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세유교
발췌: (13) 일묘사충(一廟四忠)
-- 저는 어려서부터 어머님인 풍산홍씨로부터 서윤공 김번(庶尹 公 金璠) 할아버지 묏(墓)자리에 얽힌 이야기, 청음 김상헌과 그 형님 선원 김상용 할아버지의 병자호란 때 충성을 다한 이야기, 문곡 김수항 할아버지 이하 4대에 걸친 일묘사충의 피눈물나는 이야기, 6형제(六昌)를 훌륭하게 교육한 11대조 할머니인 안정나씨(安定羅氏) 이야기, 영안 부원군 김조순과 황산 김유근 할아버지, 순원왕후, 외증조(外曾祖) 되시는 홍철주[洪澈周 1834~ 1891 |자: 백영(伯泳)|시호: 효헌(孝獻)]등 집안에 구전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왔습니다. --
제가 태어나서 성장한 곳은 양평군 개군면 향리(楊平郡 介軍面 香里, 당시는 여주군)인데 또 한곳의 선영이 있었습니다. 여주군 흥천면 효지리인데 그곳에는 5대조 황산 김유근[영안 부원군 김조순의 장자이나 종백부 김용순(金龍淳)에게 입후], 그리고 6대조 김용순[1754~ 1823 |자: 시백(施伯)]의 묘소가 있었습니다.15) 지금은 모두 개군면 선영으로 모셨습니다.양 선영은 30리 거리이고 당시만 해도 1950, 60년대 초라서 차편이 아닌 걸어서 어머니와 함께 1년이면 몇 차례씩 다녔습니다. 여주군 대신면 양화 나루에서 배를 타고 남한강을 건너 흥천면 효지리를 다녔는데 돌아올 때는 중간 기착지로 여주군 대신면 초현리 아래새재 마을에 들리곤 하였습니다.
그곳은 11대조 문곡 김수항 할아버지의 종가댁으로 당시 종손이신 김익한 아저씨께서 사셨습니다. 그곳엔 대방 마님이라고 불리던 노(老) 할머님(김익한 모친)이 계셨는데 그 할머님으로부터 위 일묘사충에 얽힌, 그 당시의 피눈물 나는 유서, 한글로 그것도 붓글씨로 기록한 책인 죽취 김제겸의 선세유교, 충민공 임인유교(先世遺敎, 忠愍公 壬寅遺敎)라는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위 책이 쓰이게 된 역사를 추적합니다. 추리하면, 9대조 충민공 죽취 김제겸 할아버지께서 1721년 12월 12일 울산으로 유배당하시고 다음 해인 1722년 4월 24일 유배지를 찾아온 셋째 아들 미호 김원행 할아버지께 유언하시고 한글로 써 주신 것을 미호 할아버지께서 정리(整理)하신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 한글 유서를 문곡 종가댁에서 보관하면서 알아듣기 쉽게 교정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16) 이해하는데 나아지긴 했으나 여전히 옛 글로 쓰여있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김제겸은 울산 유배지에서 부령으로 옮겨지고 1722년 8월 24일 사약을 받으셨는데, 그 4개월 전 쓰신 것으로 여기서 잠깐 읽는 분의 혼돈을 피하고자 말씀드리자면, 미호 김원행 할아버지는 농암 김창협의 아들 김숭겸(金崇謙)에게 입후되었습니다.
이 피눈물 나는 기록을 어머니께서 저희 보라고 붓글씨로 옮겨 놓으셨고 50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문곡 김수항의 종가댁인 그곳 마을 뒷산엔 위에서부터 몽와 김창집 묘소, 죽취 김제겸 묘소, 취백헌 김성행 묘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1990년대 초 복원한 일묘사충(一廟四忠, 철종대왕 어필)현판이 있는 조그마한 각(閣)이 있습니다. 17) 김창집의 부친인 문곡 김수항의 묘소는 남양주시 이패동 돌누께 마을에 있습니다. 필자는 300년 전 있었던 장희빈(張禧嬪)이라는 여인으로 말미암아 잉태되고 전개되는 이 슬픈 이야기 일묘사충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추기
두 권으로 기사유교 그리고 선세유교가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기사유교는 분실하였고 선세유교는 2006년 양평군에 기증하였습니다. 이는 필자의 출연 아래 몇 년 전 KBS 느티나무 시간에 방영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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