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일묘사충(一廟四忠)

일묘사충유교(一廟四忠遺敎), 발문(跋文)을 쓰다

추읍산 2019. 11. 14. 08:34

 

 

발문(跋文)

 

현 안동김씨 대종중 회장님이시며 본 일묘사충유교((一廟四忠遺敎)를  편역하신 김위현 님과는 같은 공간에서 3년여 함께 일한 적이 있습니다. 2014년 어느 날, 일묘사충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저의 어머님께서 필사하신 김제겸(諱 濟謙 1680 ~ 1722, : 竹醉, 시호 : 忠愍)의 임인유교와 회장님께서 갖고 계신 같은 책을 열람하게 되었는데 필사하신 분만 다를 뿐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회장님께서는 기사환국(1689)과 이어지는 신임사화(1721 ~ 1722)로 화()를 입으신 김수항(諱 壽恒 1629 ~ 1689, 文谷, 시호 : 文忠) 이하 4대의 한글로 된 기록을 갖고 계셨는데 알아보기 쉽도록 현대어로 번역해 세상에 펼치시려는 높은 뜻을 갖고 계셨고 그 첫 번째 결실이 2015년 발간한 기사유교(己巳遺敎)입니다. 이어 이번에는 문곡 이하 4대의 걸친 피눈물의 흔적을 통합하여 편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필사본이고 극히 일부에서만 전해져 회장님께서 갖고 계시는 소장본이 유일할 것 같은 느낌입니다.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높으신 열정이 많은 시간 동안 탐구를 집중하게 하였고 영원히 뭍쳐 버릴 위기에서 구하셨습니다. 이로써 알려지지 아니한 17 - 18세기 사화(士禍)의 한 이면(裏面)을 알게 되고 진실로 한걸음 더 다가가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본 책이 나오기까지 온 힘을 다하신 김위현 회장님! 사랑합니다. 건강 속 아름답고 좋은 일이 뜻한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간추린 일묘사충(一廟四忠)

1689(숙종 15) 있었던 기사환국으로 문곡 김수항은 사약을 받습니다. 이로부터 33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1721년과 1722년에 걸친 신임사화라는 피바람이 불었습니다. 1722(경종 2) 김수항을 기점으로 하는 종통(宗統)으로 아들 김창집(諱 昌集 1648 ~ 1722, : 夢窩, 시호 : 忠獻) 손자 김제겸도 사약을 받았습니다. 이때 증손자 김성행(諱 省行, 1696 ~ 1722, : 翠柏軒, 시호 : 忠正)은 누명을 쓰고 고문으로 운명하십니다. 4대에 걸쳐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충성을 다한 이 슬픈 문중의 역사는 후에 나라로부터 모두 복권되고 명부조(命不祧), 일묘사충(一廟四忠), 4대 불천지위(四代 不遷之位), 4대 충신(四代忠臣)이라는 크나큰 영광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가리켜주는 큰 교훈으로 다가옵니다.

 

기사유교(1689년 김수항)와 임인유교(1722년 김창집, 김제겸, 김성행) 한글본은 4대에 걸친 죽음에 이르는 피눈물을 곁에서 보고 듣고 적은 문충공 문곡(諱 壽恒) 문중 정점(頂點)에서의 기록입니다. 숙종과 경종 때에는 환국(換局)까지 더해 서로 죽이는 피바람이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 그래야만 했을까요? 이는 대의 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이 없는 왕조국가인 조선에서 붕당정치가 낳은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사환국(己巳換局)

우리는 TV 드라마와 영상물 등을 통해서 장희빈(禧嬪張氏 ? ~ 1701)을 잘 알고 있습니다. 1689년 소생인 원자 윤(景宗)의 원자 정호(원자는 세자를 거쳐 다음 대에 국왕으로 갑니다) 문제를 놓고 서인과 남인은 충돌합니다. 서인(西人)은 탄핵당하여 송시열(宋時烈 1607 ~ 1689, : 尤庵, 시호 : 文正)100여 명이 사형 유배 삭탈관직 당했고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 1667 ~ 1701)는 폐위되고 희빈 장씨는 중전으로 책봉되었습니다. 이로써 정국은 남인(南人)이 주도하게 되었는데 이를 기사환국 또는 기사사화라고 합니다.

 

  서인이었던 문곡 김수항은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로 잘 알려진 청음 김상헌(諱 尙憲 1570 ~ 1652, : 淸陰, 시호 : 文正)의 셋 째 손자이십니다. 영의정을 역임하셨는데 이는 형제(金壽興, 金壽恒)와 부자(金壽恒 金昌集) 영의정이라는 이방면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1689년 김수항은 진도로 유배되고 328일 사사(賜死) 되었습니다. 형님이신 김수흥(諱 壽興 1626 ~ 1690, : 退憂堂, 시호 : 文翼)은 영의정에서 파직되 장기로 유배되고 이듬해 배소에서 운명하십니다. 생사를 가르는 당쟁 속에서 출사(出仕)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놓아야 할 만큼 위태로움을 말해줍니다. 문곡 김수항은 현종 묘정(顯宗廟庭)에 배향되고 영평의 옥병서원(玉屛書院), 영암의 녹동서원(廘洞書院),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진도의 봉암사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입니다.

 

  여기에서 1689(기사년) 사화와 김수항의 사사를 후회하는 작은 돌판에 새긴 숙종의 글을 보겠습니다. - 2011-07-22 국립고궁박물관 전시실에서 -

 

肅宗大王 御筆(숙종대왕 어필)

賜戶曹判書 金昌集

昨夢與先卿想見, 覺來起坐. 問夜何, 其則曉鐘己擊矣, 不勝悽然, 明燭志感

 

호조판서 김창집에게 줌

지난밤 꿈에서 그대와 만났습니다. 깨어나 자리에 앉아서 밤이 몇 시인가 물어보니 새벽 종소리가 이미 울리고 있었습니다. 쓸쓸한 감회를 견딜 수 없어 촛불을 밝혀 나의 감회를 적어 둡니다.

 

曉夢分明遇相國  새벽 꿈에서 분명히 그대를 만나

催宣法醞似平昔  술을 내리라고 재촉함이 예전 그대로이다.

昨閱遺篇多愴懷  어제 보내온 글을 읽어보니 쓸쓸한 감회가 더해

元來感應不曾忒  원래 느낀 감정이 잘못된 것이 아니로다

純誠體國老彌深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하는 순수한 정성은 나이 들수록 더욱 깊어

忍說屠惟媿至今  기사(己巳: 1689)년의 일을 말하려니 지금도 부끄럽다.

每誦愛君心似血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 피처럼 뜨겁다는 경의 글을 읽을 때마다

傷神唯有涕涔淫  정신이 서글퍼서 눈물이 쏟아지네.

 

신임사화(辛壬士禍)

숙종의 뒤를 이어 1720년 장희빈 소생인 경종(景宗)이 즉위하였습니다. 1721(경종 1) 연잉군의 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을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은 대립하였습니다. 연잉군은 세제로 책봉되고 처음 참정(商確: 서로 의논하여 확실히 정함)에서 대리청정으로 비화하였습니다. 경종은 명하고 철회하기를 반복해 혼란만 가중시켰습니다. 대리청정 명이 경종의 뜻이라고 생각한 노론은 이에 관한 절목(節目)을 마련합니다. 그러나 소론 측의 우의정 조태구(趙泰耉 1660 ~ 1723)가 당시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바 철회되었습니다. 탄핵정국 속에서 1722(경종 2) 목호룡(睦虎龍 1684 ~ 1724)의 무고(誣告)까지 더해 조정은 엄청난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참형(斬刑)을 받은 자가 20여 명, 장사(杖死) 된 자가 30여 명, 그들 가족으로 교살(絞殺) 된 자가 13, 유배된 자가 114,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녀자가 9, 연좌(連坐) 된 자가 173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병약하고 후사가 없는 경종 대왕, 이에 따라 "삼종(三宗: 孝宗, 顯宗, 肅宗)의 혈맥을 지키라는 숙종의 유교(遺敎)를 받들어서" 연잉군으로 국본(國本)을 정해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하려는 노론 측의 주장과 이를 아직 젊은 경종에게 대한 불충으로 간주하려는 소론 측의 주장은 어느 쪽 주장이 옳은지 짧은 지식의 소유자인 저로서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신임사화로 말미암아 1722(임인) 몽와 김창집, 죽취 김제겸, 취백헌 김성행(杖死)3대가 희생되었고 이보다 앞서 33년 전인 1689년 기사환국으로 문곡 김수항까지 사사되었으니 일묘사충 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몽와 김창집은 영조묘정(英祖廟廷)에 배향되고 과천의 사충서원 (四忠書院 지금은 하남시), 거제의 반곡서원,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에 배향되었습니다.

 

 

맺는말

조선조를 넘어 우리나라 유사 이래 유일한 일묘사충 그 첫 장을 여신 기사년의 김수항과 대를 이은 임인년의 김창집, 김제겸, 김성행 4대의 유교(遺敎)와 유록(遺錄)에서 우리는 죽음을 앞에 놓고 흔들리지 않는 자세와 난세를 벗어난 듯 초연(超然) 하심을 읽습니다. 이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물론 두고두고 큰 가르침으로 다가갈 것입니다. 장미꽃보다 더 붉고 짙은 피의 향기가 길게 여운(餘韻)으로 울립니다.

 

文谷公(諱 壽恒) 十一世孫 澈東 謹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