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직계조상님

(14) 기사환국(己巳換局)

추읍산 2009. 6. 17. 07:52

 

문곡 김수항의 묘소로 남양주시 이패동 돌누께 마을에 있다.

 

1689(숙종 15)에 일어났습니다. 숙종, 경종대왕 시절에는 붕당 정치로 말미암은 당쟁이 극심하던 시기로 서인(西과 남인(南人) , 숙종 후기에는 이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려 서로 생사(生死)를 가르는 다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기사환국이란 1680년 경신출척(庚申黜陟)으로 실세(失勢)하였던 남인이 1689년 원자정호(元子正號) 문제로 재집권한 사건을 가리킵니다. 숙종은 정비(正妃)인 인현왕후 민씨

(仁顯王后 閔氏 1667- 1701)

보다는 숙원 장씨

(張氏  ? - 1701)

를 편애하였고 인현왕후 민씨를 멀리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숙원장씨는 168810월 왕자 윤()을 낳았고 16891월 초 왕자 윤을 원자로 책봉합니다. 원자는 세자로 그리고 다음 대의 국왕으로 옮아가는 것이 순서였습니다.

 

당시는 주자학(朱子學, 性理學)이 통치이념인 시대로 이는 정비소생으로 원자를 정하여야 하는 원칙에서 크게 어긋나 있었고 더구나 인현왕후 민씨는 23세라는 젊은 나이로 앞으로 충분히 후사(後嗣)를 볼 수가 있는 나이였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이 당시의 법도였고 정의였습니다.

 

이에 서인들은 일제히 반대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숙종의 결심은 확고부동하였고 이를 종묘사직에 고하게 됩니다. 이로써 원자 정호 문제는 끝났습니다. 그런데 당시 대로(大老)로 추앙받던 우암 송시열

[尤庵 宋時烈 1607- 1689 |: 영보(英甫)|: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시호: 문정(文正)]

이 향리인 충청도 회덕에 은거해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반대상소를 올려 정면에서 비판하고 나섭니다. 이에 서인들은 우암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감탄하고 있었고 우암 송시열을 지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숙종의 격노를 불러왔는데 이때 남인 이현기

(李玄紀 1647 - 1714)

등이 송시열의 주장을 반박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에 따라 서인은 몰락하고 남인이 재집권하는 기사환국(1689)을 불러오고 말았습니다.

 

이때 문곡 김수항의 바로 위 형님 퇴우당 김수흥은 영의정에서 파직당하여 장기(長鬐)로 유배되고 이듬해 배소에서 세상을 떠나십니다. 역시 영의정을역임하신 문곡 김수항은 숙종의 어명으로 태조(太祖) 이성계의 초상을 전주(全州)에 모셔놓고 돌아오던 중 남인의 탄핵을 받고 진도(珍島)로 유배당하였고 1689328일 사사(賜死)하라는 숙종의 어명으로 49일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게 됩니다(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소개하는 정민 교수의 가훈과 유언 독서하는 종자가 끊어지지 않게 하라.” 는 보는 이로 하여금 눈물을 자아내게 합니다).

 

당시 83세였던 우암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당하였다가 다시 국문을 받으려고 서울로 압송 중 정읍(井邑)에서 1689724일 사사되었습니다. 그를 따르는 수많은 문도가 눈물로 이를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제가 어릴 때 들은 어머님의 말씀 중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우암 선생님이 약 사발을 받을 때 사약을 마시면 그대로 아래로 빠져나와 반복해도 사약의 효과가 없었다. 이는 우암께서 평소 속병이 있어 당신의 오줌을 늘 장복(長服)하셨는데 이 오줌 적이 장에 누적되어 있어 사약의 독극물이 그대로 장을 통과 밖으로 배출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우암께서는 발뒤꿈치로 항문을 바치고 사약을 받고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암 선생님의 나라 사랑하시는 우국충정의 한 일화(逸話)로 보입니다. 우암 송시열의 문집 우암집(尤庵集) 등에서 보면 스승이신 청음 김상헌, 그리고 문곡 김수항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우암 송시열은 문곡 김수항보다 15년 위인데 두 분 사이엔 연령을 초월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많이 전해옵니다. 이 기사환국 때 무려 100여 명의 서인이 사형, 유배, 삭탈관직 당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정권은 서인에서 남인으로, 인현왕후 민씨는 서인으로 강등되어 사저로 쫓겨났고 희빈 장씨는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후에 문곡 김수항은 현종묘정(顯宗廟廷)에 배향되고 영평(永平)의 옥병서원(玉屛書阮), 영암(靈岩)의 녹동서원(廘洞書院),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진도의 봉암사,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