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일묘사충(一廟四忠)

독서하는 종자가 끊어지지 않게 하라

추읍산 2009. 6. 21. 18:30

아랫글은 2009년 정민교수의 한국한문학 홈페이지(가훈과 유언 18)에 실린 글을 옮긴 것으로 작자이신 교수님의 양해를 받은바 있습니다.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아들에게 남긴 유언[遺戒六則] 

 내 지위가 재상의 반열에 올랐고, 나이가 예순을 넘겼다. 명을 받아 죽는다 해도 다시 한스러울 것은 없다. 다만 한스러운 것이 있다. 세 조정에서 망극한 은혜를 입었음에도 터럭만큼의 보답함도 없이 마침내 큰 욕됨에 빠져 충성 하려던 뜻을 저버리고 만 것이 첫 번째 한스러움이다. 젊어서부터 배움에 뜻을 두고 의리서(義理書) 보기를 좋아하여, 늙도록 감히 이 뜻을 잊지 않았었다. 하지만 나약하고 게으름이 습관이 되어 능히 단 하루도 그 힘을 실답게 쓰지 못해 마침내 들은 것 없이 죽게 되니 이것이 두 번째 한스러움이다. 비록 진작에 세상 길에 나오긴 했어도 벼슬에 대한 뜻은 실로 적었다. 성품이 산수를 좋아하여 언제나 벼슬을 그만 두고 한가롭게 지내며 적막한 물가에서 노년을 보내려 일찍이 백운산 가운데 띠집을 얽으려고 했었다. 뜻은 실로 여기에 있었으나 세상 일에 얽매여 마침내 처음 품은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니, 이것이 세 번째 한이다. 이는 너희들이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이를 써서 보인다.

나는 위태로운 때를 만나 오래도록 있지 말아야 할 자리를 외람되이 차지했다. 널리 백성을 건지는 책임은 본시 내가 감당할 바가 아니었다. 관직과 나라를 병들게 한 죄는 진실로 이루 다 속죄할 길이 없다. 하지만 임금을 사랑하는 한결같은 마음만은 귀신에게라도 물어볼 수 있다고 스스로 말하겠다. 오늘에 이르러 구구한 이 마음 또한 스스로 말할 길이 없고 보니, 다만 마땅히 후세에 양자운(揚子雲)이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 일찍이 상례와 제례는 검소하게 하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나는 보잘것 없어 실로 선조께 만에 하나도 미치지 못한다. 더욱이 하물며 지금 임금에게 죄를 얻어 선대의 덕에 누를 끼쳤으니, 더더욱 아무 일 없이 죽은 사람과 같게 해서는 안 된다. 상례와 제례의 모든 일은 검약함을 따르기에 힘써서 조금도 정도에 넘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내 이러한 뜻을 따르도록 해라.

우리 집안의 상례와 제례는 옛날의 예법과 어긋난 것이 적지 않다. 할아버지께서는 늘 선대에 이를 행한 것이

이미 오래되었으니, 경솔하게 마음대로 고치기가 어렵다고 가르치셨다. 하지만 또한 그 가운데 고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거든 후손이 잘 헤아려서 이를 고쳐도 괜찮다는 가르침도 남기셨다. 무릇 일이란 오래되고 보면 마땅히 고쳐야 하니 한결같이 잘못을 고수해서는 안 된다. 이제 내가 죽거든 상례와 제례의 모든 예법은 옛날과 지금이 같지 않거나, 재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한결같이 《상례비요(喪禮備要)》에 따라 행하도록 해라.

신도비를 세우는 일은 지나치게 사치하거나 크게 하여 폐습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 할아버지의 신도비 또한 분부에 따라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 이제 내 무덤에는 다만 짧은 표석만 세우고, 지석을 묻도록 해라. 지석에는 세계(世系)와 생졸(生卒), 이력만 간략히 적어, 장황한 글로 남의 웃음을 사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내가 평소 재덕도 없이 한갓 선대의 음덕 덕분으로 두터이 나라의 은혜를 입어 지위를 훔치고 분수를 넘어, 스스로 재앙을 빨리 오게 하였다. 오늘 일은 가득 넘치는데도 그치지 않고 물러남을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비록 후회하나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무릇 내 자손들은 마땅히 나를 경계로 삼아 언제나 겸퇴(謙退)의 뜻을 지니도록 해라.

 

벼슬길에 나가서는 높은 요직을 멀리 피하고, 집안 생활에서는 공손과 검약을 힘써 행하도록 해라. 교유를 삼가고 의론을 간략히 함에 이르러서는 한결같이 선대에 남기신 법도를 따라, 몸을 이끌고 집안을 보존하는 방법으로 삼는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이제 여러 손자의 이름에 ‘겸(謙)’자를 붙인 것도 바로 이러한 뜻에서다. 옛 사람은 독서하는 종자가 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너희가 능히 부지런히 여러 자식들을 가르쳐, 마침내 충효와 문헌의 전통을 실추시키지 않는다면, 문호를 지키는 것이 꼭 과거 시험이나 벼슬길에만 달려 있지는 않을 것이다.
기사년(1689) 4월 7일 문곡옹(文谷翁)은 아들 창집(昌集)․창협(昌協)․창흡(昌翕)․창업(昌業)․창집(昌緝)에게 주노니, 여러 손자가 성장하기를 기다려 또한 이 글을 보여주도록 하라.

余位躋三事, 年踰六旬, 受命而死, 無復可恨. 而第有所恨者, 被三朝罔極之恩, 無絲毫報效, 終陷大僇, 孤負願忠之志, 此一恨也. 自少有志於學, 好觀義理書, 至老亦未敢忘此志. 而由其庸懦因循, 不能一日實用其力, 終於無所聞而死, 此二恨也. 雖早出世路, 而實少宦情, 性且好山水, 每思休官就閒, 送老於寂寞之濱, 嘗營茅棟於白雲山中. 意實在此. 而拘牽韁鎖, 竟未遂初服, 此三恨也. 此不可不使汝曹知之, 故書以示之.
余適當艱危之日, 久叨匪據. 弘濟之責, 本非所堪. 癏官病國之罪, 固不可勝贖. 而若其愛君一念, 自謂可質神鬼. 及至今日, 區區此心, 亦無以自白. 唯當祈知於後世之子雲耳.
先祖考臨終, 嘗以喪祭從儉有遺戒. 余之無狀, 固不及先祖萬一, 而況今得罪君父, 忝累先德, 尤不可自同無故之人. 喪祭凡事, 務從儉約, 毋得少有踰濫, 以遵余此志.
吾家喪祭之禮, 有違於古禮者頗多. 先祖考每以先世行之旣久, 難於率意釐改爲敎. 而亦嘗有其中不可不改者, 則後孫可以量度而改之之敎矣. 凡事久則當變, 不可一向膠守. 今余之喪, 喪祭諸禮, 除古今異宜財力不逮者外, 一從喪禮備要以行之.
墓道石役, 固不宜過爲侈大, 以效弊習. 而先祖考神道, 亦因治命, 不得立碑. 今余之墓, 只樹短表, 且埋誌石, 略記世系生卒履歷, 毋得張皇文字, 以取人譏笑. 余素無才德, 徒以憑藉先蔭, 厚蒙國恩, 竊位踰分, 自速釁孼. 今日之事, 無非履盛不止, 求退不得, 以至於此. 雖悔曷及. 凡我子孫, 宜以我爲戒, 常存謙退之志, 仕宦則避遠顯要, 居家則力行恭儉. 至於愼交游簡言議, 一遵先世遺矩, 以爲褆身保家之地, 至佳至隹. 諸孫之名, 今以謙字命之者, 卽此意也. 古人云不可使讀書種子斷絶, 汝輩果能勤誨諸兒, 終不失忠孝文獻之傳, 則持守門戶, 不必在於科第仕宦矣.
己巳四月初七日, 文谷翁書與子昌集昌協昌翕昌業昌緝, 待諸孫成長, 亦以此紙傳示.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숙종조 남인과 노론의 당쟁 와중〔己巳換局〕에서 남인의 모함으로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아 죽기 전 자식들에게 남긴 유언이다. 그는 18세에 사마시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23세에 알성문과에서 연거푸 장원에 올랐다. 이후 44세에 우의정을 지냈고, 뒤에 영의정까지 올랐다. 세 임금을 섬겼으나, 당시 서인과 남인의 반목은 골이 너무 깊었다. 죽고 죽이는 정쟁이 그칠 날 없었다. 오늘에 와서 어느 한편의 편을 들어 옳고 그름을 갈라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죽음을 앞에 두고 보여준 그의 한두 가지 언행을 통해 그의 사람됨을 가늠할 수는 있다.

적소에서 그는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한참 바둑을 두는데 흰 가마가 안 뜰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김수항이 바둑을 두면서 천천히 말했다. “오늘 장차 사약을 내린다는 후명(後命)이 있어, 집 사람이 날 위로하러 온 모양일세.” 바둑 두던 손님이 깜짝 놀라 그만 두자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말없이 바둑돌을 놓으며 안색에 흔들림이 없었다. 잠시 후 아들인 농암 김창협과 삼연 김창흡 형제가 마당에 엎드리며 울었다. 김수항이 아들을 나무랐다. “후명은 아직 이르지도 않았다. 너희는 내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야 할 것이다.” 잠시 후에 후명을 전달하러 온 사신이 도착했다. 그는 절을 올리고 왕명을 받았다. 그리고는 여러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세상 사람들을 보니, 후명을 가져온 사신을 마치 원수처럼 여기더구나. 이는 임금의 명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다. 너희는 그러지 말아라.” 그리고는 사자를 향해 “간 밤 꿈에 시 한 수를 지었네. 들어 보겠는가?” 하고는 이를 읊어 보여주고 사약을 받들어 마시고 세상을 떴다.

한편 이런 이야기도 전한다. 김수항은 아내 나씨가 자신이 죽은 후 뒤따라 세상을 버릴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고 또 당부하다가, 마침내는 유서와는 따로 “여러 자식들을 올바로 키우지 못하면 지하에서도 만나지 맙시다.”라는 글을 써서 아내에게 주었다. 부인은 울면서 그 글을 받아 몸에 간직했다. 그녀는 남은 평생 자식들의 훈도에 힘써서 후대 육창(六昌)으로 일컬어지는 여섯 형제들을 길러냈다. 죽을 때 그녀는 남편이 자신에게 써준 글을 품은 채 관 속으로 들어갔다.

죽음을 앞두고 쓴 유서에서 그는 세 가지 안타까운 일을 적었다. 나라에 큰 은혜를 입고도 보답하지 못한 일과, 공부에 뜻을 두고서도 마침내 성취하지 못한 일, 끝으로 산수 간에 묻혀 노년을 보내려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는 직분을 옳게 수행하지 못해 나라에 큰 누를 끼친 것을 안타까워하며, 임금을 사랑하는 붉은 뜻만큼은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다고 떳떳이 밝혔다. 이어 상례와 제례를 간소하게 치르라는 말, 무덤에는 신도비를 세우지 말고, 간략한 이력만 적어 지석에 새겨 묻으라는 당부를 남겼다. 또 손자들의 이름에 ‘겸(謙)’자를 돌림자로 삼아 자신을 낮춰 지나침을 경계하는 뜻을 일렀다.
문집 《문곡집(文谷集)》에는 사약을 받고 쓴 〈문후명(聞後命)〉이란 시가 실려 있다.

세 조정에 몸을 담아 무슨 보탬 있었던가
한번 죽음 이제껏 분수에 마땅하다.
다만 오직 임금 사랑 이 마음 피와 같아
마땅히 구원에서 귀신 보내 알게 하리.

三朝忝竊竟何裨 一死從來分所宜
唯有愛君心似血 九原應遣鬼神知

또 삶의 끝자리에서 손자의 돌림자를 정해 자식들에게 보여주며 쓴 시도 있다.

가득 참은 귀신의 시기 부르고
영명(榮名)은 재앙의 뿌리가 되네.
모름지기 한 글자 ‘겸(謙)’자를 주니
힘써서 자손들을 경계하여라.

盛滿招神忌 榮名作禍根
須將一謙字 勉勉戒諸孫

억울한 죽음을 앞두고 그인들 왜 할 말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 깊은 원망은 접어두고 한 마디도 내비치지 않았다. 다만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누려 재앙을 입었다. 그러니 너희는 나를 경계 삼아 겸손의 의미를 새기고 새겨 재앙의 기틀을 멀리하라고 당부한 것이다. 죽음 앞에선 그 담대하고 담담한 자세가 길게 마음에 여운을 남긴다. 

 

출처: http://jungmin.hanyang.ac.kr/ > 가훈과 유언> 18번, 독서하는 종자가 끊어지지 않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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