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庶尹公의 후예

석실서원(石室書院) 그리고 미호(渼湖)

추읍산 2019. 6. 8. 09:33

아침 6시 덕소와 수석동의 강변길을 걸었다. 남녀노소 걷는 사람들 초저녁까지 이어진다. 자전거길 이웃하며 2 km를 걸으면 수석동의 석실 마을 느티나무 쉼터까지가 평상시 코스다.  내친김에 자전거길로만 허용되는 경사진 길을 따라 걸었다. 미움 나루터로 가는 산속이다. 능선에서 우측 산속으로 접어들었다.


숲 우거져 찌르르 짹짹 ~ ~ 산새소리 가득하다. 조말생 묘역에 이르렀다. 확 트인 시야 팔당댐을 넘쳐나온 물을 예봉산과 검단산이 에워싸는데 덕소와 수석동 그리고 건너 미사리 일대를 감싸고 흐르는 물을 이름하여 미호라는데 휘 원행 할아버지의 호가 미호니 아는 분들 얼마나 될까? 수석동의 산 정상에는 일찍이 백제의 토성이 있었던 곳이다. 한강의 요충지를 지키기 위한 백제의 투혼이 서린 곳으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을까?


흘러흘러 조선조 말 17 - 18 - 19세기 이곳 아래 강변 마을에는 석실서원이라고 있었다. 안동 김씨의 터전으로 직계 조상님(김상헌, 김수항, 김창집, 김조순)과 그 형제분들(김상용, 김창협, 김창흡, 김원행, 김이안) 그리고 민정중, 이단상의 정신이 깃들어져 있는 곳이다. 조선조 말 진경 문화를 꽃피웠고 북학파를 길러낸 곳으로 오늘날의 서울대학교를 떠 올리는 곳으로 전국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모여 공부하였다. 할아버지 농암( 휘 창협)의 맥을 이으신 미호 김원행(휘 元行) 할아버지 그 때 글 읽는 소리가 미호를 진동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미호께서는 이곳에서 배를 타시고 여주 선영을 오르내리셨단다.


7대조(위이기)이 신 어린 조카 3형제를 데리고 두미를 지나 두물머리에 이르러 양강(양근군을 흐르는 남한강으로 회현리에서 양수리까지), 여강(여주목을 흐르는 남한강으로 강천면에서 개군면 앙덕리까 지)으로 이어지는 물길은 그 때는 하나의 큰 교통수단이었다. 철 따라 달리하는 풍광은 물, 산새소리 들으며 노 저어 마주하고 권하며 지은 시 한 수가 전해온다. 개군면을 지나 대신면 양화나루까지 일 것이다.


어느해 봄날 그 날따라 추읍산 더 우뚝하고 세상을 품은듯해 잠시 멈추시고 어린 조카 형제(필자의 7대조 휘 이기, 휘 이중, 휘 이경)들을 데리고 향리까지 이르셨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곳 지금의 개군면 향리 128-3 에 이르러 여러해전에 돌아가신 동생[8대조 휘 달행(達行 1706 -1738)으로 대신면 초현리 선영에 뭍치셨다)의 이장 할곳으로 정하셨단다. 대신면 초현리 아랫새재마을까지 그 물길이 큰 교통수단이라고 들었다.


아랫새재라는 곳에는 미호(휘 원행) 할아버지의 조부이신 휘 창집, 부친 휘 제겸, 휘 성행의 일묘사충의 묘역이 있다. 미호 (휘 원행) 할아버지 께서는 차례대로 성묘하고 일찍 운명하신 동생 달행의 묘역도 살피셨으리라. 그리고 동생(휘 달행)의 이장을 개군면 향리로 정하시는데 세상에서는 12세 휘 번의 석실묘역 이후 길지로 손꼽힌다고 풍수가들이 찾고 있다.


 

 

미호(휘 원행) 할아버지는 물길 따라 여주를 오르내리셨다.


 경기도에서 세운 석실서원지


 흔적도 없이 석실서원 있었던 곳, 남양주시와 유림들이 나선지 오래지만 문중에서는 대답이 없다.


 

 남양주시에는 석실마을이 둘이 있다. 모두가 15世 청음 할아버지와 관련이 있다. 수석동의 석실마을 회관


 잠실의 롯데타워가 우뚝하다


 

두물머리에서 여주 방향


'안동 김씨 > 庶尹公의 후예'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상관  (0) 2019.06.15
느티나무 쉼터에서  (0) 2019.06.09
석실 분산(墳山)의 봄  (0) 2019.04.29
석실서원(石室書院)을 보는 세상의 눈   (0) 2019.04.06
석실 분산(墳山)의 단장  (0) 2019.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