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서인계 서원으로, 이어 노소론 분당 후에는 노론계, 그리고 노론 내에서 인물성(人物性) 논쟁으로 호론(湖論) 낙론(洛論)이 갈릴 때는 낙론의 진원지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 후기 사대부문화의 큰 특색인 진경문화(眞景文化)의 산실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겸재 정선의 석실서원
또한 영정조 연간의 탕평정국에서는 한때 조제(調劑) 탕평에 반대하는 의리론(義理論)의 본거지였으며, 국구(國舅) 김한구(金漢씄)와 결탁한 호론게의 정치세력에 대항하는 척신 홍봉한의 정치적 지지세력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김상헌의 직계 후손이 주축이 된 안동김씨 세도정권하에서는 집권명분을 정당화하는 정치도구가 되기도 하였다. 즉, 석실서원은 조선 후기 많은 서원 가운데서도 정치적 사상적 학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던 서원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실서원은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된 후 유적유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정확한 위치나 건물규모 및 배치 등에 관한 기본적인 것마져 없어지고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진 상태로 방치되고 있다.
이 방치된 석실서원을 고증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자료중의 하나가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중의 「석실서원도」이다. 「석실서원도」는 강 위에서 바라본 경치를 부감법(俯瞰法)으로 그린 것으로 석실서원 주변의 풍광이 묘사되어 있다. 겸재는 진경산수(眞景山水)의 대가로 사실적 기법을 사용하였으므로 이 그림을 정확히 분석하면 석실서원의 위치, 건물양식, 규모를 밝히는 데 크게 참고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경교명승첩은 정선이 64세 때인 1740년 겨울부터 1741년 초여름까지 그린 그림들을 하나의 화첩에 묶은 것이다. 상하 두 책으로 전해왔으며 현재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정선이 한강을 따라 그 주변의 풍경을 그린 것으로 경기 지역을 대상으로 그린 것은 「녹운탄(綠雲灘)」, 「독백탄(獨栢灘)」,「우천(牛川)」, 「석실서원(石室書院)」, 「삼주삼산각(三洲三山閣)」이 있다.
정선이 석실서원과 삼주삼산각을 그리게 된 것은 안동 김씨 일문과의 깊은 교분에서 연유한다. 그는 김창집의 도움으로 관로(官路)에 진출하였으며, 김수항의 여섯 아들인 ‘육창(六昌)’ 그 중에서도 특히 김창흡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창흡은 그 형인 김창협과 함께 진경문화의 배양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진경시문학의 이병연(李秉淵), 진경산수화의 정선(鄭敾), 인물풍속화의 조영석(趙榮빋) 같은 대가들이 모두 김창흡 형제들에게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자신들의 기예(技藝)를 성숙시켜 나갔던 것이다. 석실서원은 이들의 근거지의 하나이자 진경문화의 산실이었던 셈이다.
「석실서원도」는 석실서원을 추정 복원할 경우 가장 구체적인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그림 왼쪽의 미호(渼湖)는 화제이다. 미호는 석실서원 및 삼주삼산각과 미사리 사이의 호수처럼 보이는 한강을 지칭하는 것으로 동호(東湖)와 서호(西湖)와 함께 도성 부근의 경승으로 유명하다.
석실서원에 추배된 김원행의 아호인 ‘미호’도 추측컨대 여기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한다. 「석실서원도」에 나타난 좌측의 건물들이 석실서원이다. 이를 분석해 볼 때 석실서원은 전형적인 서원 형식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쪽에는 사우(祠宇)가 보이고 서재(西齋) 건물과 누정(樓亭)의 모습이 확연하다.
「석실서원도」를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중앙의 동산은 모장끝산으로 생각되며, 우측면에는 북두천이 흐르고 있다. 이 북두천은 원래 바위가 7개가 있어 칠성바위라고 호칭된 데서 붙여진 이름인데 현재는 홍유천이라고 불린다.
모장끝산의 능선 상단에 누정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 주변은 숲으로 둘러쌓여 있고 한강을 주망하기 좋은 장소이다. 전망이 대단히 아름다웠을 것으로 집작된다.
건물 규모는 정면이 2칸이고 측면은 불확실하지만 1칸 또는 1칸 반으로 추정된다. 건물 형태는 팔작지붕에 방 1칸과 누마루가 달린 복합누정이다. 서원의 별채로서 휴식공간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원의 중심건물들은 좌측면 토미재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3채의 건물이 보이는데 숲으로 가려져서 정확한 건물 수는 알 수 없다. 가장 위쪽의 건물은 사우(祠宇)이다. 규모는 짐작하기 어려우나 지붕의 형태는 맞배 양식을 취하였음이 확인된다. 이 건물의 장축은 동서선상으로 되어있다. 사우로 추정되는 건물과 직각에 놓여 있는 건물은 장축이 남북선상으로 되어 있으며 재실로 생각된다. 그림상으로는 서재(西齎)만이 확인 가능하나 숲에 가려진 부분에 동재(東齋)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재실은 팔작지붕 양식을 취하고 있다.
맨 아래 선물은 3칸으로 되어 있으며 벽이 없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어 누정으로 추측된다. 누정은 출입처로 사용되기도 하고 강당으로도 활용되나 이 경우 성격을 명확하게 규정할 수는 없다. 서원의 아래로는 10여호의 초가들이 그러져 있다. 이 건물들은 독립된 가호(家戶)라기 보다는 서원에 부속된 민가(民家)로 파악된다. 그것은 모든 가옥이 서원을 중심으로 설치된 장리(長籬) 속에 위치하고 있는 것에서도 추정이 가능하다. 서원 소속의 노비 또는 전호들의 거주지일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석실서원도」와 함께 서원의 규모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김원행의 문인 황윤석(黃胤錫)이 남긴 일기 『이재난고(쒨齋亂藁)』와 주민의 증언이다. 각종의 문헌 사료에서 사우(祠宇), 재실(齋室), 강당(講堂), 누정(樓亭) 건물과 연못, 영당(影堂)이 확인된다.
위 자료 및 주민 제보와 석실서원도의 분석을 종합하여 보면 석실서원 경내와 주변에는 다수의 건물과 시설이 영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원은 사우(祠宇)와 재실(齋室), 강당(講堂). 누정(樓亭), 고직사(庫直舍)를 온전히 갖춘 전형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었으며, 전정(前庭)에는 연당(淵塘)이 배치되고 있다. 서원 부근에는 영당이 있어 문충공(文忠公)김상용(金尙容)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 문강공(文康公) 김창흡(金昌翕)의 영정(影幀)을 모셨으며, 모장끝산에는 별도의 누정이 있어 별채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양주읍지』석실서원조의 기가를 보면 서원 소속의 원생(院生)이 20인이고 재직(齋直) 10인, 모군(募軍) 40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서원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주는 사료로 평가된다. 『양주읍지』의 간행시기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린 1868년(고종5년) 이후인 1871년 이어서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였는지 의문이 있지만 인원에 비례하여 다수의 건물군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상정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자료분석에 의거한 석실서원의 배치구조, 건물양식, 건물구조의 추정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서원유지가 완전히 교란된 현 상활에서는 간접적인 자료들이 서원의 형태와 규모를 근사하게나마 추정할 수 있는 유력한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새롭게 평가되어야 한다고 사료된다.
석실서원은 현재 터만 남아 방치된 상태이다. 당시 사용되었던 주춧돌은 사방에 흩어져 있거나 정원석으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이 지역은 경관이 좋아 카페가 들어서는 등 석실서원의 원형을 찾을 수 없어 아쉬움이 있다.
배향인물
1) 김상헌(金尙憲)
1570(선조 3)~ 1652(효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인조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淸西派)의 영수이며, 병자호란 때는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했다. 본관은 안동.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서간노인(西磵老人).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극효(克孝)이고, 형이 우의정 상용(尙容)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좌랑·부교리를 지내고, 1608년(광해군 즉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교리·응교·직제학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다. 1615년에 지은 〈공성왕후책봉고명사은전문 恭聖王后冊封誥命謝恩箋文〉이 왕의 뜻에 거슬려 파직되었다. 1624년(인조 2) 다시 등용되어 대사헌·대사성·대제학을 거쳐 육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예조판서로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다 인조가 항복하자 파직되었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났다. 귀국 뒤 좌의정·영돈녕부사 등을 지냈다.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북벌군의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불렸다.
글씨에도 능했으며, 특히 동기창체(董其昌體)를 잘 썼다. 저서에 〈청음집〉·〈야인담록 野人談錄〉·〈풍악문답 豊岳問答〉 등이 있다. 165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661년 효종 묘에 배향되고,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정주 봉명서원(鳳鳴書院), 의주 기충사(紀忠祠), 광주 현절사(顯節祠)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2) 김수항(金壽恒)
1629(인조 7)~ 1689(숙종 15). 조선 현종 때의 문신.
서인으로서 2차례의 예송(禮訟) 때 남인과 대립했으며, 뒤에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자 노론의 영수가 되었다.
본관은 안동.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 할아버지는 우의정 상헌(尙憲)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광찬(光燦)이다. 영의정 수흥(壽興)의 아우이다. 1651년(효종 8)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고, 1656년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했다. 정언·교리 등을 거쳐 이조정랑·대사간에 오르고 1659년(현종 즉위) 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입을 상복이 문제가 되었다. 그는 송시열과 함께 기년설(朞年說:1년)을 주장해 남인의 3년설을 누르고, 3년설을 주장한 윤선도(尹善道)를 탄핵하여 유배시켰다(제1차 예송). 그뒤 이조참판 등을 거쳐 좌의정을 지냈다. 1674년 효종비가 죽은 뒤 일어난 제2차 예송 때는 대공설(大功說:9개월)을 주장했으나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되었다. 1675년(숙종 1) 남인인 윤휴(尹鑴)·허적(許積)·허목(許穆) 등의 공격으로 관직을 빼앗기고 원주와 영암 등으로 쫓겨났다. 1680년 서인이 재집권하자 영의정이 되었고, 1681년 〈현종실록〉 편찬총재관을 지냈다. 서인이 남인에 대한 처벌문제로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으로 갈릴 때 노론의 영수로서 강력한 처벌을 주도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진도에 유배된 뒤 사약을 받았다. 저서로 〈문곡집〉과 〈송강행장 松江行狀〉이 있다.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영평 옥병서원(玉屛書院),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진도 봉암사(鳳巖祠), 영암 녹동서원(鹿洞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3) 민정중(閔鼎重)
1628(인조 6)~ 1692(숙종 1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 아버지는 관찰사 광훈(光勳)이며, 어머니는 이조판서 이광정(李光庭)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49년(효종 즉위)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성균관·사간원·홍문관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그뒤 동래부사·전라어사·충청어사 등을 지내고, 1659년 현종 즉위 뒤에는 대사헌·이조판서·한성부윤·의정부참찬 등을 역임했다. 1675년(숙종 1) 숙종이 허적(許積)·윤휴(尹鑴) 등 남인을 중용하자 이조판서로 있던 중 이들의 배척을 받아 장흥(長興)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자 귀양에서 풀려난 뒤 우의정·좌의정 등을 지냈다. 1689년 희빈장씨 소생문제로 일어난 기사환국에서 남인이 다시 득세하자 되자 벽동(碧潼)에 유배된 뒤 그곳에서 죽었다. 1694년 갑술환국 때 관작이 회복되었다. 현종의 묘정(廟庭) <div style="background: #ffffff; text-autos
배향되었으며,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벽동 구봉서원(九峯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노봉집〉·〈노봉연중설화 老峯筵中說話〉·〈임진유문 壬辰遺聞〉 등이 있고, 글씨에도 뛰어나 〈우상이완비 右相李浣碑〉·〈개심사대웅전편액 開心寺大雄殿扁額〉 등을 남겼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4) 이단상(李端相)
1628(인조 6)~ 1669(현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연안. 자는 유능(幼能), 호는 정관재(靜觀齋)·서호(西湖). 할아버지는 좌의정 정구(廷龜)이며, 아버지는 대제학 명한(明漢)이다. 1649년(인조 27)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설서·부수찬·교리·지제교 등을 지냈다. 1655년(효종 6)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청풍부사·응교를 거쳐 인천부사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양주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1664년(현종 5) 집의가 되었다가 입지권학(立志勸學)에 관한 상소를 올리고 사직했다. 1669년 부제학으로 서연관(書筵官)을 겸했으나 곧 사퇴했다. 응교로 있을 때 언론의 개방을 주장하고, 정여립(鄭汝立)에게 아부했던 정개청(鄭介淸)의 서원 향사(享祀)를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또한 자신의 6대조 이석형(李石亨)이 지은 〈대학연의집략 大學衍義輯略〉을 임금에게 권했다. 당시 교유가 있었던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을 등용할 것을 건의했으며, 호남 지방의 대동법 시행 문제에 대해서도 거론했다. 그의 문하에서 아들인 이희조(李喜朝)를 비롯하여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임영(林泳)·윤지선(尹趾善) 등의 학자가 배출되었다. 저서에 〈정관재집〉·〈대학집람 大學集覽〉·〈사례비요 四禮備要〉·〈성현통기 聖賢通紀〉 등이 있다.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인천 학산서원(鶴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뒤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5) 김창집(金昌集)
1648(인조 26)~ 1722(경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죽었다.
본관은 안동. 자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 좌의정 상헌(尙憲)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영의정 수항(壽恒)이고 어머니는 안정나씨(安定羅氏)이다. 창협(昌協)과 창흡(昌翕)의 형이다. 1672년(현종 13) 진사시에 합격하여 공조좌랑을 거친 뒤, 1684년(숙종 10)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정언·병조참의 등을 지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서인이었던 아버지가 남인의 명사를 마구 죽였다는 탄핵을 받아 진도로 유배되고, 이어 사사(賜死)되자 영평(永平)에 은둔했다.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축출된 뒤 복관되고 병조참의를 제수받았으나 사임했다. 그뒤 철원부사로 있을 때 큰 기근이 들고 도둑이 들끓어 민정이 소란하자 관군을 이끌고 이를 진압했다. 이어 호조·이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지돈녕부사·한성부판윤·우의정·좌의정을 지냈다. 1712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1717년 영의정이 되었다.
숙종 말년의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소론이 세자인 윤(昀:경종)을 지지하자, 그는 노론으로서 연잉군(延礽君:영조)을 지지했다. 결국 경종이 즉위했으나 경종이 자식이 없고 병이 많자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등과 함께 노론 4대신으로서 연잉군을 왕세제로 세울 것을 주장했다. 경종의 비 어씨(魚氏)와 아버지 어유구(魚有龜)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721년(경종 1) 8월에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10월에는 다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상소했다. 경종은 세제의 대리청정을 명했다가 환수하기를 반복했고, 그에 따라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날카로워져 갔다. 해에 사직(司直) 김일경(金一鏡) 등 소론에게 '왕권교체를 기도한 역모'를 꾸몄다고 탄핵을 받았다. 신임사화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노론의 권력기반은 무너지고, 그는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해 성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1724년 영조 즉위 후 관작이 복구되었다. 형제가 모두 성리학의 대가로 유명했고, 형제들의 학문적 경향이나 가학의 계통으로 보아 이이에서 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에 가까웠다. 관직에 있으면서 복제(服制)·과거·포폄(褒貶) 등에 관한 정책을 많이 건의하여 시행했다.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과천 사충서원(四忠書院),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거제 반곡서원(盤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 〈몽와집〉·〈오륜전비언해 五倫全備諺解〉·〈국조자경편 國朝自警編〉 등이 있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6) 김창협(金昌協)
1651(효종 2)~ 1708(숙&
6) 김창협(金昌協)
1651(효종 2)~ 1708(숙종 34). 조선 중기의 문신·문인.
고고하고 기상이 있는 문장을 썼고, 글씨도 잘 쓴 당대 문장가이다. 본관은 안동.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 당대 명문 출신으로 상헌(尙憲)의 증손자이며, 아버지 수항(壽恒)과 형 창집(昌集)이 모두 영의정을 지냈다. 육창(六昌)으로 불리는 여섯 형제 중에서 특히 창협의 문(文)과 동생 창흡(昌翕)의 시는 당대에 이미 명망이 높았다. 1669년(현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전시장원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사헌부지평·동부승지·대사성·대사간 등을 지냈다. 아버지 수항과 중부(仲父) 수흥(壽興)은 노론의 핵심인물이었는데, 그가 청풍부사로 있을 때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賜死)되자 벼슬을 버리고 영평(永平)에 숨어 살았다. 1694년 갑술옥사 후 아버지의 누명이 벗겨져 호조참의·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24세 때 송시열을 찾아가 소학(小學)에 대해 토론했고 이이의 학통을 이었으나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는 호론(湖論)의 입장을 취했다. 전아하고 순정한 문체를 추구한 고문가(古文家)로 전대의 누습한 문기(文氣)를 씻었다고 김택영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농암집〉·〈주자대전차의문목 朱子大全箚疑問目〉·〈오자수언 五子粹言〉·〈이가시선 二家詩選〉 등이 있고, 〈강도충렬록 江都忠烈錄〉·〈문곡연보 文谷年譜〉 등을 엮어 펴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7) 김창흡(金昌翕)
1653(효종 4)~ 1722(경종 2).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안동.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좌의정 상헌(尙憲)의 증손자이며, 영의정 수항(壽恒)의 셋째 아들이다. 김창집과 김창협의 동생이기도 하다. 형 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과거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부모의 명령으로 응시했고 1673년(현종 14) 진사시에 합격한 뒤로는 과거를 보지 않았다. 김석주(金錫胄)의 추천으로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나가지 않았고, 기사환국 때 아버지가 사약을 받고 죽자 은거했다. 〈장자〉와 사마천의 〈사기〉를 좋아하고 도(道)를 행하는 데 힘썼다. 1696년 서연관(書筵官), 1721년 집의(執義)가 되었다. 이듬해 영조가 세제(世弟)로 책봉되자 세제시강원(世弟侍講院)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신임사화로 외딴 섬에 유배된 형 창집이 사약을 받고 죽자, 그도 지병이 악화되어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삼연집〉·〈심양일기 瀋陽日記〉 등이 있다.
8) 김원행(金元行)
1702(숙종 28)~ 1772(영조 48). 조선 영조 때의 주자학자.
당시 호론(湖論)과 낙론(洛論)의 대립 속에서 낙론을 지지한 대표적 학자였다. 본관은 안동. 자는 백춘(伯春), 호는 미호(渼湖)·운루(雲樓). 아버지는 제겸(濟謙)이며, 당숙인 숭겸(崇謙)에게 입양되어 창협(昌協)의 손자가 되었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1719년(숙종 45)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1722년(경종 2) 신임사화 때 본가의 할아버지 창집(昌集), 생부 제겸, 친형인 성행(省行)·탄행(坦行)이 죽임을 당하자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1725년(영조 1) 창집 등 집안 사람들이 신원(伸寃)된 뒤에도 벼슬에 뜻을 버리고 시골에서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1740년 이후 수차례 벼슬에 임명되고 1759년에는 왕세손을 교육할 적임자로 영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후 산림(山林)으로 있으면서 박윤원(朴胤源)·오윤상(吳允常)·홍대용(洪大容) 등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당시 주자학계는 2대 조류인 낙론과 호론이 대립하고 있어서 이간(李柬)이 이재와 함께 낙론의 중심이 되고, 한원진(韓元震)이 호론의 중심이었다. 그는 낙론을 지지한 학자로서 김창협의 학설을 이어받아, 심(心)을 이(理)라고도 하지 않고 기(氣)라고도 하지 않으며, 이와 기의 중간에 처하여 이기(理氣)를 겸하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여겨,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의 절충적인 입장을 취했다. 저서에 〈미호집〉 20권 10책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9) 김이안(金履安
석식서원의 문화재 지정 논의
석실서원은 문화재 지정을 하여야 하나
왜 조선 교육 산실[朝鮮敎育産室] 이니까 ?
왜 조선 정신문화 충현[忠賢]의 보루[寶婁]이니까 ?
왜 우리 전통문화의 초석[礎石]이기도 하니까 ?
석실서원은 양주 도봉서원과 같이 조선 교육의 핵심이고 학문적 성과로 문화 발전 에 주요한 역할을 하였던 당위성[當爲性]이 있기 때문이다
한동민 중앙대 교수가 지적한 독일 괴테가 한 시인으로 명성을 날렸다면 다산 정약용은 조선 실용주의 민족 개혁적 사고와 정신적 실천 변화에 대혁명 이론을 전개하였다
즉 북학파가 제창한 경세치용 이용후생 바탕위에 농업사회개혁 정치적 변화 서양문화의 수용으로 조선후기에 엄청난 물결이 요동치고 말았다
정약용은 본래 1890년대 광주군 마제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에서태어나 외가인 고산 윤선도[尹善道] 집안이 있는석실[石室] 미음나루에 왕래하였다
석실서원[石室書院]은 조선후기 병자호란[1637년]을 격으면서 김상헌 선생은 조선백성이 국권과 국민의 자존심의 중요한 점을 일깨워 청나라에 대한 조선민족의 자존[自存]과자립 [自立] 정신[精神]문화를 일깨워 주었다
두형제 김상용 은 병호란때 충신으로 분사[焚死] 하여 충신의길을 걸었고 김상헌은 애국충정[愛國忠情]으로 충신의길을 걸었다 . 이 두사람은 조선시대 정신적 지주로 학자들은 숭모[崇慕]하였고 추앙을하였다. 그리고 양주 석실 [楊州石室]에 서원에 배향 하였다
석실서원이 건립하게 되었던 연유이다
양주석실은 자연환경이 안동에 있는 도산서원 과 산세가 수려함이 비슷하고 경치가 좋고 한성과 가까운 특징이다. 석실은 동 북서[東北西- 산으로 비냥산 도당재산 봉바위산 ]는 산[山]이고 남쪽은 앞으로 한 강물이 엣날이 지금도 변함 없이 흐른다 바로 동쪽에 조선시대 교통기관인 평구역[平丘驛]이있었다
석실서원은 조선 석학 이단상이 수제자를 교육하여 조선시대 학교로서 인재양성과 선현의 숭모적 목적을 가지고 200년간 조선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대표적 학자로 농암 김창협 민정중이 있다
석실서원은 남양주 시민과 더불어 안동김문 종중, 여흥민문 종중, 연안이씨종중
3개문중이 나서고 학자들이 나서고, 주민이 나서고, 우리문화 찾기 운동본부가 나서고 모두 나서야할 당위적 한국 전통문화 재현을 한는데 참뜻이 있읍니다
우리는 세계속에 한국을 외치고 있지만 한국은 자존과 국권이 먼저 필요한 정신적 문제가 요구되고 찾아야할 때임니다
우리민족을 사랑하고 조선문화정신을 사랑하고 선비정신을 갖고 조선 500년을 지키어온
정신은 바로 우리가 다시 배우고 알고 보존하여 나아가야할 점이라고봄니다
석실서원터에 석표 [石標]하나 세우고 살아온 세월이 너무도 한심한 현실을 직시할수있고 지방문화에 소홀한 정치지도자와 관계분야 학자들은 너무도 소홀하게 하였던
문화보존을 경시한 점을 그대로 좌시하기 어려운 점이기도 합니다
김상헌은 병자호란때 충신의 인물을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세로운 사고와 정신을 일깨워주고있다
한국은 김상헌 선생이 가르처준 [국권[國權] 민족 [民族] 자존[自存] 의정신이 오늘날 한국은 북한과 대치속에 일본,중국, 미국등과 소홀하게 볼수없는 정신적 무장도 중요한 점이 부각이 되고있지요
한국은 여러나라와 공존속에 북구강병을 위하여 살아 가야한다
오늘날 선현의정신을 잊고사는 안동 김문 종중후손들 선대공헌을 망각한 후손들 오늘날 점점 문란한 자유방종문화 ,사회질서 문란 ,정치기강 문란 ,가족사회 문란. 교육적타락 등 많은 문제점이 나타나다
지식층들은 너무도 허약한 미물로 나타나 과학적 사고와 정신에 노예화 되어있다, 물론 과학도 중요한 우주론적 첨단과학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더 인간 정신[人間精神]이 더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