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庶尹公의 후예

장동김씨란?

추읍산 2019. 2. 17. 06:30

신라 말 고창(古昌 지금의 안동) 성주(城主)였으며 고려 개국의 결정적인 공헌을 하신 태사공(太師公 諱 宣平) 시조님 기초하신 뿌리는 12世에 와서 안동 소산에 거주하셨던 서윤공(庶尹公 諱 璠 1479 - 1544년, 자 : 文瑞)께서 오랜 세거지를 나와 악록유거[岳麓幽居  악록은 백악산(북악산)기슭, 유거는 속세를 떠나 깊숙하고 고요한 곳에 묻혀 외따로운 삶]하셨으니 그 사셨던 집을 무속헌(無俗軒)이라고 합니다. 백부이신 학조대사의 가리킴을 따른 이 길지(吉地)에 대한 이야기는 석실의 서윤공 묘역과 함께 식자(識者) 들에 의해 알려지고 있습니다.

 

『 기록에 의하면 북악의 모양이 목성이므로 그 기운을 받아 김씨가 왕성하기 위하여 삼금허증(三禽虛中)의 모양으로 지어서 주역의 이치에 맞추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후손이 번성하여 이른바 장동김씨(壯洞金氏)를 배출하였다는 것입니다. - 종로구지 하권 p966.』 이곳은 서윤공의 증손자인 15世 청음(諱 尙憲 1570 - 1652) 그리고 17世 손자대까지 사셨는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청음께서 석실로 옮기신 것은 만년(晩年)이 가까울 무렵이 아닐까요? 이 무속헌 터는 현재 종로구 궁정동 2번지로 로마 교황청 대사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앞서 학조대사께서는 또 한 곳의 터전을 잡아주셨는데 서윤공의 형님인 삼당공의 터전으로 손자 기보(諱 箕報) 대에 이르러 선원(諱 尙容 1561 - 1637)께서 인수받으시니 청풍계(淸風溪)라고 합니다. 이곳은 인왕산 아래 청운동 일부 계곡을 포함한 이름으로 충신 선원께서 사셨던 곳이라서 널리 알려졌는데 배경으로 겸제정선의 여러 그림이 남아있어 풍성하였던 그때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두 곳(무속헌과 청풍계)은 창의문(彰義門) 아래에 있어 사람들은 창의동 김씨라 하였는데 발음상 창의동은 장의동(壯義洞)으로 그리고 차츰 장동(壯洞)으로 되어 장동김씨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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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조대사의 지극한 문중사랑은 더하여 서윤공의 묏자리(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 5)까지 잡아주시니 옥호저수형(玉壺貯水形)이고 조선 8대명당중 으뜸으로 무속헌터와 함께 상서로운 기운이 하늘과 맞닿았습니다. 15世 문정공(文正公 諱 尙憲 1570-1652 호 : 淸陰) 형제 이후 300여 년, 역사 속의 장동김씨(壯洞金氏)를 생각합니다. 받은 보물 소중해 금관자 서 말, 옥관자 서 말, 잘 간직하고 갈고닦아 그 광채(光彩) 끝이 없으리이다.

 

돌이켜 보아 잘못은 깊은 성찰(省察)속 바로잡고 귀감(龜鑑)은 새기고 더욱 살려 대대손손 이어가겠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습니다. 힘을 모아 하나로 옛 영광을 뛰어넘는 집, 반석 위에 터를 닦고 있습니다. 잘 짓고 잘 짓세. 우리 집 잘 짓고자 미력이나마 온 힘을 다 하겠습니다.

 

 

학조대사는 서윤공의 큰 아버지이십니다.

 

조선시대에는 창의문 아래라서 창의동> 장의동> 줄여 장동으로 불렀단다. 오늘날 동서로 경복궁과 인왕산, 남북으로 창의문과 사직단 사이로 청운동, 궁정동을 주축으로 효자동, 신교동과 그 일대를 포함합니다.

 

종로구 궁정동 2번지는 학조대사께서 잡아준 서윤공의 집터로 무속헌으로 불리는데 무궁화 동산과는 지척이다. 현재는 주한 로마 교황청 대사관이 자리하고 있다. 대를 이은 청음 할아버지께서는 언제까지 계셨을까? 석실과 오가셨는데 곧은 뜻이 막히면 곧장 석실로 가서 머무르시기도 하셨다. 석실 정침에서 돌아가셨다고 청음연보는 적고 있다. 함께 계셨던 기록이 있는 손자 17세 휘 수항은 옥인동(육청헌, 청휘각)에서 사셨다는 기록이 있는데 언제쯤 일가?

 

 

 

daum 지도로 본 석실 분산(墳山)으로 좌측 아래가 서윤공 묘역이다.

 

 

서윤공 묘역

 

 

문충공(휘 상용)의 터전인 청풍계는 인왕산을 배경으로한 청운동 55에 있는데 그림에서의 붉은 점선 안이다(오월의 세상 이야기에서 사진 찍었다)

 

청풍계(淸風溪)는 무속헌과 더불어 장동김씨(壯洞金氏)를 떠받치는 한 축이다. 이곳은 청음의 형님인 문충공(諱 尙容 1561 - 1637)의 터전으로 알려졌는데 처음 서윤공의 어머니 강릉김씨를 위하여 학조대사가 잡아준 터라고 한다. 따라서 장남 삼당공 영(諱 瑛 1475 - 1528)의 터전으로 대를 이어왔는데 손자 기보(諱 箕報) 때에 안동 소산으로, 일부 후손들은 예안,·교하 등지로 이주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삼당공의 종증손 선원(諱 尙容)께서 인수받으셨습니다.

 

 

백악 산록에 있는 창의문(彰義門)은 장동김씨의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