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贊成公(達行) 가문

영안 부원군 김조순의 모습

추읍산 2009. 8. 22. 15:38

시조 김선평(金宣平) 

 

김상헌(金尙憲)-광찬(光燦)-수항(壽恒)-창집(昌集)-제겸(濟謙)-달행(達行)

  

  

20세 金達行

 

21세

 

 

履慶

 

履中

履基

22세

 

 

   明淳       生父履基

 

祖淳

龍淳

23세

興根

應根

弘根

左根

元根

   逌根       生父祖淳

24세

炳德

炳始

炳溎

炳冀

炳地

炳㴤

25세

宗圭

容圭

性圭

用圭

錫圭

定圭


 

 

영안 부원군 할아버지의 서민적인 모습

저는 어머님으로부터 영안 부원군 김조순 할아버지의 청렴결백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느때 어느 곳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방을 순시하시던 어느 날 부원군 할아버지는 그곳 지방관과 밥상을 마주하였습니다.

그 지방관은 보리밥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옆에서 맛있게 먹는 분이 마주앉은 분이 영안부원군 김조순 할아버지인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 후 영안 부원군 할아버지의 이런 모습에 감동을 한 그 지방관은 크게 뉘우치고 훌륭한 관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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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글은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의 김조순 신도비 해석문에서 공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을 부분인용 하였습니다. 전문은 본 블로그에 올린 바 있습니다.


평소에 아들들을 가르칠 때에는 의로써 바로잡았다. 공이 현암의 시골집에 있을 때 둘째 아들의 문과 급제 소식을 듣고도 즐거운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도리어 서신을 보내 힘쓸 것을 격려하기를 매우 준절히 하니 사람들은 분수에 넘치는 일을 경계하는 공의 뜻을 알고 크게 감복하였다.

 

중년에 옥호에 작은 집을 짓고 때때로 쉬며 목욕하며 지냈는데 집이 매우 박루하여 항시 거처하는 방은 겨우 두간 넓이에 지나지 않아 손님이 오면 쉬어갈 수조차 없었다. 의복, 기명, 장식품 등은 애당초 마음에 두지를 않았고 오직 좌우에는 서적만이 있었을 뿐이다. 공의 담백함은 이와 같았다.

 

익종께서 동궁으로 계실 때 외조모를 위하여 탁지(호조)에 명하여 견평방 본 집에 당을 한 채 지어드렸다. 공은 그때에 여주 묘막에 있었는데 돌아와 보니 그 문이나 창이 모두 조각품으로 훌륭하게 장식되어 있음을 심히 불쾌하게 여겨 결국은 고쳐버렸다. 이는 공이 본디 검소함을 지켜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고 분수이외의 복은 누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안이 본래 가난하여 끼니를 이어가지 못하였고 귀하게 된 뒤에도 자산을 늘리는 데에는 마음이 없었으며 봉록의 여분마저 친척이나 친구에게 또 혹 소원한 사람에게까지 나누어 주었다. 문생이나 하인 등 조석으로 상대한 사람이 백명이 넘었어도 후하거나 박함이 없이 똑같이 대하여 각기 환심을 샀다. 이로 볼 때 공은 온화함과 돈후함이 쌓여 스스로 많은 복을 받게 된 것이다. 공의 인과 애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니 지금까지도 공을 칭찬해 마지않는 사람들이 많다.


청양부부인 심씨 할머니

부인은 청양부부인 심씨로 정랑을 지낸 휘 건지의 따님이오, 이조판서 휘 택현의 증손녀이다. 품성이 조용하고 그윽하며 용모와 행실은 정숙하여 대혼(순원왕후혼사)을 치룬 후로는 집안이 빛을 보게 되었지만 늘 조심스럽게 처신하여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궁궐에 출입하지 아니하였다. 또 궁궐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곧 바로 나와서 말하기를 “외부 사람은 오래 머물러서는 아니된다.”고 하였다. 공도 일찍이 여자 선비로 허여하였다.


출처: http://gsm.nricp.go.kr/_third/user/search/KBD008.jsp?ksmno=8655