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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군면에서 고쳐야할 이모저모

추읍산 2021. 2. 18. 14:31

 맥결 이윤재  2020. 11. 25. 22:08

 

양평군 개군면, 역사 문화 컨텐츠 바로잡기

 

「양평역사문화연구회를 6년간 이끌어 오면서 관내 문화재, 유적, 역사적 인물의 평가나 묘지 탐방 등은 어느 정도 마무리했고, 개군면도 예외는 아니라고 여겼건만 올 가을 세바퀴 평생학습마을에서 주관한 ‘개군면 역사문화해설사 양성과정’ 강의를 일부 맡아 진행하면서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개군면은 1963년 이전까지 여주시 소속이였다는 이유로 깊이 있는 연구를 하지 못해 역사연구의 불모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역 역사와 문화를 거론하기 전에 우선 개군면의 지명부터 흥미를 끈다.

임진란 이전까지 개군에서 이름 있는 산은 추읍산과 파사산이었고, 동리 이름은 釡洞(부동), 香洞(향동), 祭田(계전), 貢稅洞(공세동), 鳥三(조삼) 등이 문헌에 나타나 있으며 포구는 紫浦(자포), 龜尾浦(구미포),仰德浦(앙덕포)가 기록에 있다. 그 후 구미포가 구미리로 앙덕포는 앙덕리로 자포는 상자포리와 하자포리로 바뀌였다. 이어 注邑里(주읍리), 石墻里(석장리), 自煙里(자연리), 佛谷里(불곡리), 內洞(내동)이 생겨나고 介軍山(개군산)이 작명되더니 면 이름이 개군산면으로 정해졌다. 그 과정에서 鳥三(조삼)이 새세미란 이름으로 석장리에 흡수되었고, 신은천시장(神恩川市場)의 장시는 하자포리로 옮겨졌다.

그런데 그 개군산은 어떤 계기로 생겨난 지명일까?

전쟁의 산물이다. 전쟁은 문헌에 의하면 임진왜란일 가능성이 높은데, 임진왜란 때 구미포 뒷산에 숨어 있던 왜군을 원호장군이 무찔렀다는 기록이 있고, 그 후 아군이 주둔해 있어 介軍山(개군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하자포의 또 다른 이름이 자진게인데 이 또한 구미포에 중군이 있었고 하자포구에 좌군진영이 있어 좌진개였다가 자진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 지명유래와 관련된 몇 가지 오류와 상당한 역사적 가치가 있음에도 저평가되어 오늘 날 잊혀진 사적과 사료 등을 몇가지 밝혀 보기로 한다.

 

1. 주읍리 산수유 마을 유래

 

주읍리는 추읍산(趨揖山) 남쪽 아래 마을로 추읍산이 주읍(注邑)으로 변화되면서 생겨난 마을이다. 이 마을은 수백년 묵은 산수유나무들이 종자목이 되어 크고 작은 산수유나무 군(群)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오래된 산수유나무군을 이루고 있는 마을이 전국에서 구례 계척마을, 이천 백사마을과 함께 양평 개군면 주읍리내리 산수유마을이 전국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주읍리에 산수유나무가 자라기 시작한 유래는 조선 제 7대 임금인 세조가 나무를 하사하여 심었다는 설과 이 마을에 가장 앞서 입향한 양성이씨 입향조가 심었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최근 개군면에서는 마을 입구와 종자목 앞에 ‘추읍산 샘물 전설’을 산수유 유래와 접목해 「여주 북성산에 세종대왕 능을 조성할 때 물이 나와 어느 노승이 멀리 추읍산 중턱을 파보라 해서 파 보았더니 샘이 나왔고 능 터에는 물이 끊겼다는 얘기와 이를 기특하게 여긴 세조가 산수유나무를 하사했다」는 전설을 써 놓았다. 그런데 이는 역사지식을 조금이라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엉터리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세종대왕 능은 처음에는 서울 내곡동에 모셨다가 조선 제8대 임금 예종 때 천릉한 것이고 예종은 1년 밖에 재위하지 못했고 다음 임금은 성종이기 때문이다. 왕이 하사했다는 상징성과 추읍산에 얽힌 전설을 무리하게 접목시키다보니 오류가 생겼다. 이럴 바에는 오히려 이 마을에 가장 먼저 입향한 인물이 성종조 때 회덕현감을 역임한 이성생(李成生)이므로 양성이씨 입향조가 남쪽에서 가져와 심었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철저한 고증과 역사적 시대 인식을 검증하여 다시 정립해야 할 것이다.

 

2. 앙덕리 마을 유래

 

양평군지(楊平郡誌)나 인터넷 카페 ‘아름다운 양평’ 등의 양평군 각 마을별 유래에 보면 앙덕리(仰德里)는 ‘먼 예전에 안동김씨 효문공(孝文公)이 낙향(落鄕) 은둔하여 지역 백성들에게 선정(善)을 베풀어 주민 모두가 그의 인격에 추앙심을 지녔다는 데서 앙덕이라 연유된 지명’이라고 하고 앙덕나루는 남한강 앙덕포구에서 여주군 산북면 용담리로 건너다니던 나루라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김병주(金炳㴤)를 검색해 보니 19세기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이 안동(安東)이고, 호는 소산(小山),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1851년(철종 2)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고, 규장각 직제학을 역임했다고 한다. 그런데 1888년 12월 18일 여주 앙덕(仰德)에서 연시(延諡)를 거행하였다는 기록이 실록에 전한다.

이를 ‘거제통영오늘신문’에서 곡구 정종한 선생의 시를 소개하면서 주(注)를 달았는데 역사적 사실을 잘 못 이해해 효문공 김병주 때문에 앙덕이란 지명이 생겼다는 우를 범했다. 그리고 양평에서 누군가 그 신문 기사를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269년 앞서 영의정을 역임한 오리 이원익 대감이 1619년 5월, 73세의 나이로 여강(驪江)의 앙덕(仰德)에 만거(寓居)했다는 기록이 있다.

옥담 이응희의 시문집인 옥담유고(玉潭遺稿)에도 여강 앙덕촌을 지나며 이원익을 그리며 지은 시가 있다.

 

여주 고을에 별세계가 있으니 / 驪鄕有別區

그 지역 경치가 맑고 땅이 외지다 / 厥區淸且僻

앞으로는 큰 강물을 굽어보고 / 前臨大江水

뒤에는 긴 송백이 서 있구나 / 後有長松栢

일찍이 듣건대 이 상공이 / 曾聞李相公

죄를 받아 이곳에 와 살았는데 / 被譴來栖息

풍광은 비록 참으로 아름다우나 / 風光縱信美

칩거하며 문 밖을 나오지 않았으며 / 杜門身不出

물고기가 있어도 낚시하지 않고 / 有魚不曾釣

나물이 있어도 뜯지를 않았다지 / 有菜不曾掇

반정으로 나라가 새롭게 바뀌어 / 周邦命維新

성스러운 임금께서 등극하시니 / 聖辟臨寰宇

강호에서 와룡을 일으키니 / 江湖起臥龍

조서가 와서 옛 사람 구했지 / 鳳詔來求舊

붉은 신발로 돌아가 침착하시니 / 赤舃歸几几

황각의 자리에 꼭 맞는 분이었지 / 黃閣且其人

만년에 경사 있음을 기뻐하니 / 暮生喜有慶

팔방이 다 같이 태평의 기운이어라 / 八方同一春

그런데 나는 맡은 일이 있어서 / 而我有幹事

양월에 상류 쪽으로 돌아가노니 / 陽月歸上游

조각배로 푸른 물결 거슬러 올라 / 扁舟泝碧流

저물녘 강가에 배를 정박하노라 / 晩泊江之洲

상공이 살던 집 손으로 가리키니 / 指點相公宅

숲 저편에 몇 칸 초가집이어라 / 林邊數間屋

이 분은 검소한 덕이 있으니 / 斯人有儉德

그 정치가 필시 훌륭하리라 / 其政必不息

지금 내가 와서 덕을 우러르니 / 今我來仰德

마을 이름 헛되이 얻은 게 아닐세 / 村名不虛得

 

여기에서 마지막 련에 앙덕이란 지명이 생겼다는 암시가 있다.

그리고 다산 시문집 제7권 귀전시초(歸田詩草)에 백씨와 함께 조그마한 배를 타고 마제에서 충주로 가면서 강행 절구시를 본받아 지은 시에

 

앙덕 마을은 모양이 조그마한데 / 仰德村容小

어부의 집이 물 마주해 환하여라 / 漁家對水明

이곳 지명이 널리 알려진 것은 / 地名轟萬口

이완평이 은거했기 때문이라오 / 曾臥李完平

 

이런 여러 정황들을 살펴볼 때 앙덕이란 지명은 오리대감 이원익의 덕을 칭송하여 얻은 지명이 분명하다. 그리고 앙덕나루를 건너면 금사면 전북리이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월리가 있는데 멀리 떨어진 산북면 용담리를 거명한 것은 현장을 가보지도 않고 책상에서 쓴 앙덕나루에 대한 설명인 것 같다.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3. 노직(盧稷) 선생 묘소 방치 문제

 

정유재란 때 훈련도감(訓鍊都監)으로 경강 주사대장(京江舟師大將)을 겸직하고 광해군 때 오늘날 문화관광부장관, 법무부장관,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예조, 형조, 병조 판서를 역임한 개군 출신의 노직盧稷) 선생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방치하고 있다. 같은 면내 공세리에 있는 이순몽 장군 묘소를 경기도 기념물 제92호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순몽 장군은 묘소가 개군면에 위치해 있다는 것 외에 양평군이나 여주시와 아무런 연고가 없다.

본관이 교하(交河)인 노직선생은 개군면 향동(香洞) 출신이다. 현감 노홍우(盧弘祐)와 안동인 대사헌 김희수의 따님 사이에 4남으로 태어나 1570년(선조 3) 생원이 되고 1584년 가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뽑혀 들어갔다가 곧바로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갔다.

1597년에 서애(西厓) 유성룡이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체찰사(體察使)를 겸임할 적에 공을 자벽(自辟)하여 부체찰사로 삼고는 함께 군국(軍國)의 일에 대해서 모의하였는데, 시의(時議)가 숙달되었다고 칭찬하였다. 이 무렵 훈련도감 당상(訓鍊都監堂上)으로서 경강 주사대장(京江舟師大將)을 겸임하였다.

1601년에 황해 감사가 되었는데 백성들이 서로 비석을 세워 기리는 노래를 부르면서 추모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1603년(선조 36) 봄에 군문(軍門)에서 고생한 공로로 품계가 자헌대부로 올랐다. 그리고 2월에 의정부 우참찬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에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4월에 병조 판서로 옮겨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겸임하였다. 1604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있다가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1607년에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또다시 병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1614년 광해군 6)에 다시 형조 판서가 되었다. 1615년 판중추부사로서 다시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한결같이 폐단을 제거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으므로 백성들이 그 덕을 많이 보았다.

1618년 12월에 74세를 일기로 돌아갔는데 다음 해 2월에 개군산(介軍山) 향동(香洞)에 있는 유향(酉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바로 선영이 있는 곳이다.

최립(崔岦:1539~1612)의 시문집인 간이집(簡易集) 제6권 난후록(亂後錄)에

노직이 주문사(奏聞使) 겸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가는 것을 전송하며 읇은 시가 있다.

 

삼천리 강산 바깥으로 길 떠난다 말을 마오 / 莫道三千里外程

한 집안처럼 여기는 정성 우리 임금님 돈독하니 / 吾王自篤一家誠

당초 엄선(嚴選)되신 것은 위급함 고하려 함이오만 / 初因告急須高選

다시 들린 화재 소식 이 역시 중한 사행(使行)이오 / 復爲聞災亦重行

일천 년 뒤 학이 찾은 오래된 성곽 지나 / 鶴已千年猶古郭

오색 구름 머무는 곳 거기가 바로 황도(皇都)라오 / 雲常五色卽神京

평양이라 진창길은 붙들어 줘야만 할 터인데 / 平陽淖路扶持力

나의 아우 율이 응당 형처럼 모시고 가리이다 / 阿嵂還應似事兄

 

개군면뿐만 아니라 양평군에서도 이 정도 큰 인물이라면 기념물로 지정해야 할 텐데 후손들에게만 맡겨놓다 보니 상석과 문인석 등은 도난당하고 묘소와 비석만 남아 있다. 그러나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역임한 문장공(文莊公) 정경세 선생이 쓴 묘표와 명필로 쓴 비석 자체만으로도 문화재 가치는 높다. 양평의 역사적 인물로 추천하고 묘소도 기념물로 지정할 것을 제언한다.

 

4. 개군초등학교 전신 「광명학교」에 대하여

 

양평관내에서 가장 앞서 개교한 양평초등학교가 지난 2011년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동교는 동문회 주관으로 학교 100년사를 펴낸 바 있는데 100년사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학교 설립이 11년이나 앞섰다는 걸 밝혔다. 교사(校舍)를 만든 해는 1900년이었으나 교사(敎師) 발령기사는 1902년부터 밝혀져 설립된 해를 1902년으로 정정하고 교육지원청에도 보고했다. 9년이나 앞당긴 것이다.

개군초등학교도 학교 연혁에는 1929년 5월 3일 개군보통학교로 인가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1921년 7월 22일자 동아일보에 「여주 개군산면 광명의숙(光明義塾) 설립」이란 기사가 실려 있다. 기사내용은

『여주군 개군면내 유지 인사 등은 금년 3월 면내 서당 전부를 해산하고 6백여 원의

비용으로 10여 칸의 교실을 신축하고 사립 광명의숙이라 칭하여 교사 2명을 초빙하여 보통학교 학과를 교수하는데 전임교사는 원필희(元弼喜), 조규선(曺圭善) 兩氏이며

현재 학생수는 90여 명인바 본 의숙 설립에 대하여 특히 기부인사의 의연금은 다음과 같다. 오순근(吳舜根) 150원, 최인옥(崔仁玉) 100원, 김익진(金翼鎭) 김인식(金寅植) 각 50원, 박기종(朴基宗) 20원, 이오승 54원 등이다.』

사립과 공립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8년 전에 면내 서당을 모두 폐지하고 신학문을 가르치겠다고 유지들이 세운 학교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일제에 의해 인가된 공립보통학교를 정통으로 인정하는 것은 다시 재고할 여지가 있다.

더구나 확인할 결과 기부인사 중 김인식(金寅植)님은 1873년생으로 구미리 2통 8호에 살았었고 박기종(朴基宗)님은 1877년생으로 하자포리 1통 1호에 살았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교사인 원필희(1896~1968), 조규선 선생도 신원이 밝혀졌는데, 이 분들은 여주 북내면 출신으로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다. 이 중 원필희 선생은 북내면 장암리 출신으로 경성농업학교 학생 신분으로 1919년 4월 2일 당우리에 있는 공북학교에서 8백여 명의 군중을 선도하며 시위를 주도하여 1년을 넘게 옥살이를 하여 그 후유증이 심했음에도 1921년 개군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셨다. 조규선 선생도 신륵사 인근 백사장에서 1919년 4월 3일 신륵사 주지 영봉스님(속명 김용식)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옥살이를 하셨다고 전한다.

이렇게 훌륭한 분들이 학생들을 가르쳤고 유지들이 뜻을 모아 학교를 설립하여 일제 암흑시기 개군면내 신학문을 전파했던 기록이 있는데 이를 모른 체 외면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제언하건대 개군초등학교 관계자 분들과 동문 여러분들께서는 개군초등학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광명의숙의 역사를 밝혀 ‘개군 교육사’에 편입시켰으면 한다.

그 밖에도 1800년 오늘날 신내라 하는 신은천(新恩川)가에 오일장이 섰고, 파사성이 고대 페르시아제국과 관련이 있다는 새로운 학설이 그동안 향토사에 무관심했던 개군면 사람들을 더욱 역사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하고 있다.

이윤재(양평역사문화연구회장)

 

[출처] 개군면에서 고쳐야할 이모저모|작성자 맥결 이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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