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일묘사충(一廟四忠)

굽어보고 우러러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다

추읍산 2009. 6. 21. 18:51

아랫글은 정민교수의 한국한문학 홈페이지(가훈과 유언 21)에 실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

 

 굽어보고 우러러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다

-김창집(金昌集, 1648~1722)이 아들에게 남긴 유언[寄濟謙書] 

천리 밖에 끌려와 온갖 욕을 다 받았으니, 도리어 한번 죽어 통쾌함만 같지 않구나. 바로 성산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후명(後命)이 있음을 들었다. 금오랑이 이르면 바로 목숨을 거두어 갈 것이다. 굽어보고 우러러 보매 부끄러움이 없으니, 웃음을 머금고 지하에 들어갈 것이다. 다만 너와 서로 얼굴도 못본 채, 게다가 너의 생사조차 알지 못하니, 이 한스러움만은 다함이 없구나. 단지 네가 잘 심문에 대답하여서 살아 옥문을 나오기만 바랄 뿐이다. 거제도에 있을 적에 이미 영결을 고하는 편지를 보냈으니, 이번엔 자세한 말을 되풀이 하지 않는다.

千里被逮, 僇辱備至, 反不如一死之爲快. 卽到星山, 始聞有後命. 金吾郞至, 則卽將受命矣. 俯仰無怍, 含笑入地. 而只與汝不相面, 又不知汝之生死, 此恨最無窮矣. 只冀汝善爲納供, 生出獄門耳. 在巨濟, 已有告訣書, 玆不復縷縷.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 1648~1722)이 1721년 신임사화 때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다음해 4월 27일 적소에서 사약을 받기 이틀 전에 아들 김제겸(金濟謙)에게 보낸 유언이다. 김창집은 앞서 본 문곡 김수항의 맏아들이었다.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 보아 조금의 부끄러움이 없으니 웃으며 지하로 들어가겠다는 말이 늠연하다. 다만 아들만은 살아남아 집안의 가통을 이어가기 바라는 부정이 애틋하다. 죽기 전에 한번만이라도 아들 얼굴을 보고 싶고, 생사 여부를 확인하고 싶은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짧은 편지 속에 잘 드러나 있다.
김창집이 지은《남천록(南遷錄)》에는 사사되기 전 아들 제겸(濟謙)과 손자 및 외손 민백순(閔百順)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이를 통해서 임종 직전 몽와의 소회와 자손들에게 남긴 유언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 두 편지는 위 글을 쓴 다음날인 4월 28일에 외손자 민백순(閔百順)과 친손자들에게 보낸 유서인 〈기외손민백순서(寄外孫閔百順書)〉다.

전후의 편지는 근래 마음이 어지러워 답장하지 못했다. 너는 틀림없이 우울해 하고 있겠지? 매번 네 편지를 보면 시대를 상심하는 마음이 글 밖에 넘쳐나더구나. 이제 나는 장차 죽을 것이다. 네가 어떤 마음가짐을 지녀야 하겠느냐? 모름지기 길게 상심하지 말아라. 오직 네 어미를 보호하는 데 마음을 쏟아 네 어미가 보전함을 얻는다면 내가 눈을 감을 수 있겠다. 네가 능히 문자를 즐기니, 이는 반드시 내 권유를 기다리지 않고도 성취가 끝없을 것이다. 다만 삼가서 지키나가기를 바란다. 너의 자는 순지(順之)로 정하는 것이 좋겠다. 〈등루부(登樓賦)〉는 살펴보아 보내지 못하니 안타깝구나.

前後書, 近緣心擾, 未克作答. 汝必爲鬱也. 每見汝書, 傷時之意, 溢於辭表. 今余將死矣. 汝作何如懷耶. 須勿永傷. 惟以保護汝慈爲意, 俾得保全, 則余目可瞑矣. 汝能嗜文字, 此則必不待余勸而成就無量也. 只冀愼護. 汝字, 以順之爲定, 可也. 登樓賦, 未及考送, 可嘆.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에 절망할 딸을 걱정해서 외손자에게 제 어미를 당부했다. 외손자는 자기와 달리 순조롭게 앞길이 열리기를 바라, 자를 순지(順之)로 지어주었다. 외손자가 지어 보낸 〈등루부〉에 대해 무어라 대답해주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안타까워 했다. 이와 별도로 친손자들에게는 〈기제손서(寄諸孫書)〉를 따로 남겼다.

오늘의 내 화(禍)는 진실로 면하기 어려운 줄로 안다. 하지만 네 아비와 형들은 능히 살아서 옥문을 나섰느냐? 생각이 이에 이르매 눈을 장차 못 감겠구나. 다만 바라기는, 너희들이 화변(禍變)을 가지고 스스로 자포자기하지 말고, 더욱 학업을 부지런히 하여 반드시 독서하는 종자가 끊어지는 근심이 없게끔 해야만 한다. 할 말은 많지만 줄인다.

余之今日之禍, 固知難免, 而汝之父與兄, 其能生出獄門耶. 念之至此, 目將不瞑矣. 惟望汝等勿以禍變而自沮, 益勤學業, 俾無讀書種子仍絶之患, 至可至可, 餘不一.

독서하는 종자가 끊겨서는 안 된다. 이 한 마디 다짐의 말이 눈물겹다. 증조 할아버지도 사약을 받았고, 할아버지도 사약을 받았고, 아버지도 사약을 받았다. 하지만 그 죽음은 스스로 돌아보아 조금의 부끄러움이 없는 길을 가고자 하여 스스로 택한 것이기에 떳떳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흔들림 없이 공부해라. 독서하는 종자가 끊겨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아서는 안 된다. 손자들이 이 편지를 받았을 때 그는 이미 웃으며 지하로 들어간 뒤였다. 특히 마지막 말은 자신의 아버지 김수항이 사약을 받으면서 자신들에게 내렸던 유언이기도 했다.
이튿날인 4월 29일 그는 사약을 받았다. 금오랑으로 사약을 들고 온 사람은 정암 조광조의 후손인 조문보(趙文普)였다. 문에 서서 어서 사약을 마시라고 독촉이 심했다. 김창집은 그를 보며, “어찌 네 선조를 생각지 않느냐!”고 하면서 〈절필(絶筆)〉시 한 수를 담담히 읊었다.

아비를 사랑하듯 임금 사랑했으니 愛君如愛父
하늘 해가 내 붉은 맘 비춰 주리라. 天日照丹衷
선현께서 남기신 이 두 구절이 先賢此句語
슬프기가 고금에 한가지로다. 悲絶古今同

1,2구는 조광조가 사약을 받으면서 지은 절명시의 구절이었다. 조광조의 그 마음이 바로 지금 나의 마음이라 하여 금오랑의 재촉을 나무랐다. 이어 그는 다시 사약을 받기 직전 이명룡(李明龍)에게 주는 한 수의 시를 쓰고 사약을 받았다. 제목은 〈죽음에 임해. 이명룡에게 써서 주다[臨命, 書贈李命龍]〉이다.

너는 진작 내 집에 내맡겨져서 汝早寄吾家
서로 보길 아비와 아들 같았네. 相視猶父子
반평생 휴척(休戚)을 함께 하면서 半生共休戚
은의(恩義)를 보전함을 늘 말했었지. 永言保恩義
날 따라 가시 울 적소(謫所)에 드니 隨我入栫棘
영해라 아득한 천리 밖일세. 嶺海渺千里
자식이 있어도 못 따라오니 有子不相隨
너 아니면 다시 누굴 의지하리오. 非汝誰復倚
어이 알았으리 잡혀 가는 길에서 那知被逮路
사약 내려 죽는 소식 듣게 될 줄을. 忽聞賜我死
울부짖고 울음 우는 너를 보자니 見爾號且泣
자연스레 내 마음도 아파지누나. 自然傷我意
내 유골 거두는 건 네 책임이니 收骨是爾責
너는 힘써 눈물을 그만 거두라. 勉爾且收淚
내 아들이 감옥문을 나서게 되면 吾兒出圓扉
너는 꼭 오늘 일을 전하여 다오 若爲傳此事

아들 역시 귀양지에 있어, 아비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키워 기른 이명룡이 사약 받는 자리를 지켜 섰다가 터져 나오는 오열을 멈추지 못했다. 내 끝자리를 네가 지켜 주니 참 고맙구나. 그만 눈물을 그쳐라. 네가 자꾸 우니 내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내 떠나던 모습과 말을 잘 기억했다가 훗날 적소에 있는 내 아들이 풀려나거든 그 아이에게 똑똑히 전해주렴. 내 이제 다만 이 일을 네게 부탁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아들 죽취(竹醉) 김제겸(金濟謙, 1680∼1722) 또한 김창집이 죽은 뒤 얼마 되지 않아(1722년, 8월) 부령(富寧)의 적소(謫所)에서 사사되고 말았다. 문곡 김수항, 몽와 김창집, 죽취 김제겸으로 이어지는 한 집안 삼대의 불행은 조선시대를 통틀어도 보기 드문 일이다. 
              

출처: http://jungmin.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