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선조님 행적

역사문화 답사기(충북, 경북)

추읍산 2020. 6. 14. 03:30

안동김씨 역사문화 답사팀이 2019년 설립되고 세 번째의 답사가 1박 2일의 일정으로 6월 12일 금요일에 경의중앙선과 3호선의 옥수역 4번 출구에서 시작되었다. 15인여 함께한 탐방은 첫 번째가 학조대사 화상탑이다. 속리산 법주사 계곡을 끼고 가는 길은 좁고 굽은 십 리 길에 이르러 짧은 여정상 미리 복천암에 부탁했단다. 두 번, 소형 승합차로 깊고 비탈진 계곡길을 돌아 복천암에 도착했고 탑이 있는 동산에서 회동했다.

 

세조조에 국사로서 활약했던 학조대사(燈谷: 1432-1514)와 스승이신 신미대사(信眉大師 1403 -1480)의 부도탑이 나란히 서있어 설법하시려는 듯 중생 사랑은 끝이 없다. 비탈진 산길을 어떻게 옮겼을까? 안동김씨 현달(顯達)에는 학조대사가 있다고 널리 알려졌는데 이는 조카이신 서윤공(諱 璠 1479 - 1544 자 文瑞)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사이가 아닌 일체로서의 두 분을 존경합니다. 서울로 이주한 조카[璠은 막냇 동생(永銖)의 둘 째 아들이다.]에게 집터(종로구 궁정동 2번지 무속헌으로 현 교황청 대사관 자리)와 훗날 유택(묘소로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 5)까지 마련해 주셨다. 오늘의 안동김씨가 있기까지 영욕을 지켜보았을 학조대사를 생각합니다. 그 숭고한 뜻을 받들어 되살림은 오늘을 살아가는 종인 모두의 몪입니다.

 

이어 병산서원을 찾았는데 널찍한 터전에서는 마당의 흙을 새로 교체하려는 듯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한 바퀴 돌아보고 풍산읍 소산리로 향했다. 안동김씨의 정신이 깃들여진 곳으로 처음 삼구정에서 어머님을 향한 효성을 보았습니다. 청원루는 12世 서윤공(김번)의 고택으로 16세기 서울로 올라오기까지 살으셨던 곳입니다.

 

청음 김상헌(諱 尙憲)은 1636년 병자호란과 이어지는 정축하성(1637년)으로 삼전도의 치욕을 따라가지 않고 안동으로 내려가셨다. 처음 청원루에서 조용한 곳을 찾아 학가산(鶴駕山) 아래 서미동(西薇洞으로 오늘날에는 서미리로 불린다.)에 몇 칸 초옥을 지어놓고 목석거라는 편액을 달아놓고 울분을 달래셨는데 청원루와는 오가신 듯합니다. 셋 째 손자이신 문곡 김수항은 기사유교에서 1640년 봄, 청원루에서 할아버지(청음)를 만났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고  큰 인재로 자랐습니다. 청의 거듭 대는 출병 요구에 반대 상소를 올리셨고 이로 말미암아 청의 미움을 사 1640년 11월 심양으로 압송되셨습니다. 올곧은 기개, 꺽이지 않는 기상은 청조차 김상헌 그 이름을 감히 부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다음은 안동김씨 종택인 양소당에서 해일 종손의 안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서미리(西薇洞) 김모현 시골집으로 향했는데 도중 은자암(隱者巖, 청음의 7세손 김학순이 안동부사로 재직시 각자하였는데 내용으로 보아 청음 선조를 기리기 위함입니다.) 이르러 학조대사께로부터 받은 어린 조카 3형제[막냇동생 휘 영수(永銖)의 아들로 삼당공 영(瑛), 서윤공 번(璠 청음의 증조), 진사공 순(珣)] 세뱃돈(銀子 몇 닢)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볼 곳 : 이어지는 글로 은자암(隱者巖) 이야기 ). 서미동 김모현 시골집은 청음 유적지인 목석거 위쪽에 있습니다. 따듯한 대접을 받으며 학창 시절의 수학여행 온 듯 설레는 하룻밤을 보내고 풍산읍에서 아침을 마친 일행은 묵계서원으로 향했습니다.

 

선현이신 김계행(諱 係行, 1431 -1517, 자 取斯, 호 寶白堂, 시호 定獻)을 모신 묵계서원에서 淸白傳家五百年을 기립니다. 참배를 하고 묵계 종택 그리고 보백당 현조 님의 자취가 서린 만휴정을 나와 안동 시내의 삼 태사묘, 그리고 영주시의 소수서원을 끝으로 귀갓길에 올랐는데 피끝마을의 피맺힌 사연, 아픔을 어찌 형언할 수 있겠습니까?  두고두고 울릴 것입니다.

 

학조 화상탑

학조대사 화상탑은 법주사 계곡길을 따라 약 4km 지점 복천암 좌측 산등성이에 있다. 1514년(중종 9)에 조성되었는데, 등곡의 스승인 신미대사(信眉大師 뒷쪽)와 나란하다.

 

학조대사

 

학조대사는 스승이신 신미대사와 함께 1464년(세조 10) 복천암에서 왕을 모시고 대법회를 열었습니다. 찬탈을 전후해서 단종과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세조 아닌 수양대군의 뒤늦은 양심고백인가? 성즉군왕(成卽君王)의 슬픈 자화상은 시공을 넘어선듯계곡을 따라 들려옵니다.

병산서원

병산서원 사적 제260호. 1613년(광해군 5)에 창건되었으며 유성룡의 위패를 모셨다. 원래 고려 말기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을 1572년(선조 5)에 유성룡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1629년 유진을 추가 배향했으며, 1863년(철종 14) 현재의 이름으로 사액받았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남았던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2019년 7월 6일,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16~17세기에 건립된 다른 8개 서원과 함께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발췌 : 다음백과

삼구정(三龜亭)

풍산읍 소산리에 있고 안동김씨 입향조인 혁(諱 革 8世)의 증손으로 11世인 김영전(諱 永銓 1439 - 1522),김영균(諱 永鈞), 김영추(諱 永錘), 김영수(諱 永銖 필자의 17대조) 4형제가 88세 되시는 예천권씨를 즐겁게 해드리고자 조선 연산군 2년(1496)에 건립한 것이다. 거북이와 같이 생긴 세 개의 바위가 정자 뜰에 있어서 붙여졌는데 장수를 기리기 위한 효성이 담겨있다. 맏아들인 학조대사의 기록이 없어 궁금하다. 예천권씨는 필자의 18代祖 할머니로 김계권(諱 係權)의 配 이시다.

 

삼구정의 상징 세개의 거북돌

청원루

청원루는 서윤공(청음의 증조)의 고택으로 16세기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 공께서 사셨던 곳이다.

1636년의 병자호란, 1637년 정축하성이 있었다. 청음께서는 치욕(삼전도)을 따르지 않으시고 안동부(安東府) 소산에 있는 청원루로 내려오셨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학가산 아래 서미동에 몇 칸 초옥을 지어놓고 목석거라는 편액을 걸어놓고 강학(講學)하시며 울분을 달래셨습니다. 그러나 1640년에는 주로 청원루에 계셨음은 문곡(김수항)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문곡께서는 기사유교(1689년)에서 청원루(淸遠樓)와 그곳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1640년 2월 아버지(諱 光燦)에 의해 할아버지(청음)를 뵈었습니다. 그때는 할머니(성주 이씨)와 형제(壽增, 壽興, 壽恒)들이 그곳에 머무르고 계셨는데 함께 하기 위해 양주 석실에서 네려오신 것입니다. 오랫동안 비워둔 집에는 활기가 넘쳤고 글 읽는 소리는 맑았습니다. 그러나 비좁았는지 할머니와 함께 건너편 모(某)씨 집에 살면서 매일같이 문안드렸습니다. 청음께서는 같은 해 11월 청의 심양으로 압송되셨는데 눈길을 끄는 글(1638년)이 있습니다.

 

평상시에 늘 걱정과 울분에 잠겨 있으면서 밤에도 편안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일어나 서성거렸는데, 추위와 더위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한밤중 풍산 산야를 걸으셨을 할아버지(청음)를 생각합니다. 이슬 맺힌 풀잎을 헤칠 때나 함박눈 쏟아지는 밤이 따로이지 않았습니다. 되돌아오시는 침실에는 알맞은 양의 약주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밤은 깊고 새벽이 다가오는데 우국충정은 밤하늘 별이 되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밤중에 일어나 홀로 걷다(夜起獨行)

쪽 밭길 북쪽 논길 밤은 깊어 삼경인데 / 南阡北陌夜三更

달을 보고 바람 쫓아 외로웁게 길을 가네 / 望月追風獨自行

하늘과 땅 무정하고 사람들은 다 잠자니 / 天地無情人盡睡

백 년간의 이 회포를 누굴 향해 쏟아낼꼬 / 百年懷抱向誰傾 

 

소산리 입구에 세운 청음 시비

 

목석거유허비(木石居遺墟碑 위)와 강린당 (講麟堂 아래)으로 서미동(서미리)에 있다. 청음(諱 尙憲, 1570년 - 1652년) 께서는 1637년 정축하성 후 안동 소산마을의 청원루로 내려오셨는데 깊은 곳을 찾아 학가산 아래 서미동에 몇 칸 초옥[西磵祠로 발전하고 현종 10년(1669)에 지방 사림에서 추모하기 위해 세웠고 1786년(정조 10)에 사액 받음] 을 지어놓고 강학하시며 울분을 달랬습니다. 서간사는 훼철됐고 강린당만 남았는데 이에 대하여는 더 알아보아야 할 사항입니다. - 사진 출처 : 풍악서당 남해(daum blog) -

 

12일 답사를 마친 일행은 서미동 김모현 시골집에서 환대를 받았다. 하룻밤을 지나 13일 이른 아침에 김모현 삼당공파 회장님의 농장을 찾아나섰다.산밭을 과수원으로 일구는 땀 흘리는 현장으로 맨 위의 밭에서 절터(중대사) 있었던 곳을 가리키고 있다. 학조대사께서도 한때 머무르셨던 곳이라고 한다

 

풍산장터로 아침식사 하던 둥지식당 앞이다.

 

묵계서원과 보백당의 정신

1980년 6월 17일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다. 묵계서원은 보백당() 김계행()과 응계() 옥고(:1382∼1436)를 봉향하는 서원으로, 1687년(숙종 13)에 창건되었다. 김계행은 조선 초기 성종 때 대사성()을 역임하고, 이조판서 양관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옥고는 세종 때 사헌부() 장령()을 지낸 바 있다.

1869년(고종 6)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후에 강당과 문루인 읍청루와 진덕문, 동재() 건물 등을 복원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어서 볼곳 : 클릭> 묵계서원 및 안동김씨묵계종택 [默溪書院─安東金氏默溪宗宅] (두산백과) 

 

묵계서원에서 배향을 마치고
만휴정은 보백당께서강학하셨던 만년의 공간이다.

평생 깨끗하게 살다 가신 보백당의 정신을 읽겠습니다(발췌 : 2018년 定獻公派宗會에서 펴낸 책 淸白傳家五百年 p 10)

 

無寶傳家五百年 보물 전함이 없는 오백년 된 집

若珍在室三千編 방안의 책을 보배로 여겼네

靜觀摸索非僥倖 정관하며 모색해도 요행은 없고

黙考誠勤最適然 묵고해 보니 보배는 청백한 성실과 부지런함 뿐이로다

 

 

바위깔린 깊은 계곡에는 물소리 산새소리 속세를 떠난듯합니다.

태사묘

안동시내에 있는 태사묘

고려
경상북도 시도기념물 제15호
미상(창건), 1561년(중수)
사당
유적
4,035㎡
경북 안동시 북문동 23,24-1
종교·철학/유교

요약 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는 안동권씨·안동김씨·안동장씨의 시조를 제향하고 있는 사당. 시도기념물.

 

내용

경상북도 기념물 제15호.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안동권 씨의 시조 권행(權幸), 안동 김 씨의 시조 김선평(金宣平), 안동장 씨의 시조 장정필(張貞弼)을 제향하고 있다. 삼공신 묘·안동태사묘라고도 한다. 창건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려 초에 안동 부민이 3 태사의 업적을 추모하여 사당을 세우고 지체한 것이 그 시초라고 하며 1561년(명종 16)에 중수하였다.

 

문헌에 의하면 신라 말엽에 김행이 고창군(古昌郡 : 지금의 안동)을 지키고 있을 때 후백제 왕 견훤(甄萱)이 반란을 일으켜 경주로 쳐들어와 왕을 죽이고 왕비를 능욕하였으므로 고려 태조 왕건이 천인 무도한 견훤을 토벌하고자 신라로 내려왔다. 왕건의 군대와 견훤의 군대가 팔공산을 중심으로 대치하고 있을 때 김행이 김선평, 장정필과 상의한 끝에 고려를 도와 신라의 복수를 꾀하였다. 뒤에 왕건이 삼국을 통일한 뒤에 김행의 용기를 칭찬하여 권 씨로 개성(改姓)하게 하고 김선 평과 장정필을 모두 태사에 봉한 뒤 안동을 부로 승격시키고 사당을 지어 부민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당시부터 천여 년간 안동권씨 측에서 묘사를 주관하였으나 영조 때 왕명으로 3 공신의 자손은 동일한 것이니 3 태사의 자손이 공동 관리할 것을 명하여 오늘에 이른다. 묘우 안에는 묘정비·보물각·숭보당·경모루 등이 있어 유물과 유적을 보관하고 있으며 3 태사의 자손들이 모여서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또한, 3공신묘는 지방의 사우 중 가장 오래된 것이며 고려건축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여 중수 때에도 제도를 변경하지 않았다.

 

발췌한 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안동한지

안동한지의 우수성을 듣다

소수서원 

조선 최초의 서원이다. 1541년(중종 36) 7월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 周 世 鵬 )이 1542년(중종 37) 8월에 이곳 출신의 성리학자인 안향( 安 珦 )을 배향( 配 享 )하는 사당을 설립하기 위해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1543년 8월 11일에 완공하여 안향의 영정을 봉안하고, 사당 동쪽에 백운동서원( 白 雲 洞 書 院 )을 같은 해에 설립한 데서 비롯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수서원 (한국 미의 재발견 - 궁궐 · 유교건축, 2004. 11. 30., 이상해)

이어서 볼곳 :  terms.naver.com/entry.nhn?docId=1632299&cid=42665&categoryId=42667

 

 

비극(悲劇)은 찬탈로부터 왔다

바위에 새겨진 敬 자가 가슴 아프다. 피끝마을의 사연이 시작하는 곳으로 소수서원 입구에 있다. 시신은 쌓이고 핏물은 흘러 죽계천을 따라 십여 리에 이르렀고 그 끝나는 지점이 피끝마을(등촌 1리)이다. 정의가 파괴된 현장에는 피맺힌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敬 자의 의미, 망자의 한(울음)을 잠재울 수 있었다니 그러나 진실은 가릴 수 없다. 피맺힌 현장에서 오늘을 읽는다. 되풀이되는 잘못 슬픔은 끝이 없다. 理性이 있어 있음인데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고 했습니다.

정축지변 (丁丑之變)은 1457년 있었고 아픔은 그때뿐인 듯 피 흘린 현장은 말이 없다. 세조의 왕위찬탈을 반대하다 눈 밖에 난 금성대군은 계속해 유배지를 옮겨 다니다가 사육신 사건을 계기로 순흥에 위리안치된다. 이때 순흥부사 이보흠과 뜻을 맞춰 거사를 준비하던 중 시녀 김련과 관노가 격문을 빼내 밀고하는 바람에 들통이 나버렸다. 당시 풍기 현감 김효급이 이 사실을 세조에게 알렸다. 이때가 세조 3년 1456년이다. 안동부사 한명진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순흥도호부에 불을 지르고 사람은 물론이고 우마계견(牛馬鷄犬)까지 닥치는 대로 무참하게 죽였다. 그리고 다시 한양에서 철기군이 출동해 2차 학살을 저질렀다. 당시 순흥은 황폐화됐고 근방 30리 안에 산 사람이 없을 정도로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발췌 :   www.yj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1029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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