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개국공신 김선평(金宣平 901 - ? )의 후예(11世)로 종통의 맥을 이어오길 530여년으로 1431년(세종 13)이 되었다. 조선(1392년 - 1910년)이 개국하고 제4대 세종 임금이 밝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지 13년째로 접어들었다. 경상도 안동부 금산(오늘날의 소산리)에는 비안 현감을 지내신 김삼근(金三近 1419 -1465)이 풍산 불정촌(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하리리 부근)에 살다가 금산(金山 오늘의 풍산읍 소산리)으로 옮겨 입향하고 자리 잡은 안동김씨 씨족마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곳 돈소당((敦素堂 비안공 구택)에서는 할아버지(김삼근)와 할머니(상락김씨) 그리고 가족이 자리를 잡았는데 부친 판관공[金係權, 1410년(태종 10) - 1458년(세조 4)]께서 출사(出仕)하여 서울로 이주하기전으로 생각한다. 1431년 탄생을 알리는 울음소리가 울렸으니 바로 안내드리고자 하는 학조대사 이시다.
속명은 김영형(金永衡), 법명(法名)은 학조(學祖), 도호(道號)는 등곡(燈谷), 황악산인(黃岳山人)으로 세조 때의 국사였다. 학가산(學駕山) 중대사에서 출가하였으며 삼성산(三聖山)의 삼막사(三幕寺) 등곡대(燈谷臺)에서 득도하였다. 신미(信眉), 학열(學悅)과 같이 월인석보(月印釋譜)를 간행하였다. 1464년(세조 10) 복천암에서 왕을 모시고 신미대사와 함께 대법회를 열었다. 또 천수경연해(千手經諺解)를 펴냈다. 또 인수대비의 명을 받들어 육조법보단경(六祖法寶壇經) 진언권공삼단시식문(眞言勸供三壇施食文) 천지명양수륙잡문(天地冥陽水陸雜文)등 언해를 인출하였다. 또 신비(愼妃)의 명을 받아 승도(僧徒) 108명으로 대장경(大藏經) 三 부를 인경(印經) 하였고 자성대비(慈聖大妃)의 명을 받들어 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 남명집언해(南明集諺解), 남명집언해(南明集諺解) 등을 인출하였고 불정심경언해(佛頂心經諺解), 오대진언언해(五大眞言諺解), 영혐략초언해(靈驗略初諺解), 반야심경언해(般若心經諺解)등을 간행하였다. 중종 갑술(1514년) 학가산(學駕山) 광흥사(廣興寺) 애련암(愛蓮庵)에서 입적하였다. 부도(浮屠)는 속리산(俗離山) 복천암(福泉庵)에 있다(보물 제 1418 호) 영정(影幀)은 장성(長城) 백양사(白羊寺)와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에 있다. - 을미보(2015년)에서 -
안동김씨 세계(世系)로 보는 학조
시조 김선평(金宣平)
- - 8世 혁(革) - 삼근(三近) - 계권(係權) - 영형(永衡 학조대사)
가족관계
학조대사로 널리 알려진 김영형(金永衡)은 1431년 한성부판관 김계권과 권맹손의 딸 예천권씨사이에서 11남매중 셋 째로 태어났다. 부친께서는세종 때 음직으로 관직에 나가셨고 1451년(문종 1) 직장(直長 종칠품)을 수행후 조산대부(朝散大夫 년도 미상 ) 한성부 판관(漢城府 判官)을 역임하셨다.
순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성명 | 壻 柳牖 서 유유 |
壻 李長生 서 이장생 |
金永衡 김영형 |
金永銓 김영전 |
金永鈞 김영균 |
金永錘 김영추 |
金永銖 김영수 |
壻 鄭勳老 서 정훈노 |
壻 韓穎 서 한영 |
壻인 경우 본관 | 晉州人 진주인 |
星州人 성주인 |
1431(세종 13) -1514(중종 9) | 1439(세종 21) - 1462(세조 8) | 1441(세종 23) - | 1443(세종 25) -1522(중종 17) | 1446(세종 28) - 1502(연산 8) | 淸州人 | 平山人 |
기록 | 父縣監斐부현감비 | 父校理咸寧부교리함녕 | 學祖大師로 세조조의 國師 | 司憲府 監察 |
進士 | 水原府使 | 司憲府 掌令 |
主簿 父普文 |
縣令 父義盈庫使 可久 |
10, 壻 金允离(서 김윤리) 奉事(봉사)
11, 壻 權瑊(서 권감) 안동人 參贊(참찬) 光川君(광천군) 父參贊克和(부참찬극화)
학조대사 연보(年譜)
년도 | 왕대 | 년령 | 행 적 | |||
1420 년대 |
세종 | 출생전 | 비안공(金三近 1390 - 1465) 조부께서 안동부 풍산현 불정촌에서 소산리(금산촌)로 이주한 시기는 1420년(세종 2년) 대 후반으로 생각한다. 제택(第宅)을 마련하는 한편 자손들의 교육에 온힘을 쏟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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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 | 13 | 1 | 추리하는 출생년도다. 출생지는 금산촌(소산리)의 돈소당으로 생각한다. 같은 해 숙부 보백당(휘 계행)께서 탄생하셨다. 외조부 권맹손(權孟孫)이 병조 정랑이었는데 힘입어서 이후 부친[김계권(諱 係權, 1410 - 1458)]께서 서울 장의동(壯義洞 수편 106p)으로 이주하셨다고 추리한다. | |||
1439 | 21 | 9 | 둘째 동생 영전(永銓)이 태어났다. | |||
1441 | 23 | 11 | 셋째 동생 영균(永鈞)이 태어났다. | |||
1443 | 25 | 13 | 안동 학가산 줄기 중대바위 아래 서미동의 중대사(中臺寺)에서 출가하였다. 이 해에 네째 동생 영추가 태어났다. | |||
1443 | 25 | 13 | 안양시 소재 삼성산 삼존사(三尊寺로 지금의 三幕寺) 등곡대에서 득도하였다. | |||
1446 | 28 | 16 | 막내(다섯 째)동생 영수(諱 永銖)가 태어났다. | |||
1450 | 문종 1 | 20 | 외조 권맹손(權孟孫)이 이조판서(吏曹判書)를 명 받았다. | |||
1455 | 세조 1 | 25 | 부친 판관공(휘 계권)께서 겸주부(兼注簿 종칠품)로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녹훈되셨다. | |||
1456 | 세조 2년 | 26 | 외조(權孟孫)께서 별세하셨다. | |||
1458 | 세조 4 | 28 | 부친(諱 係權)께서 별세하셨다. 세조의 허락을 받고 창평반월연화부수지형(蒼萍盤月蓮花浮水形)의 부친 묘소를 잡았는데 풍산 서쪽 십리로 역동건좌이다. 이곳은 역참(驛站)이 있던 자리다. 이 때 어머니 예천권씨와 온가족이 소산으로 낙향하였는데 학조를 향한 세조의 신임이 커가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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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9 | 세조 5 | 29 | 신미, 학열과 함께 월인석보(月印釋譜)를 간행하는 등 한글보급에 전념하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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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4 | 세조 10 | 34 | 신미, 학열과 함께 속리산 복천암(福泉庵)에서 세조를 모시고 대법회를 열었다. 이때 어가 행렬이 법주사 남쪽 십리에 이르렀는데 소나무가 가지를 들어 행차를 도왔다는 정 이품송 유래가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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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5 | 11 | 35 | 할아버지 비안공께서 별세하셨다. 둘째 동생 영균(永鈞)이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으로 입격하였다. | |||
1467 |
세조 13 | 37 | 세조의 명을 받고 유점사(楡岾寺)를 중건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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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8 | 세조 14 |
38 | 1월 역말(驛騎)을 받고 고성(高城)의 유점사로 파송되었으며, 그가 데리고 가는 장인(匠人) 15인에게도 또한 왕실에서 역말을 내려 주었다. 신미대사, 학열스님과 함께 설법을 하여 양반 사대부들 역시 불교에 귀의하거나 신봉하는 자가 나타났다. 4월 왕명을 받아 승려 학열과 함께 사신 접대를 준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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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9 | 예종 1 |
39 | 정희왕후(貞熹王后 세조비) 윤씨(尹氏)의 명을 받아 세조를 추모하기 위해 89칸의 규모로 봉선사(奉先寺 초명은 雲岳寺)를 중창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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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5 | 성종 6 | 45 | 막냇동생 영수의 장남 영(瑛)이 안동부 풍산현 소요산(素耀山) 아래 옛집(돈소당)에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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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6 | 성종 7 | 46 | 천수경(千手經)을 언해교정 하는 등 한글보급에 열심하셨다. | |||
1479 | 성종 10 |
49 | 막내(김영수)의 2남 서윤공(휘 번)께서 출생하셨다. | |||
1480 | 성종 11 | 50 | 1480년 숙부 정헌공[金係行 1431년(세종 13) - 1517년(중종12)]께서 급제하셨고 청백리의 표상이 되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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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2 | 성종 13 |
52 | 세종때부터 시작되었다가 중단된 《증도가남명계송(證道歌南明繼頌)》을 자성대왕대비(慈聖大王大妃 세조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번역, 완성하였다. 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를 세조의 비인 자성대왕대비(慈聖大王大妃)의 명에 의해 내수사(內需司)에서 을해자(乙亥字)를 써서 인출·간행하였다. 이는 세종 때에 왕세자(문종)와 수양대군(세조)에게 명하여 편성하여 번역하게 하였으나, 탈고하지 못했던 것을 대비의 명으로 고승 학조(學祖)가 교정하여 300질을 인출하였다. 또한, 오대진언(五大眞言), 불정심다라니(佛頂心陀羅尼), 진언권공(眞言勸供)」 이 그의 발문이 첨부되어 있는것으로 보아 그의 번역일 것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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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3 | 성종 14 | 53 | 황악산 직지사(直指寺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직지사길 95 )에 주지로 있을 때 황악산인(黃岳山人) 이라는 별호를 쓰셨고 한 때 병이 중하여 왕이 내의(內醫)를 보내왔다. | |||
1485 | 성종 16 | 55 | 영험약초언해(靈驗略抄諺解)를 간행(네 가지 진언이 발휘하는 영험스런 일들을 설명한 책)하였다. | |||
1488 | 성종 19 | 58 | 인수대비[1437년(세종 19) - 1504년(연산군 10) 제7대 세조의 장남인 덕종(德宗 추존)비]의 명으로 해인사 중수및 대장경판당(팔만대장경 보관소)을 중창하였고 경내에 세조의 원당(願堂)이 설치됨으로써 해인사는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왕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직지사를 중수하였는데 이때 홍길동을 만났고 무예를 전수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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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9 | 성종 20 | 59 | 12월 할머니(비안공의 配) 상락김씨께서 별세하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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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0 | 성종 21 | 60 | 네째 동생 김영추(金永錘) 합천군수가 되었다. 형 학조께서 학전(學田)을 빼앗었다는 문제로 시끄러웠는데 해인사의 재정문제 이었을 것이다. 이후 영추는 수원부사가 되었다. | |||
1491 | 성종 22 | 61 | 막냇동생 김영수(金永銖)가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임명되었다. | |||
1495 | 연산 1 | 65 | 2월에 막내 장령공(김영수)께서 영천군수(永川郡守)를 마치고 고향(金山)로 돌아오시고 삼구정(三龜亭) 건축을 주관하시고 형제들이 도았는데 는데 불사에 열심하실적이다. 장령공의 첫째아들 삼당공 김영께서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였다. | |||
1496 | 연산군 2 | 66 | 겨울에 어머니 예천권씨(1409 - 1496)께서 별세하시어 역골(驛洞)의 판관공 묘소 뒤쪽 건좌에 안장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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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8 | 연산군 4 | 68 | 막내아우 장령공(김영수)의 2남(서윤공 김번)이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 |||
1500 | 연산군 6 | 70 | 왕비 신씨의 명으로 해인사의 대장경 3부를 간인(刊印)하고 발문을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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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2 | 연산군 8 | 72 | 7월 12일 막내동생 장령공(김영수)께서 별세하셨다. | |||
1511 | 중종 6 | 81 | 숙부 보백당(金係行)께서 회갑을 맞이하셨다. | |||
1512 | 중종 7 |
82 | 모든 일가와 형제들이 삼구정에서 회동했는데 학조 포함인지는 알 수 없다. | |||
1514 | 중종 9 | 84 | 경상도 학가산의 광흥사(廣興寺) 애련암에서 입적하셨다. 부도는 1514년(중종9년) 5월에 건립했는데 속리산 복천암 좌측 능선에 있다. | |||
1517 | 중종 12 | 87 | 숙부 보백당(金係行)께서 별세하셨다. | |||
인수대비의 명으로 「진언권공(眞言勸供)」과 「삼단시식문(三壇施食文)」을 번역하여 합본으로 간행한 책으로 년도미상이다. |
차례
1, 출가(出家)
2, 안동김씨를 일구시다
3, 억불숭유에서 숭불로
4, 한글보급
5, 영면
6, 학조가 편역한 한글본
1, 출가(出家)
1443년 13세 때로 학가산 기슭에 있는 중대사(中臺寺)로 출가하였는데 두가지 설이 있다.
첫 번재는 안동 소산 집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지나던 노승이 말했다. 이 아이를 제게 주시어 불도를 닦게하여주십시오. 놀란 아버지 계권은 어찌 말씀하십니까? 하고 까닭을 물으니 노승은 어린 영형을 가리키며 제 말이 미심쩍으시면 족상(발바닥의 금)을 보십시요. 이대로 속세에 두면 이 아이뿐만 아니라 온 집안이 화를 면치 못할것입니다. 하였다. 살피니 발바닥에 임금왕(王)자가 쓰여있었다. 이에 부모는 영형을 출가시켜 승려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영형의 외조부이신 제평공 권맹손이 북경에 가게 되었는데 따라 다녀오겠다는 영형을 뿌리치고 사신길에 올랐다. 제평공이 의주에 당도해보니 13살 영형이 당도해 있었다. 어절 수 없이 동행시켰는데 중국인들이 영형의 관상을 보더니 중국을 들어먹을 상이라 하였다. 영형은 원래 턱에 점이 있고 그 점에 긴 수염이 나 있었는데 이런 관상이 중국인들을 놀라게 한것으로 보인다. 이에 중국인들이 영형을 죽여 후환을 없애려 하였는데 이에 영형은 머리를 깍고 동자승 행세를 하며 압록강을 건너 겨우 돌아왔고 이길로 안동 중대사로 출가를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점은 비안공께서 언제 소산마을에 입향했느냐 이고 판공공께서는 언제 서울로 가셨느냐 입니다. 서울로 이주시기는 추정하건대 1430대이고 서울에서 출가하셨다고 판단합니다.
2, 안동김씨를 일구다
○ 은자암(銀子巖) 이야기
안동시 학가산 기슭(보문산), 중대바위(장군바위) 아래에 있는 서미동(西薇洞)에는 학조대사(燈谷 1432 - 1514)께서 입적하셨다는 중대사(中臺寺) 흔적이 있다. 마을 입구길 언덕 아래에는 바위가 있는데 이곳에는 학조대사와 관련한 이야기와 함께, 두 정승[서애 유성룡(柳成龍), 청음 김상헌(諱 尙憲)]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는데 여기서는 학조대사 관련만 쓴다. 학조대사께서는 고향 금산(金山 오늘날에는 소산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서미동(西薇洞)의 중대사에 머물고 있을 때입니다.
어느 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출가후인 1483년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막냇동생 장령공 김영수[諱 永銖(1446 -1476년)]의 아들인 어린 조카 삼 형제가 세배 차 찾아왔습니다. 이 때는 황악산 직지사에서 불사에 열심이셨을 때인데 성묘차 잠시 출가하신 중대사에 머므르셨고 모두 선영(금산)을 찾은 듯 합니다. 삼당공 김영(諱 瑛 1475 - 1528)이 9세로 정월 초하루 설을 맞아 서윤공 번(諱 璠 1479 - 1544), 진사공 순(諱 珣 ? - 1559) 삼 형제가 백부이신 학조대사께 세배를 올리러 온 것입니다.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와 큰 가르침을 들었을 것입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갈 때 삼 형제는 세배 돈으로 은자(銀子) 몇 닢씩을 받았습니다.
하직 인사를 드리고 내려오는 산길입니다. 받은 돈의 용처를 의논하였는데 맏이 영은(삼당공)은 아무리 백부지만 중은 중이니 깨끗하지 못하다면서 버리고 가자고 하였고 둘째 번(서윤공)은 중일지라도 백부는 백부인데 주신 세뱃돈은 소중하게 간직했다가 생광스레 써야 한다는 의견이고 막내 순(진사공)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커다란 바위에 이르러 결국은 큰형의 뜻대로 바위 밑에 묻었습니다.
이러한 삼 형제의 거동을 신통력으로 꿰뚫어 보신 학조대사께서는 “역시 둘째가 인정이 많은 놈이로군”하고 입가에 미소를 지으셨다고 합니다. 이런 일화를 읽으면서 둘 째 조카(번)에게 정이 더 쏠리지 않았겠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학조게서는 삼 형제 모두를 아울렀을 것입니다.
○ 창평부수형(蒼萍浮水形)의 판관공[金係權, 1410년(태종 10 - 1458년(세조 4)] 묘소
(참고 1 https://blog.daum.net/kdhyun55/3887 https://terms.naver.com/entry.naver?) (2docId=1762990&cid=49371&categoryId=4937)
10世 판관공(判官公 諱 係權 ) 께서는 학조대사의 부친이시다. 5남 6녀를 두셨는데 세보(世譜)로 보는 학조 편에서 적시하였다. 1458년(세조 3) 서울에서 별세하셨는데 경북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역골의 묘소자리가 푸른 개구리밥이 물 위에 떠 있는 창평부수형(蒼萍浮水形)이라 한다. 주산은 가일 마을 뒤에 있는 정산(井山)이다. 백두대간의 옥돌봉에서 한 지맥이 뻗어 문수산, 천둥산, 학가산, 보문산, 대봉산을 거쳐 하회의 주산인 화산(花山)을 기봉하기 위해 행룡하는 용에서 남으로 한 지맥이 뻗어 기봉한 산이다.
묘소를 잡기까지 미루기만 했는데 집에서는 고민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러던 중 학조께서 용기를 내어 입궐하셨다. 세조 임금을 알현하였는데 옷차림에 놀란 임금께서는 대사는 아직 상복차림이니 무슨 사연입니까? 학조대사는 항송하오나 아직 구산(求山)을 못했습니다. 풍수에 밝은 대사께서 무슨 사연이 있습니까? 네, 한 곳 있습니다만 어려운 처지입니다. 무슨 말이오. 서슴치 말고 말 하시지요. 잠시 침묵이 흐른후 대사께서 말씀 하셨다. 역참(驛站) 자리입니다. 이에 상감께서는 그 자리에다 산소를 쓰도록 허락하셨는데 역참을 옮기면서 까지 학조를 크게 쓰고자 하신 세조대왕을 생각합니다. 이곳이 오늘날의 창평반월연화부수지형(蒼萍盤月蓮花浮水形)의 판관공 묘소로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역골에 있다. 이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금관자 서말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역참(驛站)이란?
국가의 명령이나 공문서를 전달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고 전송하며 접대하는 일을 위하여 마련된 교통, 통신 기관으로, 그 일을 하는 사람을 역원이라고 하였고 쓰는 말은 역마라고 하였다. 따라서 역참의 가장 중요한 운영 요소는 역로의 조직과 역원 및 역마의 확보였다. 자금을 공수전이나 관전 등의 역전(驛田)을 지급받아 운영하였다.
○ 삼당공파(三塘公派)의 모태가 된 세 연못과 태고정(太古亭)
학조대사께서는 서윤공의 형님인 삼당공 영(諱 瑛 1475 - 1528)의 터전을 잡아주셨습니다. 이는 삼당공의 어머니 강릉김씨의 부탁을 받았음인데 그 곳에는 삼당공께서 파 놓으신 세 연못이 있어 맑고 넘쳐 서로 비쳐들었는데 이는 유래한 삼당공의 호(號)가 되었습니다. 인왕산 아래에 있었고 청운동 일부 계곡을 포함하는 절경이었습니다. 손자 기보(諱 箕報) 대에 이르러 종증손 선원(諱 尙容 1561 - 1637)께서 물려받으시니 충신 선원께서 사셨던 곳이고 겸제정선의 그림이 남아 있어 널리 알려졌고 오늘날 청풍계(淸風溪)라고 합니다.
태고정과 청풍계 일대의 모습이 1766년(영조 42)에 삼당공(김영) 후손인 동야(東野) 김양근(金養根:1734~1799)이 지은 「풍계집승기(楓溪集勝記)」에 잘 나타나 있는데, 다음과 같다. 그의 문집 『동야집(東埜集)』에 실려 있다.
청풍계는 우리 선세의 옛 터전인데 근래에는 선원선생의 후손이 주인이 되었다. 경성(京城) 장의동(壯義洞) 서북쪽에 있으니 순화방(順化坊) 인왕산 기슭이다. 일명 청풍계(靑楓溪)라고도 하는데 풍(楓)으로 이름지어 말함에는 반드시 그 뜻이 있겠으나 지금 상고할 길이 없다. 대체로 백악산이 북쪽에 웅장하게 솟아 있고 인왕산이 서쪽으로 둘러쌌다. 한 시냇물이 우뢰처럼 돌아 내리고 세 연못이 거울처럼 열려 있다. 서남쪽 봉우리들은 수풀과 골짜기가 더욱 아름다우니, 계곡과 산의 아름다움으로는 도성에서 가장 뛰어나다. 서리서리 꿈틀거려 내려온 언덕을 혹은 와룡강(臥龍江)이라 일컫는데 실은 집 뒤 주산(主山)이 되고 그 앞이 곧 창옥봉(蒼玉峯)이다.
창옥봉 서쪽으로 수십 보 떨어진 곳에 작은 정자가 날아갈 듯이 시내 위에 올라 앉아 있다. 띠로 지붕을 이었는데 한 칸은 넘을 듯하고 두 칸은 못 되나 수십 인이 앉을 수 있으니 태고정(太古亭)이다. 오른쪽으로 청계(淸溪)를 끼고 왼쪽으로는 삼각산을 끌어들이는데, 당자서(唐庚:1071~1121, 자는 자서(子西), 북송대 문인)의 ‘산이 고요하니 태고(太古)와 같다.’라는 구절을 취하여 그것으로 이름지었다. 늙은 삼나무 몇 그루와 푸른 소나무 1000여 그루가 앞뒤로 빽빽이 에워싸고 정자를 따라서 왼쪽에 세 못이 있는데 모두 돌을 다듬어서 네모나게 쌓아 놓았다. 정자 북쪽 구멍으로 시냇물을 끌어들여 바위 바닥으로 흘러들게 하니 첫째 못이 다 차고 나면 그 다음 못이 차고 그 다음 못이 다 차면 다시 셋째 못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위의 못을 조심지(照心池)라 하고, 가운데를 함벽지(涵碧池)라 하며, 아래를 척금지(滌衿池)라 한다. 우리 낙재(樂齋) 김영(金瑛) 할아버지의 또 다른 호 삼당(三塘)이 여기에서 취한 것이다.
함벽지 왼쪽에 큰 돌이 있는데 평평하고 반듯한 표면은 두께가 서로 비슷하고 사방 넓이는 흡사 자리 몇 잎을 펴놓은 듯하여 앉아서 가야금을 탈 수 있으므로 처음부터 부르기를 탄금석(彈琴石)이라 했다. 듣건대 충주(忠州) 탄금대(彈琴臺)로부터 조선(漕船)을 따라 온 것이라서 그렇게 이름지었다고 하니 역시 그 유적이기 때문이었다. 탄금석 왼쪽에 4칸의 마루와 2칸의 방이 있는데 방 앞은 또 반 칸 툇마루로 되었으니 곧 이른바 청풍지각(靑楓池閣)이다. 우리 창균(蒼筠) 선조 김기보(金箕報:1531~1599)께서 남쪽으로 돌아오신 뒤에 드디어 선원께서 꾸며 사시던 곳이다. 각액(閣額)은 석봉(石峯) 한호(韓濩:1543~1605)의 글씨이며 또 들보 위에 ‘청풍계(淸風溪)’ 삼자(三字)를 걸고 붉은 깁으로 둘러 놓은 것은 선조(宣祖:1552~1608)의 어필(御筆)이고, 각(閣)의 동쪽이 소오헌(嘯傲軒)이 되는데 곧 도연명(陶淵明:365~427, 이름은 잠(潛), 자는 연명(淵明), 중국 동진, 유송 대의 시인)의 시 ‘동쪽 처마 밑에서 휘파람 불어대니, 문득 다시금 이 삶을 얻은 듯하다.’라는 뜻이다. 헌(軒) 오른쪽 방은 온돌인데, 방안의 편액은 와유암(臥遊菴)으로 하였으니 종소문(宗少文:375~443, 이름은 병(炳), 자는 소문(少文), 중국 남조 송대의 은자)의 ‘명산을 누어서 유람한다.’는 뜻으로 산속 경치를 베개 베고 다 바라볼 수 있다. 남쪽 창문 문미(門楣) 위에는 소현세자(昭顯世子:1612~1645)께서 쓰신 ‘창문을 물 떨어지는 쪽에 내고 흐르는 물 소리 듣는데, 길손은 외로운 봉우리에 이르러 흰 구름을 쓴다.’는 시를 새겨 걸었다. 비교할 수 없는 경지임을 상상할 만하다.
마당 남쪽에는 수백 길 되는 전나무가 있으니 나이가 수백 년은 됨직하나 한 가지도 마르지 않아서 보기 좋다. 서쪽 창문 밖의 단상(壇上)에는 두 그루 묵은 소나무가 있어 서늘한 그늘을 가득 드리우는데 특히 달밤에 좋아 송월단(松月壇)이라고 부른다. 단(壇) 북쪽은 석벽(石壁)이 그림 병풍 같고 세 그루 소나무가 있다. 형상이 누워 덮은 듯하여 창옥병(蒼玉屛)이라 하니, 청음(淸陰:김상헌의 號)께서 시로 읊으시기를 ‘골짜기 수풀은 그대로 수묵화인데, 바위벼랑 스스로 창옥병(蒼玉屛) 이루었구나.’라 하셨다. 또한 화병암(畵屛岩)이라고도 한다.
회심대(會心臺)는 태고정 서쪽에 있으며 무릇 3층인데, 진간문(眞簡文)이 이른바 ‘마음에 맞는 곳이 꼭 멀리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뜻이다. 회심대 왼쪽 돌계단 뒤에 늠연사(凜然祠)가 있으니 곧 선원의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사당 앞 바위 위에 ‘대명일월(大明日月)’이라는 네 글자를 새긴 것은 우암(尤庵) 송선생[宋時烈:1607~1689]의 글씨다. 천유대(天遊臺)는 회심대 위에 있는데 푸른 석벽이 우뚝 솟아 저절로 대를 이루었으며, 일명 빙허대(憑虛臺)라고도 하니 근처의 빼어난 경치를 모두 바라볼 수 있다. 석벽 위에 주자(朱子)의 ‘백세청풍(百世淸風)’ 네 글자가 새겨져 있으므로 또한 청풍대(淸風臺)라고도 한다.
「효명세자께서 태고정을 찾은 기록이 있어 대리청정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익종대왕어제(翼宗大王御製)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있다.
태고정(太古亭)
산천은 여전히 태고(太古)이고
일천년의 충의(忠義)로구나
봄 바람 같은 위의(威儀)
늘 늠연(凜然)하고 당당한 모습이로다
山川如太古
忠義一千年
有儀春風像
堂堂常凜然 」
「 조선중기 학자 촌은(村隱)유희경(劉希慶)은
청풍계 납시다가 태고정에 올랐네
뜨락에 구름을 쓰는 사람 없는데
시냇물 소리는 많이 와서 듣는다
가느다란 댓줄기 처마에 닿아 서늘한데
늙은 소나무 그늘 골짜기 가득 푸르구나
어느 때나 티끌세상 떠나 이곳에서 여생을 보낼거나
라고 읊었다. 」
○ 무속헌(無俗軒)
신라 말 고창(古昌 지금의 안동) 성주(城主)였으며 고려 개국의 결정적인 공헌을 하신 태사공(太師公 諱 宣平) 시조님 기초하신 뿌리는 12世에 와서 안동 금산(오늘날의 소산)에 거주하셨던 서윤공(庶尹公 諱 璠 1479 - 1544년, 자 : 文瑞)께서 오랜 세거지를 나와 악록유거[岳麓幽居 악록은 백악산(북악산)기슭, 유거는 속세를 떠나 깊숙하고 고요한 곳에 묻혀 외따로운 삶]하셨으니 그 사셨던 집을 무속헌이라고 합니다. 백부이신 학조대사의 가리킴을 따른 이 길지(吉地)에 대한 이야기는 석실의 서윤공 묘역과 함께 식자(識者) 들에 의해 알려지고 있습니다.
『 기록에 의하면 북악의 모양이 목성이므로 그 기운을 받아 김씨가 왕성하기 위하여 삼금허증(三禽虛中)의 모양으로 지어서 주역의 이치에 맞추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후손이 번성하여 이른바 장동김씨(壯洞金氏)를 배출하였다는 것입니다. - 종로구지 하권 p 966.』 이곳은 서윤공의 증손자인 15世 청음(諱 尙憲 1570 - 1652) 그리고 17世 손자대까지 사셨는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청음께서 석실로 옮기신 것은 만년(晩年)이 가까울 무렵이 아닐까요?
○ 그림으로 보는 두 선조님의 터전
선원(김상용)의 청풍계와 청음(김상헌)의 무속헌은 창의문(彰義門) 아래에 있어 사람들은 창의동 김씨라 하였는데 발음상 창의동은 장의동(壯義洞)으로 줄여 장동으로 불렸습니다. 이곳은 일찍이 청음 김상헌의 5대조이신 판광공 김계권이 살던곳이기도 합니다.
○ 옥호저수형(玉壺貯水形) 또 하나의 명당
학조대사의 지극한 문중사랑은 더하여 서윤공(휘 번 1479 - 1544) 묏자리(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 5)까지 잡아주시니 옥호저수형이고 조선 8대명당중 으뜸으로 무속헌터와 함께 상서로운 기운이 하늘과 맞닿았습니다. 15世 문정공(文正公 諱 尙憲 1570-1652 호 : 淸陰) 형제 이후 300여 년, 역사 속의 안동김씨(安東金氏)를 생각합니다. 받은 보물 소중해 금관자 서 말, 옥관자 서 말, 잘 간직하고 갈고닦아 그 광채(光彩) 끝이 없으리이다.
3, 억불숭유에서 숭불로
안양시 소재 삼성산(관악산) 삼막사 부근에 폭 37. 5센치 높이 103센치 가량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석비가 서 있고, 해서체(楷書體)로 등곡대(燈谷臺)가 음각되어 있다. 옆에는 편평한 바위가 있는데 이곳에서 득도하였다.
○ 세조[世祖 조선 제7대 왕(재위 1455~1468년)]조의 국사(國師)
학조대사는 단종[조선 제6대 왕(재위:1452~1455)]의 죽음 이후 죄책감을 느끼고 불교에 귀의한 세조를 만났으며, 신미(信眉)·학열(學悅)과 함께 선종의 승려로서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1459년(세조5년) 신미대사(信眉大師), 학열(學悅)스님과 함께 월인석보(月印釋譜)을 간행하는 등 여러 고승들과 함께 많은 불경을 국어로 번역 간행하였다. 특히 스승 신미대사를 도와 훈민정음(한글) 보급 및 활용에 크게 기여하였다.
○ 유점사(楡岾寺)와의 인연
1467년(세조13년) 세조의 명으로 금강산(金剛山) 가는 길목의 유점사(楡岾寺)를 중건하였다. 1468년에는 신미대사, 학열스님과 함께 설법을 하여 양반 사대부들 역시에 귀의하거나 신봉하는 자가 나타났다. 그해 1월 역말(驛騎 예전에, 각 역참에 갖추어 두고 관청의 업무에 쓰는 말을 이르던 말)을 받고 파송되었으며, 그가 데리고 가는 장인(匠人) 15인에게도 또한 왕실에서 역말을 내려 주었다. 그해 4월 왕명을 받아 승려 학열과 함께 사신 접대를 준비하였다.
○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수호하다
1476년 《천수경 千手經》을 언해, 교정하였으며, 1482년(성종13년) 정현왕후의 명으로 세종 때부터 시작되었다가 중단된 《증도가남명계송(證道歌南明繼頌)》의 명으로 번역, 완성하였다.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시대에 새긴 대장경 목판. 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리자 고려 고종(1237~1248) 때 다시 새긴 것이다. 고려 후기, 1237~1248년 사이, 8,1258매, 세로 24㎝, 가로 68~78㎝, 두께 2.5~3㎝, 국보 제32호. 해인사 소장. [네이버 지식백과]팔만 대장경 [八萬大藏經] (학습용어 개념사전, 2010. 8. 5., 이영규, 심진경, 안영이, 신은영, 윤지선)
1488년(성종19년) 인수대비의 명으로 해인사 중수 및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대장경판당을 중창하였다. 학조스님의 최고 공적은 팔만대장경을 수호한 일등공신이라는 점이다. 이때 해인사 경내에 세조의 원당(願堂)이 설치됨으로써 해인사는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왕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다.
https://www.hc.go.kr/06572/06700/06763.web
석보상절. 석가모니 일대기를 한글로 적은 책이다
훈민정음 반포 이후 세종 때부터 연산군 때까지 한글로 발간된 문헌의 65% 이상이 불교경전이며, 유교 서적은 5%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불교계의 한글 창제 관련설에 힘을 더하는 대목이다.
대표적인 것이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적은 '석보상절'이다. 이 책은 세종 28년 소헌왕후가 죽자 세종의 명으로 수양대군이 신미 대사의 동생 김수온 등의 도움을 받아 발간한 것이다.
석보상절을 읽어본 세종은 석가여래의 행적에 큰 감동을 받고 장편의 서사시를 읊었고 그것을 받아적은 것이 월인천강지곡이다. 부처님이 백억세계에 화신을 나투어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마치 하늘의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월인천강지곡은 석가여래의 행적을 서사시로 찬탄한 대표적인 불전 문학이다.
훈민정음에는 여러 가지 형태로 불교의 법수가 표현돼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모두 3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훈민정음은 자음과 모음이 모두 28자로 이루어져 있다.
33은 불교의 우주관인 33천을 상징하며, 28은 욕계.색계.무색계 등 삼계 28천을 나타내는 법수다. '나라 말싸미 듕귁과 달라...'로 시작되는 세종의 한글어지는 정확히 108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문으로 적은 어지는 108의 절반인 54자로 이루어져 있다.
신미대사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창제 주역이라면 신미의 제자 학조와 세종의 아들 수양은 훈민정음을 대중화하고 널리 퍼뜨린 인물이다. 광흥사가 왕실 원당으로 수많은 왕실 보물을 간직한 연유도 학조대사를 배출했기 때문이다. 현재 상주의 배 모 씨가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상주본도 원래는 안동에 있는 광흥사 복장유물이었다는 것이 불교계의 주장이다. 광흥사는 신미 대사와 더불어 훈민정음 창제 이후 불경언해에 공을 세운 학조 대사가 있었던 곳이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 정이품송
세조께서 속리산 복천암을 다니는 길에는 정이품송이 있다. 연이 가지에 걸리게 되었는데 하늘의 가리킴인가? 스스로 가지를 들어 어가길을 터 주었고 소나기가 내릴적에 우산이 되어주었다는 전설속의 정이품송으로 어가 행차길에는 신미대사와 함께 학조대사, 학열대사가 있었다.
1464년(세조 10) 세조께서는 신병치료차 속리산 법주사의 복천암을 찾았고 신미, 학열과 함께 대법회를 열었다. 어가가 법주사 남쪽 10리에 이르러 소나무 가지에 걸리게 되었는데 이에 세조께서 연이 걸린다 하신즉 이상하게도 소나무 가지가 위로 올라가 연이 통과하였다고 한다. 이에 세조는 즉석에서 이 소나무에게 정이품(正二品) 내렸다는 것이다.
3, 한글과 학조
○ 창제는 신미 보급에는 학조
10월 9일 우리는 한글날을 기리고 있다. 1443년 창제되고 1446년 반포된 한글(훈민정음)은 세상에 못담을 수 없는 소리가 없을 정도로 과학적이다. 이름하여 훈민정음이라 했는데 집현전 학자는 물론 큰 힘이 되신 신미대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대사께서 얼마만큼 기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러, 특히 불교계의 주장으로 보아 각고의 노력으로 세종대왕을 보필했음은 확실하다. 우리는 세종대왕이 임종 전 침실로 불러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긴 법호를 내렸음에 주목한다. ‘우국이세(祐國利世)’ 즉,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는 글이 있다. 한글창제를 푸는 열쇄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신미대사가 창제에 큰 공헌을 하였음은 흔적을 통한 불교계를 비롯한 학자들의 논문에서 읽을 수 있다.
○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고 간행하여 보급에 앞장서신 학조대사
그러나 신미대사의 제자이신 학조대사는 어떠하였을까? 15세기 후반기에 학조대사는 한글 보급에 있어서 큰 업적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와서야 차츰 알려지고 있어 탐구는 우리 몪이 아닐까? 간경도감(刊經都監 조선 세조 때 불경을 번역하고 간행하던 기관)에서 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 불교 금강경에 대한 해설서. ≪금강경오가해≫ 가운데 야보(冶父)의 송(頌), 종경(宗鏡)의 제강(提綱), 득통(得通)의 설의(說誼) 등 세 가지를 추려서 엮은 것으로, 조선 세종의 명에 따라 세조와 그의 비(妃) 정희 왕후가 언해하였으며 성종 13년(1482)에 학조 대사(學祖大師)가 교정한 뒤 완성하였다. 5권 5책.) 등을 한글로 번역하는 등 활발한 편찬 활동을 보였고 특히 스승이었던 신미대사의 가르침을 받아 국역한 불전 ‘지장경언해(地藏經諺解)를 언해하여는 15세기에 쓰인 것으로 알려졌고 이는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을 최초로 언해한 것으로 현재 원본의 소재지는 알 수 없지만 18세기 영조 당시 간행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학조대사의 원본과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이 각각 작성된 시간은 다르지만 분명 학조대사의 ‘지장경언해’가 근간이 되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세종과 세조 이후 중종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불경번역과 불사에 앞장섰던 당대의 고승으로 그 발자취를 따라가봅니다.
○ 광흥사와 한글
출처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539
2011년 10월24일 대구지방법원 상주 지원 1호 법정. 골동품 가게에서 해례본 상주본을 훔치고 은닉 훼손한 혐의(문화재보호법 위반)로 구속 기소된 배모(48)씨 재판이 열렸다. 배씨는 조모(66)씨가 상주에서 운영하는 골동품 가게에서 상주본을 훔친 혐의를 받았다. 이 날 법정에서는 문화재 도굴 일인자로 알려진 서모씨가 증인으로 출석해 상주본을 경북안동 광흥사에서 훔쳤다고 진술했다. 상주본의 원래 보관처가 드러난 것이다.
의상대사 창건 천년 고찰
안동 광흥사(廣興寺)는 신라 신문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찰로 고려 중흥기를 거쳐 조선시대 왕실 원당(願堂)으로 번영을 누렸다. 왕실 원당 답게 광흥사는 500여칸에 이르는, 안동지방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산 속 암자처럼 아담하다. 1827년 큰 화재로 500여 칸에 이르는 건물이 소실 된 뒤 전쟁의 참화가 겹쳐 번성했던 당시 규모를 회복하지 못했다. 지난 1일 찾아간 광흥사는 고요했다. 잔디 깎는 기계음만 울려 퍼졌다. 그러나 이 사찰이 만만치 않은 사세를 자랑하는 고찰임은 한 눈에도 알 수 있었다. 광흥사 중심 건물 응진전 마당으로 들어서니 수 백년을 뛰어넘어 조선시대로 돌아간 듯 고색창연(古色蒼然)한 건물이 반갑게 맞이한다. 응진전에서는 사시 기도를 올리는 스님의 독경소리가 울려퍼졌다.
재판을 받았던 배모씨는 현재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의 행방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해례본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적반하장격으로 정부를 상대로 1000억원을 요구하며 십수년이 흐른 지금까지 국민들 속을 태우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중요한 이유는 오직 이 책에서만 한글 원리가 적혀 있기 때문이다. 광흥사에서 도난당한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종 28년인 1446년에 발행된 훈민정음 해설서로 국보 제70호인 간송미술관 소장 훈민정음 해례본과 동일한 판본이다.
광흥사에서는 훈민정음 해례본 뿐만 아니라 조선왕실 어첩(御帖)과 유물(遺物) 및 훈민정음 창제 후 한글로 적은 많은 불교 경전을 간직했다. 세조는 법화 화엄 등 경전을 간행하여 봉안케 했으며 세종의 친서(親書) 수사금자법화경(手寫金子法華經), 영조의 친서 대병풍(大屛風), 어필족자(御筆簇子) 등 많은 보물이 광흥사에서 나왔다. 학조(學祖, 1431~1591)대사가 그 중심에 서있다. 그리고 잊혀진 고승과 광흥사를 현 광흥사 주지 범종스님이 이끌어냈다.
학조대사는 조선 초기 인물이다. 1431년 태어난 학조대사는 13세 때 광흥사 산내 암자 애련사로 출가했다. 신미대사가 스승이다. 학조를 본 신미대사는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단박에 알아채고 발바닥을 보니 임금 왕(王)자가 새겨져 있었다.
신미대사는 세종과 함께 한글을 창제한 고승이다. 역사는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을 집필했다고 기록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님이 최근 연구 결과 속속 드러나고 있다. 집현전 학자들은 오히려 화장실에 앉아서 자음 모음을 맞추어 글을 다 익힐 수 있는 아주 쉬운 글이라며 ‘통시글’이라고 멸시했다. 훈민정음은 인도 산스크리트어처럼 소리 나는 대로 적는 문자다. 신미대사는 산스크리트어 전문가였다. 불교 경전을 기록한 문자이기 때문이다.
신미대사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창제 주역이라면 신미의 제자 학조와 세종의 아들 수양은 훈민정음을 대중화하고 널리 퍼뜨린 인물이다. 학조는 세조의 왕사였다. 조선 중기에 보우대사가 있었다면 초기에는 학조대사가 있었다. 광흥사가 왕실 원당으로 수많은 왕실 보물을 간직한 연유도 학조대사를 배출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한글 불경 펴내
세조와 함께 훈민정음 보급에 매진했던 학조대사는 조선 초기 불교를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수많은 한글 불경이 대사의 손에 의해 나왔다. 초기의 ‘지장경언해(地藏經諺解)’, 수양대군이 완성한 ‘금강경삼가해언해(金剛經三家解諺解)’의 교정 인출, ‘천수경(千手經)’ 언해 교정, 세종 때부터 시작되었다가 중단된 ‘증도가남명계송(證道歌南明繼頌)’ 완역이 모두 대사의 작품이다.
학조대사의 발문이 첨부돼 있는 ‘오대진언(五大眞言)’ ‘불정심다라니(佛頂心陀羅尼)’ ‘진언권공(眞言勸供)’도 그의 번역으로 추정한다. 이외 두 번에 걸쳐 해인사 대장경을 간인(刊印)하고 발문을 지었다. 그래서 당대에 학덕이 뛰어나고 문장과 필력이 출중한 문호로 칭송받았다.
세조 이후 중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대형불사도 학조대사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다. 1467년 왕명으로 금강산 유점사를 중창하고 1488년 (성종 19)에는 인수대비의 후원 아래 해인사를 중수하고 대장경판당을 중창했다. 경기도 남양주 광릉의 봉선사도 학조대사가 창건하고 이름 붙였다. 1469년 예종 1년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세조의 능침을 모시고 광릉이라 하고 고려 시대 사찰 운악사를 자복사로 삼았으니 곧 봉선사다. 이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학조대사다. 해인사를 중수하며 직지사도 중수했다.
학조대사로 인해 직지사는 그 때부터 조선 8대 사찰로 부상했고 학조는 황악산인(黃岳山人)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직지사 중창하고 ‘황악산인’
그러나 불교를 억압하던 조선에서 그 많은 대형불사가 순조롭게 진행될 리 만무하다. 비록 왕실 후원이 있었다 해도 보통의 강단과 추진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해인사와 대장경 판당을 중창할 당시 이야기다. 강화도 대장경 판당에 보관하던 팔만대장경은 태조 7년 해인사로 옮겨졌다. 그런데 판당이 너무 비좁고 누추하여 세조는 즉위 4년인 1458년 경상감사에 명하여 비좁고 허술한 판당을 50여 칸 증축했다.
그런 뒤에도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비가 새고 서까래가 썩어 몇 년 지나지 않아 무너질 지경에 이르자 정희왕후는 판당의 중수를 위해 학조를 주지로 임명하고 공사를 주관하도록 했다. 그런데 몇 해 동안 장마와 가뭄이 연달아 겹쳐 공사를 채 시작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정희왕후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정희왕후로부터 약속받은 조정의 지원이 내려지지 않자 학조는 성종 18년(1487) 조정에 나아가 판당을 고쳐주지 않는다면 주지 직을 사임하겠다는 엄포를 놓는다. 성종이 지원을 지시했지만 대간들이 반대하고 나서 결국 왕실 재산으로 판당을 증개축하고 해인사를 중창했다. 지금의 해인사가 그 때 중창한 모습이다.
학식이 뛰어나고 문장이 출중한 학자요 큰 배포와 추진력을 지닌 지도자 자질도 겸비했으니 유학의 나라를 만들려는 관료들 입장에서는 그가 얼마나 밉고 두려웠겠는가? 조선실록은 그를 희대의 요승(妖僧)로 격하시켰다. 그럼에도 학조의 출중한 학식과 문장력만은 거짓으로 기록할 수 없었던지 뛰어난 학승이라는 사실도 함께 적었다.
홍길동에게 무예를 전수했다는 이야기도 전하니 그의 재주가 어디까지인지 가늠키 어렵다. 학조대사는 출가사찰인 애련사에서 입적했다고 전한다. 부도는 스승인 신미대사 곁에 함께 모셨다. 속리산 복천암 높이가 3미터에 이르는 학조등곡화상탑이다.
대사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학조대사는 안동김씨 집안 장남으로 출가해 아래 동생이 맏이 역할을 했다. 둘째가 아들이 없어 막내 동생의 자식을 입양했는데 김번이다. 장동김씨라고 부르는 안동김씨 장동파의 시조다. 김번이 죽어 부인 남양홍씨가 친정에 머물며 시름을 달래는데 학조대사가 그 집 방앗간이 명당이니 김번의 묘로 쓰면 후대(後代)에 금관자(金冠子) 옥관자가 서말이라고 했다. 당상관 이상의 고위 관직에 오른 인물이 수없이 나온다는 뜻이다.
대사의 예언처럼 조선이 망할 때까지 영의정 등 수많은 고관을 배출했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김상헌이 김번의 증손자이다. 김조순, 김좌근, 김병기로 이어지는 3대 60여년 안동김씨 세도가 김번의 직계다. 처갓집에 썼다는 명당이 경기도 남양주 와부리 덕소 석실마을이다.
훈민정음 보급 전파 기지 광흥사
광흥사는 훈민정음의 보급기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25 때까지 광흥사에 훈민정음 목판이 남아 있을 정도로 광흥사는 한글과 밀접하다. 간송미술관과 광흥사에서 나온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이 그 목판으로 인쇄했다. 목판은 그러나 전쟁 중 소실됐다.
묻혀있던 광흥사와 훈민정음 학조대사 인연은 광흥사 주지로 부임한 범종스님의 노력에 의해 다시 역사의 현장으로 나왔다. 스님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광흥사에서 훔쳤다는 서씨의 재판 증언을 예사로 넘기지 않았다. 재판기록을 꼼꼼히 살폈다. 언론에서는 서씨가 대웅전에서 훔쳤다고 했지만 검찰 조서에는 명부전 시왕상이었다.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범종스님은 달랐다. 절도범이 털지 않은 다른 시왕상 복장에도 훈민정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화재 전문가를 불렀다.
스님의 생각은 적중했다. 비록 훈민정음은 나오지 않았지만 훈민정음 창제 당시 한글로 적은 수많은 불경이 들어 있었다.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전까지 간행된 고문헌이 다수 발견됐는데 그 중 <월인석보>와 <선종영가집언해> 등은 훈민정음 창제 초쇄본으로 추정하는 보물이었다.
범종스님은 학조대사가 그랬던 것처럼 한글 홍보에 적극 나섰다. 훈민정음의 창제원리와 불교 교리를 담아 그림으로 그렸다. 발음기호, 한글에 담긴 뜻을 도상(圖上)으로 표현한 ‘훈민정음도’는 범종스님의 창작품이다. 스님은 훈민정음을 이렇게 정의한다. “훈민(訓民)은 하화중생(下化衆生)이며 정음(正音)은 상구보리(上求菩提)다. 불교의 가르침과 한글 창제 의미가 같은 것이다.”
스님의 한글 사랑과 보급 열정이 훈민정음에 10년간 매달렸던 영화감독과 만났으니 오는 7월24일 개봉하는 영화 ‘나랏말싸미’다. 영화는 세종과 신미스님이 만나 백성을 위해 뜻을 모아 나라 글자를 만드는 한글 창제의 숨겨진 이야기를 담았다. 범종스님이 연구한 훈민정음 신미 학조대사 이야기가 고스란히 영화에 담겼다.
안동=박부영 상임논설위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500호/2019년7월3일자]
4, 영면
6, 학조가 한글로 편역한 불경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1047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5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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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4799
육조법보단경언해 https://emuseum.go.kr/m/detail?relicId=PS0100203400600686200000
http://yongin.grandculture.net/yongin/toc/GC0090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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