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학파 6

북학파의 스승 김원행

김원행 1702년(숙종 28)∼1772년(영조 48).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백춘(伯春), 호는 미호(渼湖)·운루(雲樓). 아버지는 승지김제겸(金濟謙)이며, 어머니는 밀양 박씨로 이조 terms.naver.com 북학파 조선 후기에 청나라의 학문과 기술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한 학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북학’이란 청의 학문이나 문물을 뜻한다. [풀이] 조선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청에게 무릎을 terms.naver.com 길러낸 제자들 횃불이 되다 연암(燕巖) 박지원①…홍대용과의 도의지교(道義之交)와 북학파 - 헤드라인뉴스(HeadlineNews) [한정주=역사평론가] 18세기 조선의 문예부흥과 지식혁명을 이끈 세력은 두 개의 재야 지식인 그룹이었다. 그 하..

(북학파)낙론의 대학자들 탕평비를 마주하다

낙론 대학자들이 사도세자 성균관 입학식에 대거 참석한 이유 [이경구의 조선, 철학의 왕국 -호락논쟁 이야기] ⑦ 2차 논쟁 시작되다 www.hani.co.kr 호락논쟁 조선 후기 성리학에서의 인물성 동이에 관한 논쟁. [내용] 호락 시비 혹은 인물성 동이 논쟁이라고도 한다. 처음 이 논쟁은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발생하였다. 한원진(韓元震)은 인물성(人 terms.naver.com

석실서원, 진경문화를 출산(出産)하다

석실서원을 가리켜 진경문화와 북학파의 산실이라고 하였다. 씨앗 된 두 할아버지(13대조 청음과 그 형님 선원) 정신이 파종되었는데 병자호란을 통해서 나타난 불굴의 충절을 본받기 위함이다. 싹트고 무럭무럭 자라 그 열매 조선 후기 양식으로 되었는데 1870년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있었다. 세월은 흔적마저 지우려는가? 옛 문화를 오늘에 되살림은 가치이기 이전에 순종(順從)이라고 할 수 있다. 배출된 선현은 줄줄이 등댓불이었고 배향록 또한, 문제 될 수 없다. 잊혀 가는 현실 속에 벽은 높아만 가고 관련 문중은 외면하니 부끄럽다 어찌 아니 하겠습니까?. 그런 속에서도 일깨우는 분들 있음은 기여한 바 크기 때문이다. 얽히고설킨 실타래 대신할 수 있는 대안은 없을까? 농암[農巖 金昌協 1651(효종 2) ..

석실서원 백두대간을 노짓다

진경문화와 북학파의 산실, 석실서원(아래 클릭) '조선의 화성' 겸재, 중국풍 벗어나 조선의 실제 모습 그리다 겸재 정선 진경문화의 요람 석실서원 · 황호택(서울시립대) 이광표(서원대) 교수 공동집필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1561~1637)... www.ajunews.com 석실서원(石室書院)은 1656년 선원 김상용과 청음 김상헌의 도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창건되었다. 처음 청음(김상헌)의 정침(正寢 와부읍 덕소리 312)에서 출발하였다고 추정하는데 얼마 후 십 여리 떨어진 미호변으로 옮겼고 이어 1663년(현종 4) 석실사(石室祠)라는 편액을 하사받고 사액(賜額)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그 정신은 祖孫(김창협과 김원행)을 통해 나타났는데 조선 후기 교육사업의 요람이었다. 1697년엔 김수항, 민정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