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1820 - 1898) 이하응이 곤궁할 때 하옥 김좌근(金左根 1797 - 1869)에게서 여러 도움을 받밨음은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영 김병기(金炳冀 1818 - 1875)는 부친과 달리 흥선군을 미워하였다.
소산(小山) 김병주(1827 - 1887)는 하옥의 형님인 황산 김유근([黃山 金逌根 1785 - 1785-1840)의 아들인데 사영과 달리 흥선군에게 정답게 대하니 사영이 사촌 동생인 소산(김병주)에게 이르대 "자네도 딱한 사람이여, 그까짓 놈하고 벗이 무엇이여? " 하면 소산은 형님이 도리어 딱하오. 속담에 사(四)색 친구 오(五)색 벗이라우, 그 사람은 속이 툭 터진 사람이오." 하고 지냈었다.
그때는 담배를 좋아하여 점잖은 사람이 '평양일초'나 '성천초'는 쌈지에 못 넣어도 최하로 수원불경이. 담배를 쌈지에 넣어야 사랑 출입을 한다. 당시 흥선군은 집에 조석거리도 없는데 수원불경이. 담배 커녕 서울담배도 넣고 다니기가 어려웠다.
농담을 좋아하는 김병주가 좌석에서 대원군을 만나며 "여보게 시백(흥선군의 자)이 자네 담배 한 대 주게. 자네 담배는 무슨 담배인가?" 묻는다. 뱃심 좋은 대원군은 " 수원불경이지 무엇이여? " 하고 시꺼먼 서울박초를 꺼내준다.
이것을 받은 김병주는 얘, 수원불경이가 금방 없어졌구나! 정말 수원불경이를 먹어봐라." 하며 집으로 와서 수원담배 여러근을 보내주었다. 또 대원군이 옷이 추레하면 모시필도 보내주어 대원군도 없는 사정은 그에게 하러 왔다. 대원군이 세력을 잡은 뒤로 사영은 미워하여도 소산(김병주)은 평양감사도 시키고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도 시키고 이조판서도 시켰다.
출처 : 안동김씨 선세행록(안동김씨 대종중 편, 2019년 예문춘추관) p 198 - 199
김병주의 시호교지[1888년(고종 25)] 卒후 1년 6개월, 孝文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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