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일묘사충(一廟四忠)

김제겸(諱 濟兼) 묘표

추읍산 2020. 3. 28. 12:32
한국고전종합DB

미호집 제18권 / 묘표(墓表)

선백부부군 묘표〔先伯父府君墓表〕             

공은, 성은 김씨, 휘는 제겸(濟兼), 자는 필형(必亨), 호는 죽취(竹醉),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영의정 충헌공(忠獻公) 몽와(夢窩) 선생 휘 창집(昌集)의 장자(長子)이다. 몽와공(夢窩公)은 경종 신축년(1721, 경종1)에 수상(首相)으로서 저위(儲位)를 세웠는데, 이듬해에 무옥(誣獄)이 일어나자 몽와공이 먼저 화를 입었고, 공의 장자 성행(省行)에게도 그 화가 미쳤다. 처음 공이 울산(蔚山)에 유배되었을 때, 흉당(凶黨)이 또 공이 모살(謀殺)하였다고 무함하여 고발한 자와 대질 심문시켰지만 꼬투리 잡을 만한 것이 전혀 없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부령(富寧)으로 이배(移配)시켰는데, 결국에는 몽와공의 죄안으로 연루되었다.

공이 임종할 때 “하늘의 해가 단심(丹心)을 밝게 비추니, 죽어도 이 마음 변치 않으리라.〔天日照丹 至死不變〕”라는 구절을 대서(大書)하고, 평소와 같이 담소를 나누었다. 이때가 8월 24일이니, 향년 43세였다. 처음에는 공을 파주(坡州) 마정리(馬井里)에 안장하였다가, 뒤에 여주(驪州) 등신면(燈神面) 초현리(草峴里)로 이장하였다. 계축년(1733, 영조9) 3월에 다시 수십 보(步) 앞으로 옮겨, 부인 정부인(貞夫人)과 더불어 건좌(乾坐)에 합부(合祔)하였다. 몽와공 및 아들 성행의 묘도 모두 같은 언덕에 있다.
공은 키가 크고 얼굴이 크며 풍의(風儀)가 늠름하였다. 성품이 공정하고 엄격하며 평탄하고 솔직하였으며, 간국(幹局)이 있고 식견이 두루 통달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이 공을 국기(國器)로 치켜세웠다.
을유년(1705, 숙종31)에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였다. 경인년(1710)에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에 제수되고, 누차 천직(遷職)되다가 고양 군수(高陽郡守)로 나갔다.

기해년(1715)에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에 제수되었고, 중간에 경기 도사(京畿都事)가 되었다. 대각(臺閣)에 있을 때에는 정언, 헌납, 사간, 집의를 역임하였고, 옥당(玉堂)에 있을 때에는 부수찬, 교리, 응교를 역임하였는데, 항상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세제책봉도감(世弟冊封都監)에서의 공로로 승정원 동부승지에 발탁되었고, 예조 참의, 우부승지로 전직(轉職)되었다. 공은 이미 포부가 원대하였는데, 벼슬길에 오르자마자 숙종이 승하(昇遐)하고, 흉도(凶徒)들이 사왕(嗣王 경종)에게 병이 있는 것을 틈타서 악독한 짓을 자행하여 날마다 몽와공을 흔들어댔다. 이에 공이 몹시 근심하고 통분해하다가 그 포부를 한 번도 제대로 시험해 보지 못하고 마침내 화를 당하고 말았다.

몽와공이 임종할 때 오히려 편지로 부탁하기를 “종국(宗國)이 다행히 전복되지 않는다면 출사(出仕)해서 명철한 군주를 보좌하여 나라의 명운을 연장시켜야 할 것이다. 네가 할 수 없다고 여겼다면 내가 이러한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아아, 끝내 자신의 뜻대로 마음껏 포부를 펴서 세상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입증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이르기를 “공이 화를 당한 것은 실로 흉적들이 공을 몹시 꺼렸기 때문이다. 이와 같지 않았다면 저들이 온갖 술수로 흉수를 부린 것이 꼭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니, 그렇다면 혹독한 화를 당한 것은 도리어 오늘날과 후세에 공을 더욱 드러냄이 될 것이다. 하늘이여, 원통하도다.
을사년(1725, 영조1)에 금상(今上 영조)이 즉위하여 흉당을 축출하고는 맨 먼저 몽와공을 신원(伸冤)하였고, 공에게는 이조 참판을 추증(追贈)하였다. 공의 시조(始祖)는 고려(高麗)의 태사(太師) 휘 선평(宣平)이다. 고조부 좌의정 문정공(文正公) 휘 상헌(尙憲)과 조부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휘 수항(壽恒)에 이르러 더욱 크게 세상에 알려졌다. 모친 박씨(朴氏)는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증(贈) 이조 참판 휘 세남(世楠)이 부친이 된다. 정부인(貞夫人) 송씨(宋氏)는 동춘(同春) 선생 휘 준길(浚吉)의 증손이자 의금부 도사 휘 병원(炳遠)의 장녀로, 공보다 1년 먼저 태어나고 공보다 11년 늦게 별세하였다. 부녀자의 법도가 있다고 크게 일컬어졌는데, 상세하게 기술한 지(誌)가 별도로 있다.

6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첫째는 증(贈) 지평 성행이고, 둘째는 교관(敎官) 준행(峻行)이고, 셋째는 진사 원행(元行)인데 모두 출계(出繼)하였다. 넷째는 달행(達行)이고, 다섯째는 부솔(副率) 탄행(坦行)이고, 여섯째는 위행(偉行)이다. 딸은, 첫째는 도사 이봉상(李鳳祥)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봉사 민백종(閔百宗)에게 출가하였다.

성행의 아들은 현감 이장(履長)이고, 딸은 정인환(鄭麟煥)에게 출가하였다. 준행의 아들은 이신(履信), 이헌(履獻), 이운(履運), 이현(履顯)이고, 딸은 신광익(申光益)에게 출가하였다. 원행의 아들은 이안(履安), 이직(履直)이고, 딸은 설서(說書) 서형수(徐瀅修), 홍낙순(洪樂舜)에게 출가하였다.

달행의 아들은 이기(履基), 이중(履中), 이경(履慶)이고, 딸은 이득상(李得祥), 송재위(宋載緯)에게 출가하였다. 탄행의 아들은 이소(履素),이유(履裕)이고, 딸은 홍대묵(洪大默)에게 출가하였다. 이봉상의 딸은 홍상임(洪相任)에게 출가하였다. 민백종의 아들은 익렬(翼烈)이고, 딸은 이건조(李健祚)에게 출가하였다. 내외(內外) 손자와 증손으로 어린 자들이 또 10여 명이다.

불초 조카 원행이 피눈물을 닦으며 삼가 쓰다.
[주-D001] 신축년에 …… 세웠는데 : 
신축년(1721, 경종1)에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창집이, 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등과 함께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延礽君)을 세제(世弟)로 책봉하기를 건의하여 끝내 성사시켰다.
[주-D002] 무옥(誣獄)이 일어나자 : 
1722년(경종2)에 목호룡(睦虎龍)이 이른바 노론 및 후일 영조가 되는 연잉군(延礽君) 측근 인물들의 경종(景宗) 시해 음모를 고변함으로써 일어난 임인옥사(壬寅獄事)를 가리킨다. 이 옥사로 인하여 김창집(金昌集)은 거제도(巨濟島)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성주(星州)에서 사사되었고, 김성행(金省行)은 국문(鞠問)을 당하다가 옥사(獄死)하였고, 김제겸(金濟謙)은 처음에는 울산(蔚山)에 유배되고 뒤에 부령(富寧)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사사를 당하였다.
[주-D003] 금상(今上)이 …… 축출하고는 : 
1725년(영조1) 2월에 영조 즉위 직후 소론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노론 일당정권으로 교체된 을사환국(乙巳換局)을 가리킨다.
[주-D004] 상세하게 기술한 지(誌) : 
미호가 지은 〈선백모정부인묘지(先伯母貞夫人墓誌)〉를 가리키는데, 《미호집》 권15에 실려 있다.

출처 :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519A_0180_01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