 우중간으로 작은 산 옆)로 빠져나갔다. 개울 위쪽(사진 좌)은 윗바께, 아래쪽은 아랫바께 라고 불리었다는데 바위 깔리고 절경이었다고 한다. 그곳 어느 곳에 작은 못이 있었을까?


小池


百步其周一丈深

魚兒作隊泳還沈

悠然飛入趨山影

日落林空更可心

 

 작은 못 


못 둘레가 백 걸음 깊이는 한 길인데 

물고기 떼를 지어 헤엄치다 또 잠기네.  
추읍산 그림자 아늑히 떠오르고 

해가 저문 빈숲에 다시 마음 만족하네.   


풍고(楓皐) 할아버지(金祖淳 1765-1832)께서 지금의 香里(그때는 여주 개군산면 香谷里)에 다녀가셨다고 백촌께서 알려왔다. 언제쯤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1821년에서 1826 년 사이라고 하였다. 둘래가 100보 깊이가 한 길이라고 했으니 그냥 연못이다. 물고기떼가 숨바꼭질하고 투영된 추읍산이 우람해 한동안 잠기셨고 시 한수를 남기셨는데 어느곳일까?


추읍산이 물속에 잘 투영되는 곳은 지금의 개군면 내 여러 곳이 있을수 있고 향리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곳은 공의 조부(諱 達行)와 백부(諱 履基) 그리고 부친(諱 履中)의 묘역이 조성된 곳이다(諱 履中은 1826년 이웃인 계전리로 이묘).


지금의 향리 저수지는 1942년에 완공되었고 필자가 태어나기 2년 전이다. 일제강점기 말로 여러 해의 공사기간을 걸쳤으리라. 어머님의 말씀에 따르면 옛날의 우리 집은 묘막(墓幕)으로 향리 164번지 물속이고 40칸 정도 된듯하다. 이 집을 뜯어 8대조 贊成公(諱 達行) 묘역 옆으로 22칸 축소하여 이건하였다. 이 집에서 필자는 1988년까지 있었다


저수지 안에는 50여 호 있었다고 한다. 마을 복판을 흐르는 개울은 추읍산에서 발원하여 주읍리와 향리 1반(윗 상골)을 거쳐 지금의 저수지인 마을 복판을 지나 여수터 쪽으로 빠져 나갔을 것이다. 다녀가신 연못은 그 개울가 어느 한 곳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세월이 지나면 흔적마저 지워지는가? 알 수 없지만 아래와 같이 생각하였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개울은 바위 깔리고 절경인 듯 그곳 물이 흐르다가 잠시 쉬어 가는 못의 형태를 갖춘 곳은 아닐까?


아니면 집 옆에 작은 못을 팠을까? 찬성공 묘역 앞의 샘터(지금은 물속), 펑펑 솟아 마을 사람의 주요 식수원이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물이 빠지면 드러난다. 솟구치는 물줄기가 힘차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마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곳 앞을 막아 만들어 놓은 작은 못 이 아니었을까? 찬성공 묘역 앞에 물이 있으면 좋다고 어머님은 지금의 향리 저수지를 가리키셨다.


풍고 할아버지(金祖淳)께서 여주 향곡(지금의 양평군 개군면 향리)에 다녀가신 기록은 김조순 신도비에도 나온다. 


『 - - - 익종(효명세자)께서 동궁으로 계실 때 외조모를 위하여 탁지(호조)에 명하여 견평방 본 집에 당을 한 채 지어드렸다. 공은 그때에 여주 묘막에 있었는데 돌아와 보니 그 문이나 창이 모두 조각품으로 훌륭하게 장식되어 있음을 심히 불쾌하게 여겨 결국은 고쳐버렸다. 이는 공이 본디 검소함을 지켜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고 분수 이외의 복은 누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안이 본래 가난하여 끼니를 이어가지 못하였고 귀하게 된 뒤에도 자산을 늘리는 데에는 마음이 없었으며 봉록의 여분마저 친척이나 친구에게 또 혹 소원한 사람에게까지 나누어 주었다. - - - 』


『 구전을 더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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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높고 쏟아지는 빛 가득해 알알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일주일 있으면 추석입니다. 조상님 계셔 나 있고 우리 있으니 뿌리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사랑 가득한 명절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