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6, 12일 안동김씨 역사문화 답사팀은 오후 안동시의 소산 마을에서 흔적을 찾았습니다. 저녁 때가 되어 하룻밤 유숙할 곳으로 김모현 삼당공파 회장님의 학가산 기슭(보문산), 중대바위(장군바위) 아래에 있는 서미동(西薇洞) 시골집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은 학조대사(燈谷 1432 - 1514)께서 한때 머물르셨다는 중대사(中臺寺) 흔적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는 두 정승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서애 유성룡(柳成龍 1542 - 1607)이 58세에 농환재(弄丸齋)라는 초가를 지어놓고 만년을 보내시다가 64세에 운명(殞命) 하셨습니다. 또한, 청음 김상헌(諱 尙憲·1570 -1652)은 병자호란 후 몇 칸 초옥을 지어놓고 4년간(1637 -1840) 울분을 달랜 곳입니다.
서미동 마을 가까이 이르러 김모현 씨 안내에 따라 잠시 차에서 내렸습니다. 은자암이라는 바위를 바라보면서 학조대사께서 어린 조카 삼 형제에게 주신 세배돈인 은자 몇 닢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까지 종합하고 필자의 생각까지 더해 추리합니다. 학조대사께서는 고향 소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서미동의 중대사에 머물고 있을 때입니다..
어느 해인가, 설을 맞아 막냇동생 장령공 김영수(諱 永銖 1446 -)의 아들인 어린 조카 삼 형제가 세배 차 찾아왔습니다. 삼당공 영(諱 瑛 1475 - 1528), 서윤공 번(諱 璠 1479 - 1544), 진사공 순(諱 珣) 삼 형제가 백부이신 학조대사께 세배를 올리러 온 것입니다.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와 큰 가르침을 들었을 것입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갈 때 삼 형제는 세배 돈으로 은자(銀子) 몇 닢씩을 받았습니다.
하직 인사를 드리고 내려오는 산길입니다. 받은 돈의 용처를 의논하였는데 맏이 영은(삼당공)은 아무리 백부지만 중은 중이니 깨끗하지 못하다면서 버리고 가자고 하였고 둘째 번(서윤공)은 중일지라도 백부는 백부인데 주신 세뱃돈은 소중하게 간직했다가 생광스레 써야 한다는 의견이고 막내 순(진사공)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커다란 바위에 이르러 결국은 큰형의 뜻대로 바위 밑에 묻었습니다.
이러한 삼 형제의 거동을 신통력으로 꿰뚫어 보신 학조대사께서는 “역시 둘째가 인정이 많은 놈이로군”하고 입가에 미소를 지으셨다고 합니다. 이런 일화를 읽으면서 둘째 조카(번)에게 정이 더 쏠리지 않았겠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서윤공(번)은 그 후 가솔을 이끌고 서울로 이주하였는데 이는 학조대사의 가리킴이 아닐까요? 그때 잡아주신 집터가 종로구 궁정동 2번지의 무속헌(현 교황청 대사관 자리)이고 훗날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 5의 옥호저수형의 서윤공 유택(幽宅으로 묏자리)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이는 서윤공 후손들이 크게 현달(顯達)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장에 세위진 안내판에 의하면 청음의 7세손인 문간공 김학순[諱 學淳 1767년(영조 43) - 1845년(헌종 11)]께서 안동부사(1820년 순조 20)로 내려왔을 때 청음께서 은거한 곳임을 기리기 위해 바위에 큰 글씨로 隱者巖(은자암)이라고 각자하고 海東首陽 山南栗里(해동수양 산남율리) 라고 덧 붙였는데 풀이하면 도의와 절의를 지킨 중국의 백이숙제가 은거한 수양과 자연으로 귀의한 도연맹의 집이 있던 율리와 같은 곳이라는 뜻입니다.
銀子巖과 隱者巖 같은 발음의 은자암을 바라보면서 선현들의 흔적을 찾습니다. 이 두 이야기는 은신처로서의 서미동(西薇洞 지금은 서미리로 불린다.)을 둘러싼 소중한 자산입니다. 아마도 학순 선조께서는 학조대사의 세뱃돈 이야기를 듣고 또한, 이곳이 서해 유성룡과 청음 선조의 흔적이 어린 곳이라서 隱者(산야에 묻혀 숨어 사는 사람)巖 이라고 각자 한 듯합니다. 그러나 청음 선조를 향한 마음이 더 커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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