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직계조상님

(13) 일묘사충(一廟四忠)

추읍산 2009. 6. 17. 07:40

이해를 돕기 위한 도표(2014, 5, 10 추기)

 

 

 

안동김씨 문정공(金尙憲)파

 

4충 성   명 출 ~ 졸 경력 관련사화 전 개 결 과 피해자 비 고
1 김수항(金壽恒 청음 김상헌의셋째 손자) 1629-
1689
 
인조 7-숙종 15
영의정 기사환국(1689,
숙종 15)
희빈장씨의 아들 윤(昀)의 원자정호 문제 찬성은 남인 반대는 서인 희빈장씨의 중전오름과 남인집권 송시열
김수흥
 김수항 김익훈 남구만 등 서인측100여 명
1694년(숙종 20)
복관1886년(고종 23) 현종묘정에 배향
2 김창집(金昌集 김수항의 장남) 1648-
1722
 
인조26-
경종 2
영의정 신임사화(1721-1722년, 경종 1-2 )
세제(연잉군으로 후일 영조)대리청정 문제와 목호룡의 고변
단순참정(參政)에서 대리청정(代政)으로 비화
 
무고당함
소론집권과 노론몰락
(이하 같음)
 
거제도 유배4월 29일 성주에서 사사됨
노론4
대신인
 
김창집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등
350여명
1725년(영조 1)  복관, 영조의 묘정에 배향
3 김제겸(金濟謙 김수항의 장손) 1680-
1722
 
숙종 6-경종 22
증좌찬성 무고당함 울산으로 유배, 8월 24일 부령에서 사사됨 조성복
김민택과 함께 三學士로 꼽힘
4 김성행(金省行(김수항의 증장손) 1696-
1722
 
숙종 22-
경종 2
증영의정 무고당함 5월 19일 옥중에서
장사(杖死)
 



一廟四忠의 완성

 

 

 


 안동김씨 을미보 (1985 판) 首編에서 사진 찍었다.

 

忠臣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諡忠正公金省行之門 正宗甲辰(1784, 정조 8)八月命旌今上戊午(1858, 철종 9)三月日加贈上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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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이란 무엇인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죽음도 두렵게 생각하지 않고 양심에 따라 소신껏 자기 갈 길을 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시작할 때 의도된 생각이 있고 그리고 나타난 결과가 있습니다. 나타난 결과는 그 사람을 평가할 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는 옳은 방향에서 추진한 일이 그 결과가 아름답게 또는 나쁘게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옳은 일을 추진하고 그 결과도 아름답게 나타났다면야 더 바랄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충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 그 당시 국가와 사회의 가치관을 위해 하나뿐인 생명에 연연하지 않고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 했다면 그리고 그 결과가 하나뿐인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최선을 다해 국가정의를 구현 모든 이의 본보기로 되였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겠습니까!

 

그런데 이 충성스런 이야기가 4대에 걸쳐 있었던 일이라면 이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4대에 걸쳐 하나뿐인 생명을 버릴 각오로 그리고 실지로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충성을 다한 가문이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 조선조 유일의 일묘사충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나라 유사(有史) 이래 유일 가문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단군(檀君)이래 4대에 걸쳐 그것도 장손계통으로만 목숨 바쳐 충성을 다한 가문은 안동김씨 문정공파 청음 김상헌의 손자인 문곡 김수항(文谷 諱 壽恒) 가문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김수항, 그 큰아들 몽와 김창집(夢窩 諱 昌集), 그 큰아들 죽취 김제겸(竹醉 諱 濟謙), 그 큰아들  취백헌 김성행(翠柏軒 諱 省行)을 가리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어머님인 풍산홍씨로부터 단편적이긴 하나 16대조 서윤공 김번

(庶尹公 諱 璠 1479 - 1544)

할아버지 묏()자리에 얽힌 이야기, 13대조 청음 김상헌(諱 尙憲 1570- 1652)과 그 형님 선원 김상용(諱 尙容 1561 - 1637)할아버지의 병자호란 때 충성을 다한 이야기, 11대조 문곡 김수항 할아버지 이하 4대에 걸친 일묘사충의 피눈물나는 이야기, 6대조 영안 부원군 김조순(諱 祖淳, 1765 - 1832)과 5대조 황산 김유근( 逌根, 1785 - 1840) 할아버지, 순원왕후(1789 - 1857), 외증조(外曾祖) 되시는 홍철주[洪澈周 1834 - 1891 |: 백영(伯泳)|시호 : 효헌(孝獻)]등 집안에 구전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왔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성장한 곳은 양평군 개군면 향리

(楊平郡 介軍面 香里, 당시는 여주군)

인데 또 한곳의 선영이 있었습니다. 여주군 흥천면 효지리인데 그곳에는 5대조 황산 김유근

[영안 부원군 김조순의 장자이나 종백부 김용순에게 입후],

그리고 6대조 김용순

[龍淳 1754 - 1823 |: 시백(施伯)]

의 묘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모두 개군면 선영으로 모셨습니다).

선영은 10km 거리이고 당시(950 - 60년대 초)는 대중교통이 불편하여 걸어서 어머니와 함께 1년이면 몇 차례씩 다녔습니다. 여주군 대신면 양화 나루에서 배를 타고 남한강을 건너 흥천면 효지리를 다녔는데 돌아올 때는 중간 기착지로 여주군 대신면 초현리 아래새재 마을에 들리곤 하였습니다.

 

그곳은 문곡 김수항 할아버지의 종가댁으로 당시 종손이신 김익한 아저씨께서 사셨습니다. 그곳엔 대방 마님이라고 불리던 노() 할머님(김익한 모친)이 계셨는데 그 할머님으로부터 위 일묘사충에 얽힌, 그 당시의 피눈물 나는 글씨, 한글로 그것도 붓으로 기록한 책인 죽취 김제겸의 선세유교, 충민공 임인유교(先世遺敎, 忠愍公 壬寅遺敎)라는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위 책이 쓰이게 된 역사를 추적합니다. 추리하면, 9대조 충민공 죽취 김제겸 할아버지께서 1721년 12월 12일 울산으로 유배를 당하시고 다음 해인 1722년 4월 24일 찾아온 셋째 아들 미호 김원행(諱 元行 1702 - 1772) 할아버지께 유언하시고 한글로 써 주신 것을 미호 할아버지께서 정리(整理) 하신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 한글 유서(본 문장 끝부분에 싣겠습니다)를 기초로 피눈물의 현장까지 추가한 것입니다. 김제겸은 울산 유배지에서 부령으로 옮겨지고 1722년 8월 24일 사약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잠깐 읽는 분의 혼돈을 피하고자 말씀드리자면, 미호 김원행 할아버지는 농암 김창협(諱 昌協 1651 - 1708) 의 아들 김숭겸(金崇謙1682 - 1700)에게 입후 하였습니다.

  

이 피눈물나는 기록을 어머니께서 저희 보라고 붓글씨로 옮겨 놓으셨고 그리고 60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문곡 김수항의 종가댁인 그곳 마을 뒷산엔 위에서부터 몽와 김창집 묘소, 죽취 김제겸 묘소, 취백헌 김성행 묘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1990년대 초 복원한 일묘사충

(一廟四忠, 철종대왕 어필)

현판이 있는 조그마한 각()이 있습니다(

김창집의 부친인 문곡 김수항의 묘소는 남양주시 이패동 돌누께 마을에 있습니다).

필자는 300년 전 있었던 장희빈(張禧嬪)이라는 여인으로 말미암아 잉태되고 전개되는 이 슬픈 이야기 일묘사충에 대해서 그 중점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1689년 있었던 기사환국으로 인하여 문곡 김수항은 사약을 받았습니다. 이로부터 33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1721년과 1722년에 걸친 신임사화라는 피바람이 불었습니다. 1722년 김수항의 큰아들 김창집, 그 큰아들 김제겸도 사약을 받았습니다. 이때 김제겸의 큰아들 김성행은 누명을 쓰고 고문으로 운명하십니다. 4대에 걸쳐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충성을 다한 이 슬픈 文忠公 文谷(김수항) 문중의 역사는 후에 나라로부터 모두 복권되고 명부조, 일묘사충, 4대불천지위, 4대충신(命不祧, 一廟四忠, 四代不遷之位, 四代忠臣) 이라는 크나큰 영광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이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주는 큰 교훈으로 다가옵니다.

 

 

 

죽취 김제겸의 선세(임인)유교로 필자의 어머님께서 필사하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