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직계조상님

(15) 신임사화(辛壬士禍)

추읍산 2009. 6. 17. 08:48


1720년 장희빈이 생모(生母)인 원자 윤(昀)이 33세로 숙종의 뒤를 이어 조선 제20대 왕으로 즉위하니 이분이 경종대왕(景宗大王 1720 - 1724)입니다. 경종은 조용하시고 정이 많으시며 형제간에 우애가 깊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병이 많고 후사가 없는 불행하신 분 이 시기도 합니다.


경종 1년과 2년째 해인 1721 - 1722년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정국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왕조국가에서는 나라의 근본을 정하는 후사 문제가 가장 중요하였고 따라서 1721년 8월, 노론 4대신인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1663 -1722), 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1658 - 1722),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1660 - 1722)는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상소하고 이를 소론 측의 반대에도 실행케 하였습니다.

 

그해 10월이 되었습니다. 노론 측의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 조성복(趙聖復 1681 - 1723)이 연잉군으로 하여금 국정에 참청(參聽)하여 견문을 쌓게 하고 가부(可否)를 상확(商確: 서로 의논하여 확실히 정함)할 것을 청합니다. 그러나 경종은 자신의 병약함을 이유로 “대소(大小)의 국사 모두를 세제로 하여금 재단(裁斷)하게 하라.”라는 대리청정을 명합니다. 연잉군과 노, 소론의 모든 중신은 대리청정 명을 거둘 것을 청합니다. 경종은 이를 명하고 철회하기를 반복하여 혼란만 가중시켰습니다. 따라서 대리청정 명이 경종의 뜻이라고 생각한 노론은 이에 관한 절목(節目)을 마련합니다. 그러나 소론 측의 우의정 조태구(趙泰耉 1660 - 1723)가 당시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던바 대리청정은 철회되었습니다.


소론측에 의한 노론 공격은 1721년 12월 김일경(金一鏡 1662~ 1724)등의 상소로 최고조에 달하였고 그 첫 번째 표적은 김창집이었음은 물론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노론 4대 신인, 김창집은 거제도(巨濟島), 이이명은 남해(南海), 조태체는 진도(珍島)로 귀양가서 위리안치 되었고, 이건명은 세제 책봉 주 청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직후인 1722년 4월 나로도(羅老島)로 유배되었습니다. 1721년 12월부터 일어난 이 사화로 말미암아 수십 명의 노론인사는 대거 처벌당합니다. 이때 김창집의 아들 김제겸은 울산(蔚山)으로 유배당하였습니다.

 

병약하고 후사가 없는 경종 대왕, 이에 따라 "삼종(三宗: 孝宗, 顯宗, 肅宗)의 혈맥을 지키라는 숙종의 유교(遺敎)를 받들어서" 연잉군으로 국본을 정해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하려는 노론 측의 주장과 이를 아직 젊은 경종에게 대한 불충으로 간주하려는 소론 측의 주장은 어느 쪽 주장이 옳은지 짧은 지식의 소유자인 저로서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는 대의 민주주의(代議 民主主義)와 삼권분립(三權分立)이 없는 왕조국가(王朝國家)인 조선(朝鮮)에서 붕당정치가 낳은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1722년 3월 27일 목호룡(睦虎龍 1684~ 1724)의 고변(告變)이 터집니다. 후일(영조대왕 때) 무고(誣告)로 밝혀진 이 고변 내용은 노론 명가(名家)의 자식들이 숙종 말년에 세자(경종)를 시해(弑害)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정국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옵니다. 이로 말미암아 김창집의 장손인 김성행, 이이명의 아들 이기지 등 많은 사람이 혹독한 고문 속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며 죽어갔습니다.족보에 실린 김성행의 당시 모습을 보겠습니다.

 

景宗壬寅 被睦虎龍變書 委官欲得誣供爲動搖國本計 及就訊 囑(촉)府卒堅係其髮(발 터럭))於(어)後 恐其不勝杖 而首或少動則歸之承款(관 항목)也 脛(경 정강이)骨盡碎 氣息將絶 終不易(역 바꿀)辭(사 말씀) 是以儲位獲安 五月十九日 竟(경 마침내)死獄中 英祖乙巳伸雪 屢贈至上相 諡忠正 危身奉上曰忠 以正服之曰正 特命不祧 御書廟額 曰一廟四忠 (金省行)

 

경종 임인년 목호룡의 변서를 당하여, 委官(위관)이 거짓으로 꾸며대는供招 (공초)를 얻어 나라를 동요하는 죄를 뒤집어 쓰이고자 하는 것을 기본계략으로 삼았는데, 訊問 (신문)에 나아감에 미쳐, 府卒 (부졸)에게 뒤에서 그의 머리를 견고하게 매어 줄 것을 부탁하였는데, 그가 杖 장을 못 이겨서 머리가 혹시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죄를 자백함에 돌아갈까 두려워서였다. 정강이뼈가 다 부서지고, 기운과 호흡이 끊어 지려해도 끝내 말을 쉽게 하지 않았다. 이러한 까닭에 王世弟(儲) <왕세제(저)>의 位(위)를 안전하게 얻었다. 5월 19일 끝내 옥중에서 돌아 가셨다. 영조 을사년(1725 영조 1, 140510 추기)에 伸寃 (신원)되었고 거듭 追賜 (추사)되어 재상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정이니 자신을 위태롭게 하면서도 임금을 받들었기에 말하기를 忠이라하고, 정직으로 복종하였기에 말하기를 정이라 하였다. 왕이 특명을 내렸으나 祧遷 (조천)되지 않았다. 임금이 賜額 (사액)한 묘액에 말하기를 一廟四忠 일묘사충이라 하였다.

 

 

委官: 죄인을 추국(推鞠)할 때 의정 대신(議政大臣) 가운데서 임시로 선임하던 재판장

공초[供招]: 조선 시대에, 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던 일. 府卒: 관아 에 근무하는 병졸들. 誣供: 거짓으로 꾸며대는 공초(供招). 伸寃: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버림. 追賜: 추가로 내림. 祧遷 -원조(遠祖)를 합사하는 사당을 옮기는 일 賜額. 承款: 죄를 자백함.

上相: 재상(宰相)의 높임말.   : [쌓을 저] 동궁. 태자

                                                                                                           -------9대손 김창현 제공

 

 

거제도에 귀양 가 있던 김창집은 목호룡 고변 사건으로 심문을 받으려고 서울로 압송되는 중 성주에 이르러 사약을 받게 됩니다. 이때 인현왕후의 오빠 민진원(閔鎭遠 1664~1736)도 귀양 차 이곳에 와 있다 서로 만나게 되었는데,할아버지께서 민진원을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 내 평생 사업이 오직 정책(定策, 동궁 책봉을 정함)한 일인데 지하에 들어가 선왕을 뵈어도 부끄러움이 없을까. 동궁이 편안하다면 죽은들 또 무엇이 한이리오! ” 하면서 죽음 앞에서도 웃고 말하는 것이 평상시와 같았고 조금도 언짢은 기색이 없었다고 합니다. 19) 여주군사 제2권 p230. --------경북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에는 몽와 김창집의 충절(忠節)을 기리는 충헌각(忠獻閣)이 세 위져 있었는데 6, 25때 파괴된 것을 성주군 에서는 2007년 6월 13일 충절 어린 이곳을 복원하고 이창우 성주군수, 이의근 전 경북지사, 이하영 복원사업회 회장 등 관계자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충헌각 복원 준공기념식이 열렸다고 합니다. --참고: 성주신문, 2007, 6, 23. 사회/ 문화,

이때가 1722년 4월 29일로 75세였습니다. 20) 당시 상황은 정민 교수 홈페이지, 가훈과 유언 “굽어보고 우러러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다.”에서 상세하게, 그리고 여주군사 7권 pp 603~620 김창집 묘지명에서는 몽와 할아버지 전반을 깊이 있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김창집의 아들 김제겸은 울산 유배지에서 부령으로 옮겨지고 1722년 8월 24일 사사 되었는데 이는 당시 죽은 조성복, 김민택(金民澤 1678~ 1722)과 함께 삼학사(三學士)로 꼽힙니다. 21) 이에 제겸이 적소에서 화를 만나서 公(김창집)의 묘측에 반장하고 큰 며느리 및 조카, 아들, 손자는 연좌하여 7개군으로 유배하였다. --또 집을 파서 연못을 만들었다.”고 여주군사 7권 p612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고통스러운 상황은 연구하여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신임사화에서 참형(斬刑)을 받은 자가 20여 명, 장사(杖死)된 자가 30여 명, 그들 가족으로 교살(絞殺) 된 자가 13명, 유배된 자가 114명,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녀자가 9명, 연좌(連坐)된 자가 173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 신임사화로 말미암아 1722년 몽와 김창집, 죽취 김제겸, 취백헌 김성행의 3대가 억울하게 희생되었고이보다 앞서 33년 전인 1689년 기사환국으로 문곡 김수항까지 사사되었으니 일묘사충 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몽와 김창집은 영조묘정(英祖廟廷)에 배향되고 과천의 사충서원 (四忠書院 지금은 하남시), 거제의 반곡서원,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에 배향되었습니다.


신임사화때 화를 입으신 노론 4대신을 모신 하남시의 사충서원 제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