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庶尹公의 후예

안동김씨 김상헌 조부 김생해 가문의 문과 급제 위상

추읍산 2009. 7. 9. 08:47

 

 

한국명문 (2004-05-21 오후 7:44:45)

 

흔히 장동김씨라고 불리는 안동김씨 김상헌의 조부 김생해 가문의 문과 급제 위상을 알아보고자 한다. 이 김씨 가문은 비슷한 시기의 한국 175개 가문 중에서 문과 급제자를 약 136명[약간 수치의 오차가 있을 수 있음]을 냈다. 이 숫자는 조선조 소단위 문중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태풍 사라호와 같은 위력을 지닌 수치이며, KBS 관현악단의 웅혼한 리듬을 타고 울려 퍼지는 "금관자 서말"의 전주곡이다.

오늘날 한 해에 사법 고시와 행정 고시를 단 한 명도 못내는 대학이 있는 반면, 100-200명을 쏟아내는 서울대학이 있다. 후자 대학에는 대한 8도의 준재들이 모여 그들의 기량을 여러 분야에서 자랑하면서 국가에 공헌한 나머지 온 국민에게 폭넓은 사랑을 받으며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중에서도 사법 고시와 행정 고시의 높은 합격률이 아름다운 서울 대학의 꽃을 활짝 피어나게 하고 있다. 이것은 뭇사람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요인이 되는 반면에 고시 합격의 영광이 민주 시민의 평등한 생존권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우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김생해 가문의 문과 급제자 수치는 조선조 사회에서 그 위상이 과연 어느 정도이었을까? 오늘날 고시 합격자 한 명 못내는 대학이 많고 시골 대학이 그 정도가 심하듯이 조선조에서도 과거 급제자 한 명 못낸 가문이 수두룩 했고 시골 가문이 그 정도가 더 심했다. 호남,영남의 유명 가문들도 맥을 못췄다. 호남의 3대 명문인 장흥고씨 제봉 고경명 가문이 약16명, 행주기씨 고봉 기대승 가문이 약6명, 울산김씨 하서 김인후 가문이 약5명을 냈을 정도이니 호남의 기타 가문은 오죽하겠는가? 영남의 3대 명문인 진성이씨 퇴계 이황 가문이 약34명, 풍산유씨 서애 유성룡 부친 유중영 가문이 약 16명, 의성김씨 학봉 김성일 부친 김진 가문이 약 21명을 냈을 정도이다.

한양의 명문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반남박씨 현석 박세채 고조 문강공 박소 가문이 약 127명으로 김생해 가문을 바짝 추격하고 있다. 이것은 다소 뜻밖의 현상이다. 오늘날에도 서울대학의 고시 합격률을 이처럼 바짝 추격하는 대학이 없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안동김씨 세도 가문을 압박하는 가문이 있다니 이것이 놀라운 것이다. 안동김씨가 시골 명문들에게 보여준 발군의 실력! 천하무적, 유아독존의 기상이 압박을 당하는 형세에 있었다. 그 뒤를 이어서 대구서씨 약봉 서성 가문이 약105명, 냠양홍씨 영의정 홍서봉 조부 석벽 홍춘경 가문이 약97명, 풍산홍씨 영의정 홍봉한 선조 홍수 가문이 약89명, 해평윤씨 오음 윤두수 부친 윤변 가문이 약86명, 여흥민씨 좌의정 민정중 고조 민사용 가문이 약83명으로 줄줄이 뒤를 추격하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친안동김씨 가문이 많이 있다. 서로 연합하여 정권을 유지하고 함께 혼인하여 같은 운명체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사제간으로 뜻이 통하고 친교로 동맹을 다졌다, 그러나 이 명문들 끼리는 언제나 동지만은 아니였다. 조금만 방심하면 곧장 등뒤에 비수가 번쩍이었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굳게 결속을 외치지만 내면적으로는 항상 경쟁과 대결의 연 속이었다. 치열한 접전의 화약 냄새가 물씬 풍길 때가 많았다. 정국 주도권 쟁탈전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세도 정치의 판도 변화를 주기도 하였다.

이 수치는 조선조 유명문중의 날카로운 칼날 속에서 안동김씨가 시퍼렇게 살아서 조선 8도를 향해 포효하는 높은 기상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 무소불위의 권력이 결국은 타문중으로 넘어갔으나 타문중이 그 기록을 갱신하지 못했다.

안동 김씨의 이 수치는 서울대학의 그 수치 모양으로 그 시대 사람들의 우려 대상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로 인해 김씨 일족이 중요한 자리를 독점한다는 불만이 고조되었을 것이다.

그 때의 안동김씨와 오늘의 서울 대학이 그 성격이 다르고 정도의 차이는 크게 날지 모르지만 그 수치가 당시 권력과 명예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반면에 그 수치가 일고의가치도 없다고 질타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며, 세도 정치에 대한 분노로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여하간, 서울대학이 한시대에 뛰어난 우수성으로 이 시대를 대변하는 상징성이 있듯이, 안동김씨도 조선조 중,후기에 뛰어난 우수성으로 그 시대를 대변하는 상징성이 있다고 본다.

문과 급제 부문에서 조선조 중, 후기 문중 1위는 결코 가벼운 기록이 아니다. 이것은 안동김씨의 재주를 말하는 지표다. 유전자의 우수성을 드러내는 안동김씨의 특성이다. 이것은 안동김씨의 영원한 자랑이다

세도정치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렇다고 하여 권력 집중의 폐해를 이 수치에만 몽땅 연관지울 수 없으며, 안동 김씨가 과거시험에서 보여준 발군의 능력을 세도정치 때문에 바보스럽다고 할 수 없다. 이 수치는 안동김씨의 재주를 말하는 지표다. 유전자의 우수성을 드러내는 안동김씨 가문의 특성이다.

세도정치 때문에 안동김씨의 뛰어난 특성조차 혐오하는 것은 우리의 과거에 대한 반성의 폭을 호좁게 할 수도 있다. 세도정치와는 전연 무관한 많은 인물을 싸잡아 욕되게 할 수도 있다. 국민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고 끝없는 감동을 주는 안동김씨의 큰인물들을 한꺼번에 세도정치라는 무덤에 밀어 넣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의 손실이다.

국가가 실시한 등용문에서 선양된 안동김씨의 재주와 능력은 유사이래 단연코 제일이다. 현재까지는 어떤 집단도 안동김씨의 그것을 능가하지 못했다. 어쩌면 서울대학이 그것을 추월할지도 모른다. 서울대학이 예사롭지는 않다. 이 김생해 가문의 후손 인구 대비 서울대학 출신 인원,그당시 우리나라 총인구 대비오늘의 총인구, 그당시 총인구 대비 과거 급제자 수, 오늘의 총인구 대비 고시 합격자 수 등등을 고려하다면 서울대학이 추월할른지는 좀 지켜 봐야 할 것이다.

안동김씨가 400여 년을 두고 선두를 한번도 내준 적이 없는 기록을 서울대학이 갱신한다 할지라도 그 대학이 앞으로 400여 년을 두고 선두의 자리를 계속 지킬지는 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안동김씨의 재주와 능력은 우리가 사랑해야 한다. 인물을 아끼는 국민은 번창하기 마련이다. 해동에 인물이 많기로 이웃 나라에 소문나 있다. 우리는 새 시대에 부응하여 많은 인물을 길러내야 한다. 이제 그것이 이 시대의 소명이다.


김두영  
문제는, 조선 후기 특히 세도정치 시기에 시행되었던 과거 시험이 100% 공정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왕의 지명이나 권력층의 비호 내지 방관으로 인해, 특정 가문의 특정 인물이 급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과거장에서의 부정 행위와는 별도). 정권이 바뀌면 그쪽 인물이 줄줄이 급제하고, 해당 정권의 명망 있던 선비나 그 자제가 급제하는 경우(그 전까지는 장기간 낙방)가 종종 있었던 것에 유의해야 하겠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의 과거제는 비교적 공정하게 시행되었다는 점은 여전합니다만.    2004-05-21 오후 11:34:00

출처: http://thugjong1.cafe24.com/bbs/view.php?id=list1&page=25&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