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리 9

향리의 역사 문화유산

1, 향리(香里)의 지명 유래는 향곡리(香谷里)에서 비롯하였다. - 상골: 향리의 우리말 이름이다. 향기나는 골짜기! 이곳은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았을까? 먼 옛날은? 깊이 추적할 수 없어 이는 숙제이다. 굵직한 역사로는 조선 중기 교하노씨 노직(盧稙 1536-1587), 노직(盧稷 1545-1618) 형제의 선영이 자리를 잡았고 이후 영안부원군 김조순은 조부인 김달행(金達行 1706-1738)의 묘비명에 이르기를 추읍산 아래 향곡리(香谷里)이라고 하였다. 미호(渼湖)께서는 또한, 지석에 이르기를 「여주 강물 북쪽이여 우산(牛山)의 양지쪽」이라고 읊었는데 이는 초장지인 여주 대신면 초현리의 몽와, 죽취 묘역 언저리라고 한다. 추읍산과 그 산자락에 둘러싸인 남촌, 넓은 호수 펼쳐지고 머물고 싶은 곳! 무릉도..

선영 답사

4월 10일 개군면 향리 선영에 가기로 휴암공파 회장 김용현씨와 약속하여 길을 나섰다. 휴암공파에서 안동김씨 문헌록을 만들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있는데 이날은 저의 조상님 묘역을 탐방하려 함이었다. 김용현씨, 사무국장 김관동씨, 대동한 지관 손정상씨와 동행하였다. 일요일인데도 비교적 막힘없이 향리에 도착하고 제일 먼저 8대조 김달행 묘역을 안내하였고 이웃 6대조 휘 용순, 5대조, 휘 유근 묘역을 답사한 일행은 곧 골밭 7대조 휘 이기 묘역과 고조 휘 병주 묘역으로 안내하였다. 향리 묘역을 답사한 일행을 이웃 마을인 계전리 이중 묘역으로 안내하였고 나오면서 대모도 뵐 겸하여 묘막이었던 정한 아저씨 집을 찾았다. 같은 휴암공파라 좋아하는 관동, 용현씨는 정한, 용한 아저씨와 담소를 나누고 앞으로는 문중 ..

향리의 역사를 추적하였습니다.

개군면 향리에는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았을까? 멀리 원시시대에는?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 고구려의 영역으로 교차했을 것이다. 고려 때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어떤 역사적 사건은 없었을까? 내가 이 작은 시골 마을을 두고 왜 이렇게 집착하는 것일까? 이 모든 것은 저의 8대조 이하 조상님들이 뭍혀 있는 곳 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저의 8대조 김달행의 묏자리가 이곳으로 오기 전 향리의 모습을 단편적이나마 추적하였다. 여주군 개군산면 향곡리(현 양평군 개군면 향리)는 조선 선조 때 교하노씨 노직, 노직 형제의 선영이었다. 노직 형제의 조상님과 후손분의 묘역이 능안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노직 형제의 기록은 선조 실록 등에 나오는데 여기서는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의 기록을 옮긴다..

추읍산 정상에서 바라본 나의 고향

가운데 보이는 향리 저수지는 바로 우리 집 앞에 있다. 멀리 남한강이 보이고 개군면 계전리와 여주시, 대신면, 흥천면, 능서면이 눈 아래 들어온다. 추읍산과 그 산자락에 둘러싸여 있는 내 고향 양평군 개군면 향리! 저수지와 황금빛 일렁이는 들판은 나의 고향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 봄에는 온 산이 진달래꽃으로 물들고 산수유꽃과 개나리꽃이 마을을 뒤덮어 저수지 물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내 고향! 여름에는 녹음 우거지고 추읍산은 물속에 투영되어 강태공들이 많이 찾아오는 내 고향! 가을에는 농민들의 땀이 결실을 보아 황금 들녘과 추수하는 농민이 더욱 고맙게 느껴지는 곳! 겨울에는 저수지 물이 꽁꽁 얼어 썰매 타고 눈사람 만들고 즐겁게 뛰어놀던 그곳!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그때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