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贊成公(達行) 가문

나의 뿌리(8대조~5대조)

추읍산 2010. 4. 9. 03:42

나의 뿌리(8대조~5대조)

 

 

 양평군 개군면 향리 저수지 제방 둑에서 바라본 고향 마을, 아랫상골이다. 추읍산이 마을을 바쳐주고 있으며 마을을 감싸는 작은 산에는 8대조로부터 부친 묘소까지 자리하고 있다.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였으며 평생을 보내고 있다.

 

 

8대조 묘역 앞이다. 오른쪽이 8대조 김달행(金達行), 왼쪽(조금 떨어진 곳)은 우측이 6대조 김용순(金龍淳), 좌측이 5대조 김유근(金根) 묘역이다.

 

 

8대조 김달행(金達行 1706~1738 숙종 병술 11월11일생)의 묘소이다.

 

죽취 김제겸의 넷째 아들이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公의, 증조 할아버지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 1629~1689), 1722년 신임사화때 할아버지 몽와 김창집(夢窩 金昌集1648~1722), 아버지 죽취 김제겸(竹醉 金濟謙 1680~1722)께서 사사(賜死)되시었다. 이때 큰형님 취백헌 김성행(翠栢軒 金省行 1696~1722)마저 고문으로 장사(杖死)되시었다. -참고할 곳: (13) 일묘사충(一廟四忠 , 이어서 (14)기사환국(己巳換局), (15)신임사화(辛壬士禍)

 

한글박물관에 소장된 현대어 번역 돌아가신 아버님의 유서에 의하면 [필자의 9대조이며 위 묘소의 주인 김달행의 아버지 충민공 죽취 김제겸 할아버지는 1721년 12월 12일 울산으로 유배당하시였다. 다음 해인 1722년(경종 2) 4월 24일 유배지를 찾아온 셋째 아들 미호 김원행(김달행의 바로 윗 형) 할아버지께 유언하시고 한글로 써 주신 것을 미호 할아버지께서 정리(整理)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시 상황이 처절하였다.

참고할 곳: (16) 돌아가신 아버님(죽취 김제겸)의 유서, 맺는..

 

유언에 의하면 (내가 이제 죽게 되니) 달행(金達行)은 글공부가 끊기게 되어 가히 애닯지만, 장인 섬기기를 나를 섬기듯 하며 글을 배우도록 하여라. 라는 내용이 있다. 조선 유일의 일묘사충(一廟四忠) 산증인의 중심에 계셨던 할아버지께선 그러나 4대에 걸친 피눈물을 목격한 탓인가? 33세로 짧은 생을 마감하셨다. 묘소는 양평군 개군면 향리 산 42이며 兄 미호 김원행(渼湖 金元行 1702~1772)이 주선하시고 表(비석)는 손남(孫男), 영안 부원군 김조순(永安 府院君 金祖淳 1765~1832)이 세우다.

 

 

 

8대조 김달행(金達行 1706~1738)의 묘소를 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보았다. 앞 큰 글씨는 중국의 소식(蘇軾, 1037~1101 중국 북송 시대의 시인이자 문장가)의 글씨(集: 모은 글)이고 옆면과 후면은 한호(韓濩, 1543~1605, 號: 石峯)의 글씨(集)이다. 할머니는 한산이씨로 혜경궁 홍씨의 어머니는 동생이다.

8대조 김달행 묘소 위 용미에서 본 향리 저수지와 안산의 전경이다. 앞에 작은집은 마을 회관(아랫상골, 향리 2반)이고 저수지 둑 너머(도토토)에는 신축된 집(둑 우측이라 사진에서는 안 보인다.)이 들어섰다.

 

 

7대조 김이기 묘역으로 아래 골밭에서 보았다. 묘역의 윤곽이 나무에 가려 희미하다.

 

 

7대조 김이기(金履基, 1724~1790 字 德汝, 光州牧使, 贈吏曺判書『비석을 만들때는 贈吏曹參議 였으나 그후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묘역이다.


마을 위쪽에 자리하였으며 골밭산소라고 불렀다. 비석의 글씨는 모은 것으로 앞 큰 자는 소식. 옆 후면 작은 자는 한호(한석봉)의 글씨로 8대조와 같다.


김달행의 장자이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할아버지께선 이모인 혜경궁 홍씨의 어머니, 한산이씨의 보살핌 속에서 삶을 이어 가셨다.

한중록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이모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께서 이종들을 자식같이 불쌍하게 여겨 양식과 옷을 대여 주셔서 배고픔과 추위를 잊게 하였다고 기록해 당시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어렸을 적들은 구전에 의하면 공께서는 공부하실 때 훼초리로 종아리맞으시며 구더기를 파냈다고 한다. 엄격한 스승의 가르침일 것이다.

 

 

 

7대조 김이기 묘역(위 용미)에서 마을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의 비석은 오후, 햇살에 반사되어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11시 방향으로 직선거리 약 6km이다. 산 위에서 보면)에서 보면 한 줄기 빛으로 피어오른다고 한다.

 

 

6대조 김용순(金龍淳 1754~1823영조 갑술 2월 5일생,字 施伯) 의 묘비이다. 묘소는 사진이 등록되지를 않아 두 번째 사진인 8대조 묘역 앞에서 찍은 그림을 참조하자

1777년(정조1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공조참의에 이르렀다. 증 좌찬성이다.

 

 

 5대조 김유근(金逌根(1785~1840 정조 을사 9월 19일생,  字: 景先. 號: 黃山. 시호: 文貞)의 묘비이다. 묘소는 사진이 등록되지를 않아 두 번째 사진인 8대조 묘역 앞에서 찍은 그림을 참조하자.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장자이나 종백부인 김용순에게 입후 되었다. 1810년(순조 10년) 식년 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판돈령부사에 이르렀다. 황산 김유근은 한때 군국의 사무를 짊어지시기도 했으나 정치보다는 학문과 예술을 더 사랑하신 분입니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 이재 권돈인(彛齋 權敦仁 1783~1859) 그리고 선배이신 자하 신위(紫霞 申緯 1769~1847) 등과 학문을 연구하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하였는데 이분들은 19세기 문화계에 한 축을 이루었던 분들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